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내적 투쟁
성 베르나르도의 종교적 체험은 거의 전면적으로 우리가 통상적으로 신비체험이라 부르는 것, 즉 약간의 그리스도인만이 기도의 절정의 상태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즐길 수 있는 드문 경우에 의해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의 작품 안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언급이 때로 그러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는 인간의 의식, 자신의 비참함에까지 이르며 하느님과 자신과의 거리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하느님께로의 부르심을 일깨우고 하느님의 응답을 식별하도록 개인을 준비시키며 그분의 “방문”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이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선행되는 “수행적” 경험 없이 어떤 신비적 체험도 없다. 베르나르도의 모든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로 이 경험적 질을 지니는데, 어떤 예를 통해 이 상태를 설명하고자 한다.
베르나르도의 전체 교의의 출발 지점은 강렬하고 개인적인 내적 투쟁의 경험이다. 그의 신학 전체는 오직 복음과 성 바오로의 빛 안에서의 이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고찰이다. 그는 매일 이에 대해 고찰하였고, 그리하여 이는 또한 모든 인간의 경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느님 뜻에 대한 흔들림 없는 고착을 통해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완전한 영적 자유를 인간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자유를 다시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여기서부터 그분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 안에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질문에는 언제나 두 가지 면이 있다. 즉 겸손이 생겨나게 하는 깊은 현실주의 그리고 용기와 낙관주의를 일으켜주는 확고한 희망이다. 이들은 대 성 그레고리오와 수도승 전통에 의해 통회로 묘사되어온 두 가지 전통적인 측면이다. 에티엔느 질송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이 근본적으로 회개의 형이상학이라고 썼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 자신의 회개에 대한 종교적 체험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 베르나르도의 교의가 전통이 묘사하며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었던 대로(그와 가까웠으며 그들의 이름으로 또 그들을 위해 그가 글을 쓰고 말을 하였던 많은 위대한 수도승들) 수도승 경험에 의해 양육된 회개의 신학이라는 사실은 논의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그의 작품을 통틀어 산재해있는 수많은 참조들 안에 분명히 드러난다.
현실적으로 때로 감동적으로, 가끔은 과장된 용어로, 베르나르도는 인간 조건의 한계, 오늘날 철학자들이 인간의 유한성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선언하다. 경우에 따라 그는 오늘날 철학자들에 따라 실존을 특징짓는 근심, 고독, 실패, 불합리성, 모든 것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이성, 실망에로의 경향, 죽음에 직면할 때의 고뇌와 같은 정신의 상태에 다소 주의를 기울인다. 베르나르도가 이 지점에 머문다 하더라도 그는 고대의 회의적 도덕론자들이나 후대의 설교가들이 말한 것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았다. 내적 투쟁에 대한 그의 묘사는 인간의 필요성에 대한 치료제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고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봉사한다. 성서와의 관련 안에서 그가 말하는 “비참 misery”은 “자비 mercy"를 부르는데, 이것 역시 성서에 기원을 둔 말장난을 사용한 것이다 (주 ;라틴어에서 자비는 misericordia, 비참은 miseria이다). 죄인인 사람과 대조적으로 하느님이 계신데 하느님은 온전히 거룩하고, 그분의 힘은 그분의 사랑만큼 크며, 인간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고 주시러 오실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것을 행하셨다. 성서적 개념과 비유를 사용하면서 베르나르도는 약함을 은총을 위한 능력으로 변모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을 묘사한다. 이 은총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으며 주님과의 만남과 궁극적 일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약함”과 “유혹”은 처음에는 사실로 체험된다. 다음으로 이것들은 “사고”와 “묵상”, “자기인식” 그리고 나서 “식별”의 대상이 된다. “양심”은 회개와 하느님께로 돌아감의 기회로써 이것들의 긍정적 가치와 의미를 파악한다. 인간 마음이라는 전쟁터와 그곳에서 얻고자 하는 승리는 사순절과 시편 90에 대한 설교 주제를 제공한다. 후자는 유혹의 시기의 시편으로 예수는 자신이 사막에서 유혹을 받을 때 이를 인용하였다. 시편 특히 oculis tuis considerabis(그대의 눈으로 고찰하라)라는 말은 관상적 지식의 발전을 위해 알맞은 것으로, 이것은 가능한 명백하고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자기평가에 대한 내적 통찰력이다. 이것은 믿음의 통찰이기 때문에, 바뀌고 변모되었으며 은총의 일하심을 통해 이미 영광의 길 위에 있는 내면의 우리의 참된 자아를 본다. 관상적 지식은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 지식 즉 한편으로 자기진실과 자기평가, 다른 편으로 하느님의 친절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자신의 조건에 대한 한계를 알면서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심오한 낙관주의를 설명해준다. 베르나르도는 인간의 내적 모순을 묘사한다. 즉 우리 안의 그렇게도 수많은 조화롭지 못한 요소들의 어려움과 은총이 이미 그것들에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경탄에 대한 진짜 이유이다. 그는 우리가 비참으로부터 영광에로 여행하는 그 길을 언급하며 이것을 통해 숙고에 대하여 마지막 네 권들에서 어떤 지시들을 준다. 인간 안에 그렇게 많은 모순되는 요소들 사이에 조화가 가능하다는 그의 선언은 온세상을 통틀어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에 대한 크나큰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베르나르도는 이 태도를 특히 관상가들에게로 돌린다.
