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그가 쓴 작품 안에 반영된 그의 삶
한 개인의 삶에 있어 통상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인 베르나르도의 어린 시절에 관한 역사적 정보를 우리는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 저명한 신학자 셍 티에리의 윌리엄이 쓴 전기적 보고서가 있는데, 그는 베르나르도가 클레르보의 아빠스가 된 후 그를 알게 되었다. 윌리엄은 베르나르도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쓸 임무를 맡았는데,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베르나르도가 살고 있는 클레르보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살았으며 베르나르도에게 알리지 않고 이를 썼다. 그는 베르나르도와 상의를 하거나, 클레르보의 수도자였던 그의 몇몇 형제들에게도 묻지 않다고 한다. 윌리엄의 베르나르도의 첫 생애의 1장은 신학적 걸작이기는 하나 객관적 전기의 모범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원전, 기원후 혹은 수도승에 관계없이 전통적 전기의 표준 테마를 적용하였다. 즉 꿈, 천상적 비젼, 그리고 정결에 거스르는 유혹에 대한 승리이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문제를 베르나르도에게 투사하였다. 베르나르도가 가장 유명한 멤버인 새롭게 창립된 시토회라는 현상에 대해 그는 신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클레르보 수도원을 수도승 생활의 모델로 보여주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이상화하면서 이 작업을 완수하였다.
1090년 베르나르도가 태어났던 그의 가족에 관해 우리는 얼마간의 정보를 알고있다. 그의 가족은 부르군디의 하급 귀족에 속했으며, 아버지는 기사였고, 형제들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부모에 의해 디죵 근처 셍 보를르(St.Vorles)의 참사회가 운영하는 작은 학교로 보내졌다. 우리는 그의 동급생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최소한 그들 중 몇 명은 우수했으며 베르나르도는 확연히 드러나는 사색가요 잘 훈련된 라틴어학자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보를르나 다른 유사한 학교에서 공부했을 터이나, 그들 중 다른 베르나르도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써 그의 독특함은 학교 수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참으로 걸출한 자연적 은사와 그가 받은 예외적 은총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가 상당부분 그 원천을 알고 있는 셍 보를르나 다른 곳에서 따르고 있던 교수방식은 지극히 재능이 많은 한 아이를 유명한 문장가로 변모케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자신의 십대에 관해 몇 가지 베일에 싸인 언급만을 했을 뿐이다. 공부를 마친 뒤 아마도 퐁텐 레 디죵에 있는 가족의 영지로 돌아갔을 것이며 이곳은 지금도 12세기와 그 생활 방식을 연상케 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이 있다. 그곳에는 베르나르도의 형제들과 같은 많은 젊은 귀족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사냥을 하거나 무술시합 혹은 그와 유사한 폭력적 오락 외에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또한 성주들 사이의 잦은 전투에 참여하였다.
베르나르도는 많은 이들이 참여하였던 문학적 시합에 대해 언급하였다. 궁정에서 높고 낮은 귀족들이 밤을 지새우는 동안 사람들은 음유시인들이 해주는 이야기나 지어낸 이야기 그리고 내용이 풍요롭지 않은 노래 등을 즐겨들었다. 때로 그들 스스로 음유시인 풍으로 지은 글은 그들을 능가하였다. 베르나르도 역시 이를 행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우리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는 어느 시대이든 젊은이들에게 많은 다양한 유혹들을 나누었음에 틀림없다. 이 나눔은 그의 모든 경험의 특징을 이루는 특별한 강렬함을 동반하는데, 나중에 그는 놀랄 만큼 현실적으로 유혹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시편 90에 대한 그의 다섯 번째 설교이다. 그가 어른으로서 인간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했을 때 강박증에 대한 특별한 표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호전적 기질은 명백히 드러난다. 이것은 은총을 통해 변모될 수 있었던 하느님의 은사이자 자연적 에너지의 표지이다. 자신의 인격의 이러한 면을 의식하면서 그는 그것은 통제되어야 할 것이지, 억압해서는 안 될 중요한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호전적 기질을 다스리는데 온전히 성공했다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으며, 역사가들 또한 이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는 상당한 대가를 치르며, 다른 이들을 그에게 끌어당기는 유쾌한 성향을 낳는 심리적 평형을 얻은 듯하다.
