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영적 찬가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참으로 객관적인 기초를 세움으로써 개인의 심리학적 차이점에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데, 이것은 베르나르도가 아가에 대한 자신의 설교 안에서 자주 설명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설교는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일치의 경험에 관련된 주제에만 우리의 토론을 한정시키고자 한다. 우리가 이 주제들을 작가의 제시 순서를 따르면서 다룰 때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한 것으로부터 작품의 연속성과 조화가 떠오를 것이다. 이 주제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토론해온 모든 것을 상기시켜주고 요약해준다.
계속 이어지는 전개를 결정하게 될 중심 아이디어는 작품 초기에 나와 있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찬미한 시이며, 주님들의 주님이요 왕들의 왕이신 분을 노래한다. 이는 또한 성화된 영혼의 갈망을 표현한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입맞춤이라는 상징으로 찬양되며, 영혼 안에 육화하신 말씀의 은총의 현존을 가리킨다. “그분의 살아있고 효과적인 말씀은 입맞춤이다.”라고 베르나르도는 말하면서 이어서 “이는 입술들의 만남이 아님에도 마음의 상태에 따라 때로 속을 수 있는 것으로, 오히려 이것은 기쁨의 주입, 비밀의 계시, 위로부터 오는 빛과 이 빛이 비추이는 마음의 놀랍고도 분리할 수 없는 섞임이다”(2,2). 영혼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고 그분 현존의 효과를 경험한다. 육화를 통해, 중개자인 그리스도는 당신 수난 안에서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온다. 영혼은 하느님 현존으로 채워져, 온전히 인간으로 남으면서, 더 이상 고통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막달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죄인은 자신의 잘못을 포기하고 거룩한 생활을 택하며, “나는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보다 육화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구원을 본다. 육화는 기본적인 그리스도교 신비로, 여기서부터 다른 모든 신비들이 펼쳐진다. 이는 또한 모든 거룩한 준비의 완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신 것은 합당한 일이었지만 이 은총은 우리 시대까지 연기되었다. 마침내 “하느님은 육 안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육을 취하시고, 이를 통해 그들에게 영 안에서도 기쁨을 배우게 하신다”(6,3).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선물은 더 위대한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도는 언제나 역사적 전망 안에 자신을 두었다. 역사의 빛 안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자신이라는 선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다. 육화는 구약으로부터 그리고 종말로부터 그 의미를 끌어내는데, 구약은 이를 계속 연장하고 있다. 구약의 의로운 백성들은 육화를 기다렸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오지 않았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볼 하늘을 고대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입맞춤은 성령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배 혹은 신부에게 입맞춤을 주며, 신부에게 성령을 가득 채워주신다. 그 다음으로 성령은 아들을 통해 신부를 아버지와 일치시킨다. 신비적 일치는 삼위이신 하느님의 위격들 사이에 있고 이분들을 일치시키는 사랑의 관계의 확장이다. 교회이자 영혼인 신부는 이 사랑의 신비가 자신을 채워주기를 희망한다. 이 충만은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서만 일어나며, 성령은 신부가 신비적 지식을 체험하게 해주는데 이 신비적 지식 안에서 사랑이 이해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그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창조물에서 시작하여, 이성적으로 제 1원인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단지 신적 본질만을 말해줄 뿐이지, 거룩한 삼위일체 안에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을 그 원천과 목표로 지니는 신비적 지식은 영혼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이것은 신적 위격들의 사랑에 겨운 지식의 나눔이며, 사도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를 나눔이고, 사도를 통해 교회에게 그리고 모든 성화된 영혼에게 주어진 그리스도를 나눔이다. 베르나르도의 유일한 의도는 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며, 더 정확하게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이를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는 신비적 지식을 가져오고 영혼에게 자신의 선물을 받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경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첫 번째 설교에서 그는 “성령과의 접촉만이 가르쳐주며,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그것을 터득하게 된다.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즐기게 하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경험하는 것만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없으므로,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불타오르게 하라(1,11)”고 썼다. 경험은 영혼의 모든 진보가 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정점이다. 