WILHELM VON SAINT-THIERRY
샹 티에르의 윌리엄
MEDITATIVE GEBETE
묵상 기도
세 번째 묵상 - 하느님을 보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
들어가는 말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하느님을 뵈오려는 갈망으로 영혼은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묻고 찾아다닌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 그분을 갈망하고 하나 되려는 그를 그 어떤 어려움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영혼의 배고픔은 크지만 아직 하느님은 그것을 채워주지 않으신다. 하느님을 뵙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하게만 여겨져 그는 갈망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 성서를 통해서 그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영혼의 큰 뜻은 곧 사랑이다. 고통스러운 아픔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감추실 지라도 열렬히 사랑하는 영혼은 결코 그분을 찾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1. 주님, 제 눈을 들어 당신을 감히 바라 뵈올 수는 없사오나 당신을 뵙고 싶은 갈망으로 죽을 지경입니다. 모세에게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출애굽 33,20)
당신을 뵙고 싶어서 죽든지 아니면 당신을 뵙고 나서 죽든지, 저도 모세가 당신의 얼굴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듯이 저의 얼굴을 가립니다. 성서에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출애 3,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하느님을 그분이 누구인지 이름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본질에 따라 누구인지를 알려고 했더라면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인지 그는 그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
2. 모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그는 같은 갈망으로 당신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달라고 애원하였고 당신은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겠다.”(출애 33,19) 그렇다면 주님, 당신의 얼굴이 아니고서 모든 선을 어디서 우리가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다윗도 같은 갈망으로 외칩니다.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편에서 평안을 길이 누리리이다.” (시 15,11)
3.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마음은 당신을 기다림에 초조해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에 대하여 생각 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시편 26, 8). 당신을 통해서 당신을 찾으려 하오니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저를 내쫓지 마소서, 저를 버리지 마소서(시 26,9). 저는 믿고 또 확신합니다(2디모 1,12). 당신 얼굴의 빛 속에서 걷는 이는(시 88,116)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의 모든 판단은 당신 면전에서 나옵니다(시 16,2). 그들이야말로 참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당신 얼굴의 모상에서 읽을 수 있고 알아볼 수 있는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너무 놀라 꼼짝 못하게 될까봐 당신의 얼굴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저는 당신 앞에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로 서 있습니다(묵 3,17 루가 18,35). 당신은 저를 보십니다. 저는 당신을 볼 수 없고 제 마음은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당신에게 저의 모든 것을, 저의 전존재를, 제가 할 수 있는 것, 제가 아는 것 모두를 그리고 당신께 대한 저의 갈망과 저의 실패를 드립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디에서 제가 당신을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4.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또 당신은 어디에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이 지금 여기 저와 함께 계시며 당신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고 있습니다(사도 17,28). 제 영혼은 당신 현존 안에서 사랑에 불타고 당신 구원을 기다리고 있나이다(시 118,81). 당신이 저와 함께 계심이 진리임을 알고 그것이 얼마나 제게 위로가 되는지 느낍니다. 저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느끼고 당신을 경배하며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저와 함께 계시는데 왜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아니합니까? 장해물이라도 있습니까? 그 길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훼방을 놓습니까? 당신의 선하심으로 저와 함께 당신은 계시옵는데 왜 저는 저의 가장 고귀한 당신을 음미하면서 있지 아니합니까? 제 죄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까? 제 죄를 멀리 던져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골로 2,14) 제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저의 주님이신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죽고 싶은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것이 당신을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면, 저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제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 주님, 제 영혼은 당신 현존의 감미로움을 맛보지 않고는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고, 그의 감수성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당신을 보여주시어, 깨달을 때만 그는 당신을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당신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당신을 죽도록 사랑하듯이, 그렇게 저는 당신을 영원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 벌써 당신의 향기가 불어오는 듯합니다. 그것으로 저를 완전히 취하게 만드신다면 아마 저는 이 세상에서 다른 아무 것도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당신은 저에게 위로의 부스러기 같은 것을 선사하십니다. 그러나 제 갈망의 굶주림에 비하면 그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청하옵건대 제 영혼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의 구원이시여!(시 34,4) 왜 당신은 제게 당신께 대한 이토록 큰 갈망을 불어넣어 주십니까? 그것으로 다만 저를 괴롭히시려고, 내적으로 산산조각이 나게 하시려고, 아니면 저를 죽이기 위해서이십니까?