1111년 그의 나이 21살에 그는 시토회의 첫 수도원이자, 첫 번째 불꽃인 시토수도원 수도자가 되기로 결정하는데 이곳은 그가 태어난 샤또에서 몇 마일밖에 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큰 열정은 자신의 이상을 자신을 위해서만 간직하지 않고 삼촌, 형제들, 젊은 귀족 그룹을 같은 성소로 불러 모은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움베리나를 남편을 떠나도록 설득한다. 1112년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시토에 입회한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그룹에 대한 그의 리더십은 그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지녔던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의 한 예이다. 이러한 은사는 쉽게 문제를 지닐 수 있으며 남용될 수 있다. 그는 결코 가장 연장자가 아니었으나 모든 이들 위에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그들의 아빠스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종교적 확신의 깊이를 다른 이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1115년 시토에 입회한 지 겨우 3년이 되었을 때 베르나르도는 샹파뉴에 있는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보내지는데, 자신의 형제들과 동료들 그리고 매료된 다른 젊은이들도 이끌어 간다. 그는 곧 다른 창립을 하는 입장이 되며 1118년, 1119년, 1121년 그리고 그 후 거의 매년마다 창립을 한다. 35년 동안 68개의 창립을 하는 수도회의 중요한 추진자였는데 그가 죽을 무렵 수도회는 350여 군데의 수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164 군데가 적든 크든 직접적으로 그의 권위의 책임 하에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남부 포르투갈까지, 북부 영국에서 중앙 유럽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이들은 확장되어갔다. 모원과 함께 시작된 각 수도원에서 영적 동기가 확고히 되어야 했다. 베르나르도 죽음 이전 클레르보 공동체의 수도승은 800-900 정도로 추정된다. 그들 중 일부는 다른 창립을 하기 위해 자원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사회를 떠나 금역 생활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수천을 헤아렸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군인의 경력을 지녔다. 이 숫자에, 베르나르도의 생애 동안 창립된 시토회 다른 수도원들 290 군데로부터 다른 멤버들이 추가된다면, 베르나르도가 설립을 도운 수천 명을 헤아리는 거대한 평화의 군단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 그의 세기나 다른 세기에 어떤 평화의 건축가가 이러한 역할을 하였던가?
처음에 베르나르도는 단지 자신의 수도자들만을 가르쳤으나 1124년 이전에 그의 수도원의 부원장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그에게 겸손에 대한 이론을 글로 쓰기를 청한다. 그리하여 그는 베르나르도의 첫 번째 저작물을 얻게 되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걸작이기도 하다. 즉 겸손과 교만의 단계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도의 메시지는 클레르보의 한계를 넘는 것이었고, 사실상 그는 여러 방향으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카르투시오 수도승들의 요청으로 사랑에 관한 서간을 쓴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담겨있으며 12세기의 수도원적 사랑에 대한 첫 번째이자 가장 상세한 설명이다. 그의 서간들을 모아서 11개의 텍스트가 되었으며, 그 후 연이어 쓴 “하느님을 사랑함에 대하여”라는 소책자의 끝부분에서 다시 실을 만큼 이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병의 회복 기간을 이용하여 복음의 성모영보에 대한 3개의 긴 강론 “동정녀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썼다. 그는 서문에서, 쓰기를 강요받고 있다고 피력하며 그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둘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하느님과의 관상적 고독을 즐길수록 그가 받은 내적 빛에 대하여 다른 이들과 더 많이 나눌 책임이 있음을 느꼈다.