우리가 은총 안에 성장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울 때 사랑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입술 위의 하느님의 입맞춤을 느끼기까지 증대한다. 회심의 초기 단계에, 우리는 주님의 발치에 접근하며, 이후에야 그분의 손에 닿게 되는데, 입술의 입맞춤은 완성을 얻은 이들에게만 유보된 경험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직 드물게만 일어나며,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입맞춤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절대적인 사건이므로 그것의 통일성을 잃게 되면 그 각 요소들은 분리된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도는 이 경험을 분석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묘사할 뿐이다. 그는 기쁜 관상에 대해, 평화와 엑스타시에 대해 말하는 난해한 설명에서 이 경험의 풍요로움을 요약하고자 하였다(4,4). 각 말들의 정의는 의미가 깊으며 다른 말들의 의미를 서로 필요로 한다. 엑스타시, 평화, 관상, 기쁨 이 각 말들은 영혼을 상승케 하는 은총의 효과들의 하나이며, 영혼이 하느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즐기게 해준다. 영혼은 신랑과의 어떤 관계를 느낀다. 회심의 초기에, 영혼은 하느님의 향기를 맡지만 그분에게서 먼 곳에 머문다. 이제 영혼은 그분께 가까워졌고 둘은 만난다.
때때로 -베르나르도는 “드물게”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영혼을 자신에게로 취하시고 그에게 사랑겨운 엑스타시 안에서 기쁨을 주신다. 하느님과의 이 친교는 언제나 짧은 경험이며 영혼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이해로 채워진다.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고착은 취하게 하는 기쁨을 가져오는데 이 기쁨은 정신의 활동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한다.
Expertus potest credere(시험을 당한 자가 믿을 수 있다). 성 베르나르도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이 금언은 그가 즐겨 사용했던 표현을 요약한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지는 거룩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41,3).” “말하는 것이 나의 의무이며 나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말들에 대해 침묵할 수 없다”(57,5). 그리하여 성 베르나르도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영혼을 방문하심을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방문들은 무엇인가?
하느님을 보는 방법은 많이 있다. 하늘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sicuti est,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이다. 지상에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그분을 알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대부분 창조물 안에서이다. 하느님의 일하심은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보여준다. 그분은 때때로 감각과 상상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환시와 목소리를 통해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외적인 현현일 뿐이었다.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이 빛을 주시는 영혼 밖에 머무셨다. 그러나 그분은 때로 갈망으로 정화되고, 사랑에 헌신하여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 영혼 안에 들어가신다. 그리하여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을 안에서 체험한다. 이것이 “방문”으로 알려진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와 갈망이 이 방문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드물게 오시지만 인간은 언제나 그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있어야 한다. 사랑은 끊임없이 대기하고 있다. 갑자기 사랑의 불꽃이 커지며, 예사롭지 않은 열정의 갑작스런 분출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이 감지된다. “달콤함으로 불타 오른다”(57,7). 갈망에서 나온 사랑은 하느님 현존으로부터 나온 사랑에 길을 내준다. 후자는 더 열정적이고 강렬하다. 통상적으로 고요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의 은총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덜 생각하게 하고 말씀을 묵상함에 더 큰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때때로 신랑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며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 아래 빛에서 빛으로 나아간다.
이전에 인간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힘을 지닌 육의 유혹 때문에 의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교정되어야 할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가엾은 처지였다. 이를 위해 하느님은 입맞춤이 아니라 치료약을 주셨다. 그러나 영혼의 의사이신 같은 예수님은 또한 정배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영혼이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온갖 쓰디씀을 몽땅 치워주시고 달콤함으로 채워주신다. 영혼이 치유된 후, 그분은 당신 자신을 영혼에게 온전히 주시고, 무감각과 약함을 넘어 들어 올리시고, 영혼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해주신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은 이것이 자신의 목소리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목소리는 신랑의 말씀이며, verba Verbi, 하느님 말씀의 말씀이다(32,4).
