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HTHILD VON HACKEBORN
하케보른의 멕틸드
다함없이 샘솟는 찬미
Hans Urs von Balthasar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편역
목차
들어가는 말
삼위일체 송가
사랑의 변용變容 기적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짐
열린 희망
들어가는 말
교회 전통 안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시토회 수도자로서 훌륭한 인품을 갖추었고 위대한 삶을 산 하케보른의 멕틸드같은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녀는 제르투르드 대원장의 여동생이었고, 대 성 제르투르드의 친구였으며 그녀가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었다. 30년 늦게 헬프타 수도원에 입회해서 함께 살았던 경탄할 만한 베긴타 마그데브르크의 멕틸드의 동료수녀로, 당시 숭고한 사람들이 모였던 헬프타 수도원에서 함께 살았다. 그녀는 그녀에게만 유일하게 주어진 위탁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순수함으로 온전히 표현하려고 했다.
16세기만 해도 최초로 주목을 받았던 그녀의 저서 가운데 9개의 출판물이 인기를 얻었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제르트루드의 저서와 나란히 멕틸드의 저서 “특별한 은총”이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져 간 것은 이상한 현상이었다. 솔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 수도자가 그녀에 대해 비판적인 저서를 출간하고 나서 80년이 지나는 동안 멕틸드의 책은 한 권도 출판되지 않았다. 프랑스어로 한 번 출판된 다음, 피상적인 것에 불과한 독일어 번역본이 출간되기는 했으나 역시 사라져 버렸다.
“중세 독일 예수 성심 공경”의 역사에 대한 예수회 신부 카를 리히트스테테르(Carl Richtstaetter)의 단편과 다른 저자 오토 카러(Otto Karrer)가 편집한 “위대한 불꽃”에서 복사하여 작성한 것과 몇몇 짧은 소 자서전이 전부다. 이런 공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간단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독일어로 작성된 독일 신비문학의 저서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 내려오다가 독일어 본문은 사라지고 라틴어로 번역된 것만 전해 내려왔다는 하나의 사실과 영성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1935년 영성생활 9호 참조).
멕틸드에 관한 영성과 신학을 연구하고 묘사하는 것은 이 본문 선집 소책자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이 본문 선집의 목적은 가장 일반적인 윤곽과 주 테마를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소책자는 단지 다함없이 샘솟고 넘치는 순수한 샘이 있음을 가리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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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틸드는 1241년, 할버스타트(Halberstadt) 근교의 하케보른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로더스도르프(Rodersdorf)의 여자 시토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수도원은 만스펠드의 브르크하르드(Burckhards von Mansfeld)에 의해 창립되었고, 1234년 이곳으로 이주했다. 어린 소녀는 강한 열망으로 그 수도원에 머물고 싶어서 어머니께 청했고, 그 청은 받아들여졌다. 그곳에는 이미 친언니 제르트루드가 입회하여 수녀가 되어 있었다. 제르트루드 수녀는 1251년에 할버스타트 수도원의 쿠니군데 원장 뒤를 이어 19세로 원장에 선출되어 41년 동안 수도원을 통치했으며 재임기간인 1258년에 수도원을 헬프타로 이주시켰다.
멕틸드가 너무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수도원 내에서만 양성 받은 여성으로서 세상사에 어둡고 폐쇄적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녀의 저서를 알게 되면 이런 생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저서들은 성숙하고 여성다우며 넓고 깊은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세상의 가치가 무엇인지 완전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들보다 하느님을 우선하는 성숙한 성품과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정화된 투명성과 겸손한 마음을 하느님께 바치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곱 살 된 어린아이를 어떻게 수도원에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멕틸드는 아마 수도원 입회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시기까지 거듭 가족들과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과 그 안에 사는 모든 고통 받는 이들과 그녀를 찾는 이들에게 열려 있었고 그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했다.
베네딕도적 양성의 영향을 받은 멕틸드 안에는 두 가지가 전통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교회에서 바치는 공동전례 안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객관적인 찬미이고, 다른 하나는 독방에서 하는 개인기도과 묵상과 고통이다. 이것들은 그녀에게 언제나 교회에서 드리는 찬미기도를 보완하는 것이었고 가장 깊은 존재의 내면에서 드리는 하느님 찬미의 진리였다. 베네딕도와 이냐시오 사이에서 멕틸드처럼 완전하고 초지일관 하느님 찬미의 위대한 사상을 그리스도교인의 삶의 목표로 이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전례였다. 그렇지만 전혀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성격은 활달했고 자발적이었으며 명랑하고 겸손했다. 자신의 상태나 얼굴에 관해서 소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것들을 이용하여 찬미를 드리도록 명령받은 것들로 이해했다.