문학적 활동의 첫 시기 동안, 그는 셍 티에리의 윌리엄에게 “변명”을 써서 보냈는데, 그는 이것을 베네딕도회 아빠스에게 헌정하였다. 윌리엄은 몇 명의 시토회원과 클루니 수도승들이 연루된 논쟁에 베르나르도가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다. 시토회원들은 베네딕도 수도자들을 열정이 부족하다고 비난했으며, 클루니 수도자들은 새 수도회가 전통을 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논쟁은 달아올랐다. 베르나르도가 논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며 그는 단지 요청을 받았기에 개입한 것이었고, 중개자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갈등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활발하게 글을 썼으며, 변명의 두 번째 부분에서 클루니에 대한 풍자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이런 종류의 글들의 모델이 되었을 정도이다. 그는 클루니에서 있음직한 남용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를 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문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확신과 목적을 달성했다는 따뜻한 기분으로 자신을 표현하였다. 클루니의 아빠스, 복자 베드로는 “변명” 안에서 수정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 방어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교훈들로부터 유익을 얻었으며, 클레르보의 아빠스에 의해 제안된 선을 따르는 개혁을 법에 의거하여 옳은 것으로 인정하였다. 가장 전통적인 수도승들이 그의 과장을 허용하면서 그 작가를 자신들의 도서관에 허용한 것은 필사본 전통으로부터인 듯하다. 베르나르도는 자신들의 새로운 규칙준수를 뽐냈던 시토회원들을 낮추기 위해 자신의 소책자의 첫 부분을 할애함으로써 자신이 공정하다는 증거를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이 테마에 대해 계속 써나가며 그는 교회의 풍요로움에 공헌하며 교회 일치에 완벽하게 조화되는 합법적 다양성에 관해 쓴 가장 멋진 몇 페이지를 구성하였다.
이 시점부터 베르나르도는 더 이상 수도승적 범위 내의 교사만이 아니었으며 교회생활의 다른 영역과 사목적 배려에 전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가르침을 확장하기를 요청받았다. 1127년 혹은 1128년에 셍스의 대주교 헨리 르 상글리에는 베르나르도에게 강의를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주교들의 품행과 의무”가 된다. 이는 사실 어려움을 제공하는 만만찮은 일이었다. 베르나르도에게 제시된 이러한 영역에로의 요청은 사실 비난받을 만한 남용이었다. 더 나아가 그러한 글을 쓰는 것은 클레르보가 소속되어 있던 랑그르 교구가 속하는 교회 내 구역의 고위 성직자인 대주교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상태에 그를 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고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발언하였다.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덕과 거룩함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메시지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부분이었으며 이는 잘 받아들여졌고 가장 많이 필사된 것들 중의 하나이다.
트로아 공의회(1128)는 수도승 영역 밖에서 베르나르도의 주의를 받은 첫 공식 교회 업무였다. 이 공의회는 성전기사단에 관한 첫 법규를 제정하였는데 이 새로운 수도 단체는 베르나르도의 사촌인 페인의 휴(Hugh of Payns)에 의해 예루살렘에 설립된 것이었다. 베르나르도는 이 사촌의 요청으로 1128년에서 1136년 사이에 “새로운 시민군을 찬양하는 책”을 썼다. 제3회원과 유사하며 참사회에 부속되었던 이 새로운 수도공동체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점이 제시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거룩한 땅에서 순례자와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하며 때에 따라 싸움을 하고 그들의 적들을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이들의 역할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시대보다 이들의 시대에 더 유효했던 논쟁을 이용하면서 베르나르도는 모든 것은 자신들의 동기에 달렸다는 것을 설득시키고자 애썼다. 그는 또한 기사들 역시 싸움의 희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죽음은 우리의 마음과 의도를 심판하게 될 하느님과의 위대한 만남이다. 만약 기사들이 증오 때문이 아니라 폭력은 최소화 하면서 정당한 이유를 방어하기 위해서만 자신들의 무기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전 기사단에게 준 자신의 권고에서 베르나르도는 그가 다른 곳에서 다루었던 주제 즉 공허하고, 폭력적이며, 세속적인 기사들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좀 더 폭넓게 다룬다. 그는 악에 대한 비난이나 세속의 기사를 수도승 기사들의 반대편에 두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가 영적인 성채로 비유하기를 좋아했던 그의 수도원들은 그가 “평화의 전사들”이라 불렀던 무수한 군대들을 훈련하는 장이 되었다.