영혼은 하느님 말씀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32,6), 성령의 선물인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는 것이 확실한데, 성 바오로는 이를 “영의 식별”(1고린 12,10)이라고 부른다. 영혼은 시험과 정화를 거친 후에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충분히 식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랑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생각은 우리 자신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인데, 이것들은 정신의 똑같은 힘을 작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천은 다르다. 그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은 악하고 육적인 반면 하느님의 것은 선하고 영적이다.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고,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더 이상 외적 감각을 통해 영혼 안에 활동하시지도 않는다. 이제 하느님은 사랑의 친밀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은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영접되시며, 당신의 사랑겨운 현존으로 이곳을 채우신다. 그분은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고 영혼 안으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마음을 건드리고 자극하시며, 많이 말함 없이 자신의 사랑을 전달하시는데, 그것은 당신이 일하신 결과가 당신의 현존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31,6).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천사들의 섬김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베르나르도는 말한다. 하느님의 집안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천사들도 포함되어있지 않는가? 천사들은 영혼을 하느님께로 데려가거나 신랑을 영혼에로 모셔감을 통해 영혼에게 하느님과의 만남을 가져온다. 천사들은 인간이 관상하게 하고 나서 그 체험을 말하게 도와준다. “방문”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는 천사들의 도움이 포함되며, 하느님의 일하심과 마음과 기억의 정화도 포함된다. 학문은 이 모든 것에서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데 학문은 방문을 얻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현명함과 균형잡힘, sapere ad sobrietatem, 이다(36,2). 설교36에서,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인 지식의 유익과 한계 양쪽 모두를 긍정한다. 그는 베르나르도는 이 설교를 아벨라르와의 논쟁 동안 썼는데, 그의 이해 방식은 베르나르도가 설교한 모든 것과 너무도 판이하게 달랐다. 신비가는 교사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교회 안에서 학문에 대한 그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의심의 여지없이 베르나르도는 교육받지 못한 이들의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이 혁신가를 향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한 그는 인간의 지식에는 아무것도 입은 바 없는 자신의 신비에 관한 이해를 천명한다. 이성적 지식의 한계는 먼저 겸손을 통해 빛을 받으며, 겸손은 참된 자기 인식이자, 하느님의 감미로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만 온다. 이성적 지식이 교회에 합법적이고 유익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비적 체험을 가져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성령에 의해 신비적 체험에로 일깨워져야 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하나된 존재이며 천사들의 주님과 결혼한 영혼에 대해 이야기한다(40,4) 이 행위들은 명백히 영혼의 능력을 넘어선다. 신비적 체험을 위해 영혼은, 홀로 되어야 하며 심지어 지적인 사고로부터도 자유로와야 한다. 모든 것, 심지어 이웃에 대한 관심도 옆에 제쳐두고, 영혼과 그 정배는 홀로 된다. 영혼이 경험하는 기쁨 넘치는 위안은 그 기질에 따라 다양하다. 사막에서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만족하고 하느님을 음미한다. 하느님 현존의 감미로움은 다른 방식으로 각 영혼의 미각을 기쁘게 하며, 하느님은 각자에게 당신의 다른 면을 드러내시고, 다양한 기쁨들을 선사하신다. 영혼의 황홀, 도취, 무아경은 지복직관을 이루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때로 그리스도의 그림자 안에 살고, 믿음의 어둠은 그에게 비젼을 준비케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비 체험은, 하늘에서 보게 될 것에는 비기지 못할지라도, 이미 “비젼”(45,6)이며, 유일무이하고 표현할 길 없는 대화이다. 영혼은 신랑을 더 이상 왕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이로 본다. 그분을 응시하나 보지는 못한다. 그분과 함께 침묵의 대화를 나누지만 말을 하지는 않는다. 영혼은 신랑을 경탄과 감사 안에 맞아들이는데, 그분이 신부에게 이전 보다 더 많이 주실 때 감사와 경탄은 점점 더 강해진다. 이 상호간의 찬미는 영혼 안에 일종의 취함을 낳는다.