Hi vero qui cum Maria soli Deo vacant, considerantes quid sit Deus in mundo, quid in bominibus, quid in angelis, quid in seipso, quid in reprobis, contemplantur quia Deus est mundi rector et gubernator, boninum liberator et adiutor, angelorum sapor et decor, in seipso principium et fines, reproborum terror et horror. In creaturis mirabilis, in hominibus amabilis, in angelis desiderabilis, in seipso incomprehensibilis, in reprobis intolerabilis.
〔마리아와 함께 오직 하느님께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인간 안에서, 천사 안에서, 자신 안에서 그리고 유죄선고 받은 이들 안에서 하느님께만 머문다. 그들은 세상의 통치자와 주님으로서, 인간의 해방자와 도움을 주는 이로서, 천사들의 기쁨과 환희로서, 자신 안에서 시작과 끝으로서, 악을 행하는 이들의 두려움과 공포로서의 하느님이라는 현실에 머문다.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 안에서 놀라우시며, 인간 안에서 사랑스러우시고, 천사 안에서 아름다우시고, 자신 안에서 모든 이해를 넘으시고 사악한 이들 안에서 애태우신다.〕
베르나르도의 모든 가르침은 바오로적 감각 안에서 “육”으로부터 “영”으로 그리고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모든 피조물에 대한 개방으로 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음에도 은총을 통해 자신을 넘어섬으로써, 본능적인 자아를 초월함으로써 생겨나는 결과이다. 그 가장 드높은 형태로 이 넘어섬은 excessus(초월) 혹은 자아에서 나옴 즉 엑스타시가 된다. 그러나 이 예외적인 경우들, 드물고 아주 짧은 순간들은 별도로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한 헌신으로 지키도록 부여된 의무들을 수행하는 수도승은 매일 자신을 초월하도록, 이미 자신 안에 있고 활동하는 은총의 차원에로 자신을 들어올리도록 애써야 한다. 그는 수행적 실천을 통해 이를 시도한다. 즉 성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관상함으로써 그리고 기도와 모든 형태의 금욕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참된 차원 즉 영적생활의 차원 혹은 성령의 차원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다시 발견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는 또한 타인의 참된 자아와 하느님의 것 또한 발견한다. 이 세 가지 발견은 애덕의 세 가지 정도를 구성한다.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상의 회복에 대한 베르나르도의 전체 신학이 수도승적 교의라는 사실은 언제나 충분히 인지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이론으로서 뛰어난 정밀함을 지닌 은총과 자유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그 교의는 또한 수행의 실천을 포함하며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에게 필요한 구체적 수단을 매일 사용할 것을 포함한다. “신학”에 대한 성 베르나르도의 작품들은 그가 수도승들이 자신의 이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적은 서간이나 설교 텍스트들과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변호와 규칙과 관면’ 뿐만 아니라 순종에 관한 다른 작품들과 같은 책들은 좀 더 교의적 특징을 지닌 작품에 필요한 보완을 제공한다. 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히 후자에 오래 머물게 된다.
인간의 목적은 진리를 깨닫는 것인데, 진리란 하느님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그는 자신의 하느님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관계에 대한 방해물은 교만이며 그 치료제는 겸손이다.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다. 그 결과는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에 부여하고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재발견하는 평가이다. 반면에 자기 무지와 교만은 인간의 가치와 겸손을 약화시키는데, 겸손은 인간의 약함과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용량을 알게 해주며 인간을 자신에게 드러내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와 올라가게 된다. 그는 성장하여 하느님과 이웃 양쪽을 위한 사랑의 새로운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베르나르도는 sese excedere와 extendere(자기초월과 확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겸손한 사람은 온화하며 자비롭게 된다(miser, mitis, misericors).
그리하여 믿음과 수행 혹은 좀 더 정확하게 겸손 안에서 변모된 믿음과 애덕은 참된 자아가, 현대적 표현으로서의 에고로부터 나오게 한다. 믿음과 수행은 에고에게 참된 자아가 즐기는 자유를 일깨워주며 하느님 눈길 안에 인간이 그렇게 되게 한다. 하느님은 친교와 우정을 통해 이것을 기뻐하신다.
베르나르도는 언제나 이 영광의 메시지를 실어 나르지만 또한 겸손의 메시지를 통해 이를 완화한다. 이것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고려하며, 동시에 인간 안에 이미 있는 영광에 완전한 확신을 드러내주고, 그것의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을 단순하게 기다리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교의이다. 문학적 표현은 믿음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숨겨진 빛을 얼마간 드러내준다. 성 베르나르도와 다른 위대한 영적 작가들에게 있어서 경험의 강렬함이 강한 특성과 열정적인 연설을 설명해줄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작품에 있어서 과장법의 정도를 설명해준다. 그가 인간의 악함의 깊이에 대해 말을 하든 아니면 하느님 말씀의 방문 동안 그가 도달했던 높이에 대해 말을 하든 베르나르도는 때때로 합리적인 한계를 넘어, 최소한 통상적이며 관습적인 것을 넘어 너무 멀리 가는 듯 하다. 실제로 그는 단순히 우리 모두에게 참된 것을 자신 안에서 밝히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생각들을 나타내주는 것인데 그의 사고는 관상적이며 동시에 다른 이들의 웰빙에 관심이 있다. 그의 각 작품들은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베르나르도는 각각 안에서 보편적인 적용을 이루어낸다.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는 타인에게 그들 자신을 비추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