성전 기사단의 두 번째 문제가 그를 다시 곤경에 빠트렸다. 즉 그들이 거리에서 싸움을 수행하기보다 성전에서 기도의 봉사를 하는 참사회와 같이 관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룩한 땅에서 그들의 군사적 봉사를 수행하기 때문에, 성 베르나르도는 그들에게 그곳에서 열려진 신비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그 땅으로부터 최소한 어떤 유익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충고를 따르는 그들을 돕기 위해 베르나르도는 예루살렘 성전, 베들레헴, 나자렛, 갈바리아에서 일어나 인간 구원에 관련된 위대한 모든 사건들에 대한 뛰어난 묵상 시리즈를 저술하였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 모든 장소와 아버지께서 그를 영광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희생을 받아들였음을 드러내는 부활의 장소인 거룩한 무덤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첫 군사 수도회의 내적 위기는 성 베르나르도에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관상에로 데려가는 기회가 되었다.
공의회 바로 직후, 로마 교회 내에 분파가 생겨났다. 합법적인 교황 인노센트 2세는 자신이 라이벌 아날렉투스와 맞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왕자들이 교황권 분열파의 편을 들었고, 1130년 에땅(Etampes)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의 여론의 무게를 교황 인노센트 주위로 다시 모이게 하였다. 8년 동안 그는 여러 방식으로 일치를 재건설하는데 관여하였다. 그는 1130년과 1131년 프랑스를 통과하는 교황의 여행을 동반하였다. 1132년 프랑스 남부에서 일어난 교황 소송 사건을 방어하였다. 그 다음 해 교황은 피난처인 피사에서 베르나르도를 소환하였고, 제노바, 밀라노 그리고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교황 편에서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1135년 뱀버그 정식회의와 피사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북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교회 일치를 얻기 위해 일하였다. 베르나르도는 클레르보로 돌아왔으나 1137년 다시 교황과 추기경들에 의해 로마로 불려갔다. 다시 분파를 종식시키기 위해 진력하였으며, 그 다음 해에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그는 셍 티에리의 윌리엄에게 헌정한 길고 절묘한 작품을 썼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의 책 제목 중 하나를 빌려와 “은총과 자유의지에 대해”라고 불렀다. 흥미를 끄는 서문이 베르나르도가 어떻게 글 쓸 기회를 잡아채는지 정보를 제공하며 또한 그의 가르침의 주요한 원천 즉 그의 경험을 드러내준다. 같은 기간 동안 도시 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믿는 이들의 그리스도교 생활과 사제들의 사목적 책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관해 활기찬 토론을 하였다. 가장 머리가 좋은 수도승들이나 아빠스들은 이제 더 이상 침묵 안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그들의 모임 안에서 행정적 문제를 푸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도는 이러한 그룹 모임 중 하나를 자세히 이야기한다. 어느 날 그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그 안에 성취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찬미를 하였다. “한편으로 은총이 내 손이 닿는 범위 내에 선함을 두었음을 깨달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진보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총이 내가 더욱 진보하도록 나를 도와주기를 희망합니다.” 베르나르도와 가까운 누군가가 그에게 일련의 질문들을 했을 때 그는 이를 인용하고, 대답하면서 그의 해설의 출발점으로 이 질문들을 이용한다. 첫 시작에 그는 신약성서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후 자주 이 성서 즉 로마서간을 인용한다. 특히 그는 5장에서 8장에 관심이 많은데 여기서 성 바오로는 죄를 향한 경향과 성령의 생명 사이에서 그가 경험한 갈등을 묘사하고 분석하며 해답을 제시한다. 몇 세기 후 이것은 마르틴 루터의 교의의 기원에 있어 결정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베르나르도의 소책자의 마지막 문장은 로마서 8장30절에 대한 주석이다. 