간절히 당신께 바라옵건대 주님, 이것이 저의 지옥이 아니기를? 그렇지만 지옥이라도 좋습니다! 저를 끊임없이 괴롭혀도 괜찮습니다, 저를 불 속에서 쉬지 않고 태우더라도 좋습니다. 저는 당신의 현존 안에 들어가(시 41,3 신명 31,11), 당신의 영광이 제게 드러날 때까지(레위 9,6 시 16,15) 그리고 제 영혼에게 당신을 바라뵈옴 안에서 영원의 축제가 빛날 때까지 하루, 한 시간,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5. 주님, 모세는 당신 앞에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고(출애 34,33-35 : 2고린토 3,13.15.) 그렇게 그는 통솔하는 백성들, 끊임없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는 백성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다름없는 당신 종 바오로는 당신에게 완전히 속해 있었고 신약의 확성나팔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을 그리워하여 사랑하는 제자들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2고린토 3,18). 이 사람은 당신의 면전에서 도망치지 않았고(시 67,2) 오히려 당신 얼굴을 찾았습니다.”
6.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저의 파렴치하고 주제넘은 행동을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아직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감히 모험을 감행하려 합니다. 이 땅에 불을 지르러 오신 당신의 불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당신의 불이 훨훨 타오르는 것은 당신의 뜻이었습니다(루가 12,49).
우리에게 늘 보여주시는 당신의 전능하신 자비와 온유하신 인내 안에서 청하오니 그 무엇인가를 여전히 찾고 있는 저를 가엾이 보아주소서. 저의 영혼에게 진정 그가 당신의 얼굴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무엇을 더 그리워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영혼은 그리움으로 지칠 대로 지쳤고 그가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그로 인해 눈이 멀고 그의 내면은 당황하여 어리둥절해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당신이 어떤 분인지 감히 보려고 덤빕니까? “당신의 참모습을 뵙는다.”는 말(1요한 3,2)은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만들어졌고,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당신 안에는 창조된 것도, 큰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있는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참모습” 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함 입니다. 당신의 참모습은 바로 당신의 존재하심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아들을 본다는 것은 아버지를 위해서 존재하심을, 그리고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아들에게 있어서 그의 전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마태 11,27)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의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이며 똑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스스로를 성령을 통해서 상을 내리시려는 사람, 하느님의 친구에게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에스텔 6,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찌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보듯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보듯이? -그분들에게 서로를 바라본다는 것이 결코 여기 있는 분과 다른 쪽에 다른 상대방이 있어서 서로 마주 바라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유일한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보는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7. 이것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면 시각과 시력이 생리학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육체의 모든 감각기능은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 감각을 느끼게 하는 감관(감각신경)을 통해서 감각으로 느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각은 보이는 것을, 청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을 통해서 감각으로 느끼고 다른 모든 감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인지한다든지 감각을 느낀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감각은 느끼는 대상을 지성에게 알립니다. 이렇게 볼 때 영혼이 느끼는 것 역시 현실 안에서, 아니면 그들의 특성 안에서 변화시켜주지 않으면 감정도 느낌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영혼이 사랑으로 충만한 애정을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 그리고 영혼 스스로도 선해질 때 그 영혼은 감관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좋으신 분으로 느끼고, 그분이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8. 영혼의 감수성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2고린토 3,18)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감수성은 이렇게 작용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감수성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영혼은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든지,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든지 늘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만일 사랑이 영혼을 넓혀준다면 그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대상과 본질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과 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선 자체이신 좋으신 분을 사랑하려면 그 선 안에서 스스로도 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서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씀과(지혜 1,1) “지혜를 배우려고 원하는 마음이 지혜를 얻는 진정한 시작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하느님의 사랑은 이러하고, 이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9. 