친언니인 제르트루드 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교육을 멕틸드는 충분히 받았다. 그녀는 뛰어난 음악적 소질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대의 선창자 역할을 잘 해냈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 직무도 그녀에게 맡겨졌다.
1261년, 멕틸드는 다섯 살 된 어린 소녀 제르트루드를 양육하는 책임을 맡았다. 후에 그 아이는 멕틸드의 보호 아래 위대한 성녀로 양육되었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270년 경,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가 입회하였다. 갖은 환난과 멸시를 받았던 그녀가 이미 58세의 나이로 수도원에 입회한 것이다. 비록 젊은 수녀들의 찬탄을 받기는 했으나 이들에게 그녀가 낯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가 된 두 수녀는 엄청나게 상반되는 극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으나 그것들의 영향은 방해가 되거나 그들을 빗나가게 하지 않았다. 어린 멕틸드는 흔들림 없이 그녀의 길을 갔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신비의 은총이 그녀 안에서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고, 그 깊이도 심화되어 갔다. 그런 신비스런 현상은 늘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바칠 때나 찬미기도를 바칠 때 일어났다. 초자연적인 환시는 가대에서 시간경을 바칠 때와 미사성제를 드릴 때 보았다. 내적 깊은 잠심으로 전례와 성찬을 함께 드릴 때, 가끔 두 팔을 들고 시편을 노래할 때는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여 예언자처럼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내적으로 버텨야 하는 짐이 너무 무거워서 쓰러지는 일도 있었다. 모든 대축일과 축제일은 환시로 이어졌다. 교회력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비와 성사의 심오한 내면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넘쳐흐르는 교회의 신비와 일치의 중심을 보고,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와 육신의 깊은 골짜기 안에 숨겨져 있는 최상의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마음! 물론 멕틸드에게서 이런 신심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적 경청의 울림은 후대의 Paray le Monial(성녀 마리아 마르가리따 알라꼭이 거주했던 수도원 이름인데 의미가 불분명함)과는 많이 다르다. 그녀에게 마음은 육화된 영이며 인간 본성의 초심리적 중심이었다. 그렇게 하느님 말씀의 육화된 중심을 그녀는 즐겨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전례적 성사적 사건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래된 전통이다. 성심께 대한 개인적인 예배는 교회의 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멕틸드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일생을 조각된 것, 접근 가능한 것, 셀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쁨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환시”는 우리의 입맛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그녀 자신의 방법과 기준으로 그린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체험한 것들로써 주님의 상처와 그분 얼굴에서 발산되는 광채, 다양한 그리스도인과 그분의 어머니와 성인들의 성덕에서 얻은 지식과 자신의 고유한 체험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신선한 단순성은 헬프타 수도원의 정신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며, 후대에 수도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영적인 매너리즘과는 전혀 같지 않다.
1909년에 병자인 한 신부가 저작 출판한 멕틸드에 관한 소책자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표현했다. “‘함께 살아온 이 세 성녀들은 ‘마치 낙원으로부터 전해진 거룩한 유물 같다.’, ‘그들에게는 부자연스럽거나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전혀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경쾌하고 매혹적이며 천상적 품위와 순결과 우아함으로 가득하다.’, ‘그녀들의 인품, 그녀들의 삶과 저서들과 죽음은 탁월함과 광채로 가득하고, 우리에게는 별들처럼, 꽃과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가 헬프타에 입회할 즈음 그녀의 저서는 이미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케보른의 멕틸드는 그때까지 자신의 신비 체험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신비스런 체험을 동반하는 지속적인 지병과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50세가 된 멕틸드는 대림절에 지병과 두통이 심하게 악화되어 그녀의 언니 제르트루드 원장이 중병에 걸려 임종을 맞고 있을 때마저도 방문할 수 없었다. 끝내 그녀는 제르트루드 언니가 임종할 때 함께하지 못했다. 멕틸드의 이 지병은 8년간 지속되었다. 성무일도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과 동료 수녀들에게 병간호의 짐이 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그녀는 조금씩 계시에 대해서 두 수녀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녀 제르트루드였다. 두 사람은 이미 7년 전부터 멕틸드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신비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주님 자신이 이 환시에 관한 책에 대해 멕틸드에게 언급하셨다. 물론 그녀는 이 사실을 듣고 놀랐다. 주님께서는 그녀를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셨다. 그녀는 한 번도 그 책을 본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수녀에게 그 책에 대한 묘사를 해 보였다. 그때 비로소 두 수녀는 그녀에게 그 책을 읽어 주었다.