자기 시대의 양식으로, 이 기본적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다시 쓰는 것이 베르나르도의 희망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 경험을 해석하는데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1135년 로마 교회 분파에 대한 해결책을 찾도록 부탁받았을 때 베르나르도는 카르투시안 친구 포르트의 베르나르도의 방문을 받고 아가에 대한 주석서 쓰기를 떠맡게 된다. 성서적 시의 유일한 목적은 젊은 두 배우자를 일치시키는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며,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느님의 계약, 신약에 와서는 교회와 하느님의 계약의 상징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와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된다. 포르트의 베르나르도가, 클레르보의 아빠스가 폭넓은 문학적 작업을 떠맡을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시토회원으로서의 재능의 전 영역을 망라하고, 개인 경험 즉 그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봉사 안에서 보낸 20년의 작업 과정 안에서 그가 얻은 자신의 내적 경험과 교회 업무의 풍부함을 포함하는 걸작을 마음에 그렸을 것이다. 처음에 베르나르도는 망설였지만 이 작업을 하기로 동의한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열려 있었으므로 텍스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각 절에 대한 문자적 설명에만 한정시킬 수는 없었다. 대신에 그는 성서적 시를 영적생활, 믿음의 신비, 교회의 사명에 관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단서로 사용하였다. 1136년 말 분파 때문에 세 번째로 로마로 불림을 받았을 때 이 작업이 중단되었다.
1138년 여름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그는 작업을 재개하였으며 24설교의 새로운 원고를 쓰면서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최근 여행의 중요성을 설명했던 개정된 설교집의 서문을 썼다. 그는 어떤 일에도 산만해지거나 압도당하지 않았으며 외부적인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을 잘 다루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중단했던 절에서 쉽게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죽음이 설교의 완성을 방해하기까지 18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하였다. 남은 여생 동안 그의 위대한 걸작은 사람들 중 가장 바빴던 사람의 일차적인 임무가 되었다. 아가에 대한 86개의 설교는 시의 텍스트에 대해서라기보다 자신의 경험에 더 많은 것을 기초하고 있다. 사실상 그는 아가서 8장 중 2장의 첫 절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이슈 즉 자신의 형제 제랄드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반응, 성직자 개혁에 대한 그의 견해, 라인란드 이단자, 포레의 길버트, 포이티에의 주교의 잘못에 대한 자신의 반박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지엽적인 문제로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전체를 통과하는 줄거리는 사랑의 관계이며 이는 하느님의 세 위격을 교회에 일치시키며,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그 멤버들을 이 세 위격과 일치시킨다. 그가 자신과 교회에 관한 사실들을 분석하는 것은 이 사랑의 관계의 빛 안에서이다.
여러 사건에 관련된 성공 때문에 베르나르도는 공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교의, 정치, 수도승 생활의 여러 갈등에 점차적으로 더 많이 붙잡히게 되었다. 1140년 파리를 지나가는 동안 그는 학생 성직자들에게, 이들 중 어떤 이들이 빠져있는 악덕에 끝을 고하라고 설교하였다. 그가 한 호소의 텍스트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그 놀라운 효과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수도승 생활로 방향을 바꾸어 클레르보로 베르나르도를 따라갔다. 피터 아벨라르의 제자였던 오세르의 지오프리가 그 명백한 예이다. 그는 베르나르도의 비서가 되었고 나중에 그의 전기 작가, 후계자 그리고 아가에 대한 그의 설교를 이어받아 쓰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나르도는 ‘성직자들의 회개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설교와 합치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파리 강의의 요지였을 것이다. 이 안에서 마음의 숨은 구석에서 자신들의 길을 좀먹는 이기심의 모든 형태에 대해 가장 예리한 심리학적 분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기심으로부터 돌아서서 진복팔단을 따라 사는 이들의 기쁨을 묘사한다.