오, 사랑, 사랑, 사랑이신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가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을 사랑하게 하셨고 그 큰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시 81,6 1요한 3,1).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참 좋겠습니다(마태 17,4). 우리가 이 순간에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에 대해 묵상하고,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쓰는 사람들에게 냉철한 이성과 정확하고도 잘 균형 잡힌 말을 주소서. 저희에게 당신을 위하여 불타는 열정의 마음을 주시어 당신 말씀의 뜻을 바르게 알아듣게 하여주소서(루가 24,27.32).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에 대한 사랑이 저를 재촉합니다.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은 그것을 보십니다. 저는 당신의 존엄하심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저는 가난한 사람이며 당신의 은총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당신 온유의 동정심에 호소하며 저를 엄위하심으로 짓누르지 마옵시고 당신 은총으로 저를 들어 올리소서. 저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하느님을 뵈옵는 것이 믿음의 참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 가서는 얼굴을 마주하고 볼 것입니다(고린토 13,12).
오만해지지 마라, 사람아, 헛된 자부심을 가지지 마라! 다니엘처럼 네가 갈망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곳에 머무르지 말아라(다니엘 9,23; 10,11.19). 그리고 이만하면 됐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이 지상에서 너의 하느님 생각, 너의 믿음이 네게 가르쳐주는 직관은 모두 거울에 비추이는 희미한 수수께끼일 뿐이다. 어떤 때는 어둡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명확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현존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자신을 숨기시는 그분을 우리는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체험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것은 흰 돌인데 그 돌 위에는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이름은 그 돌을 받는 사람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묵 2,17).
10.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이로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인가?”(로마 7,24) 만일 그가 하느님을 온전히 볼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그는 실제로 살게 될 것을 희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감관과 상상력은 얼마나 무능합니까! 이성은 다 무엇이고 이성으로 인한 깨달음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물론 이성은 하느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성의 힘만으로는 당신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역시 이성으로 획득하는 깨달음도 지상의 현실 속에서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게 한정되어진 범위를 넘어 당신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야고 3,17) 천상의 향기를 풍기고, 인간적인 것이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완전히 신적인 것입니다. 천상의 지혜가 내려지는 곳에는 믿음의 순명을 제외하고는 아래로부터의 이성과는 공통된 점이 없습니다.
11. 지혜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무 것도 분산시키거나 첨가시키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에게서 요구하는 수단과 방법 안에서 늘 충실하려고 합니다. 당신을 경배하거나 혹은 묵상하는 이들은 가끔 당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에서 그들은 당신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심 깊은 영혼의 눈을 즐겁게 하여주는 것은 그 자신의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당신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신 것과는 다릅니다.
12. 이렇게 주님의 영은 그분 안에 쉬고 있는 조용하고 겸손한 종을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사야 66,2)을 감싸주시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는 보는 자의 감관을 흐트러놓지 않고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의 일체를 혼돈시키지도 않습니다.
세 위격(person)은 한 분이신 유일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본질로써 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주고받고 즐기는 사랑은 희석되는 일이 없습니다. 일치와 다양성, 이 둘의 어느 쪽도 그들을 엉클어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세 위격 안에서의 일체와 일체 안에서의 세 위격 덕분에 그는(보는 자) 사랑과 이성의 판단으로는 하느님의 불가사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게 됩니다(시 33,9).
뜻밖에도 그의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감미로운 사랑을 느끼며, 그 자신도 감미로워집니다. 진리의 빛을 보고 그 자신도 빛이 됩니다. 가장 높으신 선(善)의 충만함에서 맛본 그는 뜻밖에 성령의 기쁨을 한껏 맛보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나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모든 두려움에서 날 구하셨도다.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자 기쁨에 넘쳐 그들의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