하느님의 방문은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그 효과는 남는다. 신비적 일치 동안 각 사람은 욕망에 죽으며 따라서 악을 행하는 경향이 줄어든다. 무아경은 창조적인 힘과 기억 그리고 다른 정신 기능에 유익이 되며, 반면에 낮은 욕구는 더 이상 영혼을 둔하게 하지 못하고 관상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문의 지속되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신랑의 물러남은 영혼에게 큰 고통을 야기시키며, 이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된다. 일생을 통해 배우자와의 일치와 그로부터의 분리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영혼은 그분의 오심의 기쁨과 그분의 가심의 슬픔 양쪽 모두를 알고 있다. 그렇게 큰 달콤함을 맛보았기에 고통은 더욱 크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요한 4,13). 신부는 사랑으로 시들어가고 극심한 고통 속에 있다. 사랑하는 분과의 일치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의 분리가 더욱 고통스럽다. 신랑의 늦어짐은 신부에게 쓰디쓴 고통이며 그분의 부재는 그녀의 갈망과 슬픔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 신랑이 그녀의 조바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서둘러 오겠지만, 그녀는 신랑이 돌아오기까지 갈망으로 소진된다. 방문과 방문 사이에, 신부는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어 내며 심지어 선행의 결실을 모으거나 믿음의 달콤한 향기를 즐김을 통해 어느 정도의 평화조차 발견한다(51,3). 그녀는 거룩한 묵상 동안 천상적인 것들의 축제 안에 기쁨을 맛보며 하느님의 뜻의 비밀을 캐고, 자신의 경건함으로 하늘을 감동시킨다. 영 안에서, 그녀는 낙원의 거처를 통과하며, 거기서 그녀는 사도와 예언자, 승리를 거둔 순교자들, 천사들의 합창대의 무리를 보고 경외심에 사로잡힌다. 단식과 기도 안에서, 그녀는 주님의 친절함을 상기하고,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 때까지 가장 고귀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이 인격적이며 친밀한 방문들은 육화를 통해 인류에게 오시는 말씀의 오심의 확장이다. 영혼과 신랑의 일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의 충만이며 실현이다. “우리는 함께 교회를 이루며 각자는 그 축복에 참여한다.”(57,3) 우리 각자는 전체 교회에 내려진 은총과 유익을 받는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교회는 한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영혼들의 통합체 혹은 일치화합이며”(61,2), 각자는 모두에게 빚을 지고 있다. 각 영혼이 받는 은총은 만약 교회의 필요성이 그렇게 요청한다면 모든 이들을 위한 봉사에 쓰여져야 한다. 다음 구절에서 베르나르도는 관상과 활동 사이에 그가 유지할 수 있었던 놀라운 연속성에 대한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신랑이 친절함과 자비로 영혼을 응시한 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하느님의 뜻에 대해 속삭여준다. 그분의 목소리는 사랑 자체이며, 사랑은 결코 쉼이 없고 오직 마음에게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행하도록 촉구한다. 배우자는 또한 서둘러 일어나 영혼들을 구하는 일에 착수하라는 부르심을 듣는다. 마음은 신적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반면, 때로 하느님을 위해 다른 영혼들을 얻고자 하는 큰 열정으로 가득한데 이것이 참되고 순수한 관상의 본성이다. 마음은 설교하는 일을 위해 관상의 고요함을 기쁘게 포기한다. 일단 그의 갈망이 채워지면 마음은 재빨리 선한 일의 원천인 관상에로 돌아온다. 같은 방식으로 마음이 일단 관상의 기쁨을 새롭게 맛본 후면, 마음은 기쁘게 새로운 일에 헌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사랑이 변화하는 것과 관상과 활동 사이에 변동하는 움직임을 두려워 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도록 어떤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과 유사하다(57,9).
그리하여 신부는 신랑의 방문의 신속함으로 인해 때를 알아채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신랑의 발걸음 소리에 늘 깨어있어 그것을 듣는다. 그녀는 그분이 가까이 있을 때와 멀리 있을 때를 안다. 신랑은 서둘러 올 때조차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보답으로 그분은 그녀를 자비로 대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 겨운 말로 기쁘게 하고 그분의 목소리는 그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57,10).