멕틸드는 그 안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 “그녀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보았고, 내용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인해 주었다. 제르트루드가 마지막을 작성하고 편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자신이 저술한 다른 많은 책에서 친구인 멕틸드를 존경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환시에 대해서 기록했을 때도 제르트루드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대원장 제르트루드의 복된 죽음에 관한 말만이 제6권에 묘사되어 있다.) 고통의 순간에는 직관의 지평도 넓어진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는 원천에까지 이른다. 그 원천은 영원한 사랑으로 넘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하느님 자신에게 이른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이 몰아적인 찬양의 이같은 지복에 참여케 하시려고 그들을 그분의 찬미의 샘물로 씻으신다. 이 움직임,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중개해 주시는 이 움직임은 멕틸드의 눈에 명실상부한 것으로 경계가 없다. 그녀는 구원을 통한 예언의 복된 개념에서부터 종말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비를 하나의 큰 희망 안에서 바라보았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리는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놀라운 경계 없는 것들을 증명해 주는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 중세에서 이런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특히 주목할 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전해지는 냉정한 종말론적 신학의 한계와는 달리 그녀의 신비체험은 전통 안에서 중단되지 않았으며, 리지외의 성녀 소화 데레사의 신비체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녀가 지닌 폭넓은 신앙은 스콜라 철학의 추상적인 개념과 그 본질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의 구체적인 믿음의 개념들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희망과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로 향하려는 전 인간의 움직임인 인류와 세상의 구원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텍스트 71을 인용하여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듯이 죽음 후에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너는 희망을 가지고 믿어야 한다.” 또는 대단히 데레사적인 표현처럼??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믿고 희망했던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녀는 인간에게서는 보기 드문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직접 말씀의 거룩한 원천에서 퍼올린 말을 하고 있다. 텍스트 34와 50에서 두려움을 삽질하는 데 비교한 말이나, 텍스트 52에서 고통의 독해라는 표현을 쓴 문장, 텍스트 68에서 엄청난 용단으로 루터의 대담성을 미리 경고하려는 표현 등이 있다.
찬미가의 시작과 끝만 보고는 아직 멕틸드를 전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 중심에는 두 개의 신비, 즉 죄에서 구원받는 신비가 담겨 있다. 하나는 이 복된 이를 추상적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체적 인간으로 체험되어지는 신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 신비체인 그리스도인들 서로간의 신비로써 가장 개인적인 영적 유산을 서로 나눌 수 있는 나눔의 가능성이 있다는 신비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아주 본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흔히 중세에 대해 말할 때 의화의 순수한 신비에 관해서는 거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인간의 공덕이나 협조, 애덕을 통한 의화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멕틸드에게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국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원초적인 체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항상 새로움과 믿기지 않는 놀라움, 샘솟는 열정적인 응답과 포옹, 자신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좌절, 희망조차 없는 퇴보의 체험, 인간적인 헛됨을 들어 올려 승화시킴과 마지막 죄인 한 사람까지도 필요한 것을 퍼 올릴 수 있는 넘치는 충만함 등이다. 멕틸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녀가 자신의 사명의 가장 깊은 내면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넘나드는 단계를 거치는 일 없이 즉각적으로 신비에서 신비에로 들어간다. 성스러움과의 친교의 신비와 함께 구원받고, 구원함과 함께 인간의 공동체 안에 자신의 온 존재를 투사하는 신비에로 들어간다.
물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특히 그녀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대단히 생동감 넘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그녀의 감각은 외부로도 널리 알려져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고 위로받고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수도원 현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거운 짐을 그들과 함께 지려고 했다. 또한 대단히 의도적으로 전체로서의 교회, 전체로서의 인류를 감지했고, 자연마저도 전체로서 느끼고 있었다(텍스트 20 참조).