“돌아와 주셔요, 나의 사랑하는 이여,” 라고 베르나르도는 신랑의 방문 후마다 매번 외친다. 예수님은 영혼이 자신을 꼭 붙잡도록 오신다. 그분은 영혼이 그분을 다시 되부르도록 멀어지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어떤 단계를 밟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즐기도록 자신을 주신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 현존을 더없이 갈망하도록 우리를 떠나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모할지 모르지만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 번 나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분은 종종 내 영혼으로 들어오시며 어떤 때 나는 그 오심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거기 계신다는 것을 감지하며 그 현존을 기억합니다. 다른 때에 나는 그분의 오심을 미리 알아챌 수 있었지만 그 도착이나 떠남의 순간을 식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내 영혼으로 들어오셨는가? 그분은 밖에서 오셨는가 아니면 이미 내 안에 계셨는가? 나는 내 안에 어떤 좋은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훨씬 넘어 들어올려졌습니다… 어떤 광경이나 소리도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지만 마음의 움직임 오직 이것만이 그분이 거기 계심을 내게 말해줍니다.”(64,1-6)
그런 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신비 체험은 분석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 베르나르도 자신의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부와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들의 감동적인 선언을 함에 따라 사랑의 대화는 점차적으로 다급해진다. 신부는 더 이상 침묵 속에 남을 수가 없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강력한 사랑을 담아낼 수가 없어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자신을 소진시키는 열정을 내쏟는다. 그녀의 혀 위의 말은 발설되지 않은 채 남는다. 배우자와 사랑하는 이 사이의 사랑의 대화는 사랑의 분출에 길을 내어준다.
찬가는 사랑의 언어를 뛰어나게 표현해주는 혼인의 노래이다. “이 혼인 노래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당신은 신부가 사랑으로 넘치고 도취되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혼인이라는 주제는 베르나르도의 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되고 새로운 생각들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게 해준다. “내 사랑하는 이는 나의 것, 나는 그분의 것.” 아가서의 이 말들(2,16)은 서로간의 동의, 포옹을 상징한다. 사랑이 용솟음쳐 나온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이성은 이 상호간의 사랑을 가져오거나 표현하는데 무력하다.
영혼과 신랑 사이의 결혼은 하느님의 말씀과 인류 사이의 일치의 연속선상에 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을 보내고, 아들은 교회에 자신의 영을 보낸다. 그리스도를 모방함에 있어 겸손하며 온전한 이탈의 정신으로 그분의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친밀한 일치를 얻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이런 이들의 마음을 꽉 채워주시는 “주입된 사랑”은 겸손에 있어 이들을 성장하게 해준다. 이들이 자신의 죄스러움을 더 많이 깨달을수록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풍성한 친절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물과 자신 사이에 어느 정도의 동등함을 두시기 때문이다. “오, 달콤함과 자비와 하느님 사랑의 힘이여! 모든 것의 통치자께서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셨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는가? 사랑이 이를 이룬다. 자신의 존엄에 대해 무심한 사랑은 자애에 있어 풍요롭고, 결합에 있어 강하며, 설득에 있어 효과적이다. 사랑보다 더 강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랑은 하느님마저 이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부드러운 무엇이 아직 있는가? 그분은 사랑이시다.”(67,4)
그러므로 사랑은 이 메시지의 마지막 말이자 열쇠가 되는 말이며, 이 메시지가 부분적으로 신비로 남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베르나르도는 아가서로부터 취한 시적 이미지로 자신의 교설을 제시하고자 하였는데,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주제가 신비에 싸여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의 이러한 측면은 성 베르나르도에 대한 모든 연구가 그의 메시지를 명백하게 하고자 한다 할지라도 더 큰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이다. 그의 교설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아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 장에서는 교설 자체만을 제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교설의 신학적 풍요로움과 그 표현의 서정성은 예리한 심리학적 통찰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 특징들만이, 왜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신 상태에 관한 묘사를 성 베르나르도의 저작물 안에서 알아보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