멕틸드는 이 변함없이 흘러가는 움직임 안에서 끊임없는 은총의 수신자로서 자기가 받은 은총을 끊임없이 내어주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머문다. 은총을 받고, 받은 은총을 나누어 줌으로써 일치를 이루는 것 역시 은총임을 알았다. 그녀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찬미와 피조물 안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런 감미로움 안에서 초자연적인 영적 세계가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적 은총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신비의 감미로움이 주관적인 감정이입으로 인해 모호한 베일에 싸여 있지 않고 전적으로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이 모든 것에는 베네딕도적 분별력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인간적인 어떤 투사로 인한 방해받음 없이 관철되고 있다. 멕틸드의 신비체험과 환시는 전적으로 천상적이며, 완전히 지상적이다. 그녀는 마이스터 엑하르트의 신플라톤적인 날카로운 추상적 문구를 알지 못했다. 전혀 플라톤적 신비주의의 전통 안에 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스페인 신비주의자들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지극히 삼위일체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세교회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가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히 육화 안에 머물렀음을 볼 수 있다. 멕틸드에 관해서 저술한 현대 저술가들은 베르나르도의 텍스트를 그녀의 것과 결부시키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만일 영혼이 관상적 황홀경에 들어갔을 때 번개처럼 빛나는 신적 광채로 인해 영감을 받아 천상적인 것들이 순전히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그림들로 환상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진리와 연관된 것들이다. 그것들은 신비적 그림자와 베일 역할을 해 줌으로써 그 진리를 받아들이기 쉽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적 진보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고 이해시킬 수 있게 해 주는 적합한 수단일 뿐이다.” 이 말은 복음이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과 그를 따른 아우구스티누스가 “번개같이 스쳐가는 순간”에 대해 언급하지만 이 빛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물질적인 그림자에 불과하고, 신체적으로 드러나는 표징들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수단일 뿐이다. 멕틸드는 우리가 하느님께 접근할 때 감각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을 통해서 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감각을 사용하라고 한다. 멕틸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과 더욱더 같아지라고 말한다(텍스트 41-42).
세상을 등진 “정신적인 승화”가 아니라, 창조된 의지로 창조된 것과 친교를 이루는, 완전한 동정의 피앗(Fiat)이 그 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과장되게 ‘정배의 신비’만을 선포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정배관계의 이미지는 성서적으로 볼 때 자녀관계나 우정관계와 같은 이미지와 나란히 있다(텍스트 46). 그녀는 자신의 무력함과 죄를 고백하는 고백성사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고백성사를 위한 성찰서는 항상 그리스도, 주님이셨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삼위일체적 사랑의 신비에까지 이르렀고, 초자연적 사실을 새롭게 증거하게 된 것이다(47-49).
문서작성의 문제점들은 많은 신비가에게서 볼 수 있듯이 멕틸드에게서도 드러난다. 그런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어의 유사성과 이미지들이 제르트루드의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그녀의 것에서도 똑같이 드러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헬프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스타일이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런 겉치레들을 살짝 벗기면 쉽게 경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편집자들은(그 안에는 제르트루드도 포함됨) 이미지를 묘사할 때 한정된 어휘력과 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부드럽고 밝은 색, 금, 블루와 핑크색, 봄의 연두빛과 순수한 흰색, 결함 없는 낙원의 세계 등등. 환시의 진귀함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본 진귀한 물품들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릇들은 항상 금으로 되어 있고, 왕좌와 왕관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의상들은 선택된 진귀한 물품이었다. 보속하는 여인에게 한 번 시범적으로 위협하듯이 보여준, 주님을 채찍질한 그 채찍마저도 금이었다. 이와 비슷한 것들은 분명히 자주 편집자들의 서론과 결론에서 드러나며, 널리 인용된 성서구절도 그러하다. 이런 비유적 표현 -오직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결정적인 원래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멕틸드는 이런 감각적인 표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의상이나 다른 물건의 색상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단지 상징들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편집과 그것에 대한 ‘해석’을 멕틸드 자신도 시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고유한 환시가 자신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나, 동등한 신분으로서 그것들을 존경하올 스승의 영적 세계에 깊이 들어간 그녀 고유의 필치처럼 묘사하여 책 속에 편집해 넣었을 수도 있음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멕틸드는 1299년 11월 19일에 귀천하였다. 그녀는 아주 일찍부터 성녀로 공경 받았으며 또 그렇게 불렸다. 로마 성좌는(그녀의 기념일을 2월 26일에 기념하는데 대해서 그리고 사망일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특별한 은총의 책”은 성녀의 자명한 유산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급속히 전파되었고 성녀 제르트루드의 책보다 한때 더 많이 읽혔다. 우리는 이 “특별한 은총의 책”에서 신비체험으로 알려진 주요한 것을 편집해서 책의 이름을 붙였다. 헬프타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40년 후, 할버스타트(Halberstadt)에서 알베르트 바라운스바이그(Braunschweig)가 불법으로 주교가 된 후 그에 의해서 폐쇄되었다. 그 후 1348년, 뉴-헬프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수도원이 세워졌다. 멕틸드의 무덤은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