1140년이라는 해는 베르나르도의 통상적 활동 안에서 첫 번째이자 짧은 일탈이라는 특색이 있는 해였다. 그전까지 그는 교의적 논쟁의 개입을 삼가왔으나 셍 티에리의 윌리엄의 강한 주장에 양보하게 된다. 클레르보의 자원 중 하나인 시니의 아빠스가 된 윌리엄은 베르나르도에게 교사 아벨라르의 가르침을 반박하도록 촉구하는데, 아벨라르는 그의 동시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위험하다고 간주되었다. 베르나르도는 주저하였으며 그 요구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에게 죄가 있음을 드러내는 잘못들을 요약하는 사건기록 문서 전체와 사고들의 모음 그리고 항변을 위한 교회 교부들의 구절들을 보냈다. 그가 교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납득케 되었으며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불같은 열정을 다해 이 논쟁에 뛰어든다. 양 쪽 편에서 논쟁은 격렬하였다. 베르나르도와 아벨라르 사이에 구약의 묵시록적 언어들을 빌린 공적 저주가 오갔으며, 자신의 입장의 진실을 다른 편에게 납득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베르나르도는 1140년 상스에서 주교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여기에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도가 희망했던 대로 아벨라르의 사고는 토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베르나르도는 교황청의 영향력 있는 멤버들에게 편지 형태로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셍 티에리의 윌리엄으로부터 받은 문서 자료의 도움을 입어 그는 교황에게 거의 소책자에 가까운 긴 서간을 썼다. 이것은 그의 서간 모음집 119번째이며 제목은 “아벨라르의 잘못을 거슬러”로 붙였다. 파리 학교의 뛰어난 스승은 삼위일체, 구원, 은총의 교의에 관해 대담하고 새로운 통찰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뒷 세대 학자들에 의해 새로 진술되고 해명되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윌리엄과 베르나르도 그리고 다른 이들은 아벨라르의 사고가 그리스도교 믿음에 위협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 서간은 베르나르도가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공포하는 기회로 사용되었다. 이 서간의 마지막 장은 예수의 신비에 대한 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을 포함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의 어떤 점의 해석에 관해 자신들의 아빠스와 다투고 있던 두 베네딕도 수도자의 요청으로 베르나르도는 1143년보다 조금 앞서 “계명과 그 적용에 대해”라는 아주 멋진 작품을 썼다. 이것은 수도규칙과 그것의 적용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힘 사이에 미묘한 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해명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장상들의 권위에 어떤 한계를 두는 반면, 애덕과 그것을 촉구하는 순종에는 어떤 한계도 두지 않았다. 1145년 베르나르도는 대중 설교가 브루이의 피터와 그의 제자 헨리의 잘못에 반대하기 위해 남부 프랑스를 여행하였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와 국가의 기초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었다. 베르나르도의 두 번째 일탈 기간은 1146년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의 생애 말기에 왔으면 단지 2년 동안만 지속되었다. 거룩한 땅에서 그리스도교 권리를 구하려는 십자군 발대에 있어, 첫 시토회 교황이었던 에우제니오 3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그가 했던 역할이 그에게 이러한 짐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교황과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프랑스 십자군을 소집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위해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 동의를 확보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귀족이든 농부든 군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열정을 각성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거룩한 캠페인이라는 사고를 심어줄 충분한 도덕적 권위를 지닌 이는 베르나르도 단 한 명뿐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거룩한 대의를 위해 징집하고자 하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1146년 베즐레이에서 왕의 사신이 십자군 출발을 소집하는 교황 문서를 읽을 때 출석하였다. 그러나 베르나르도의 비젼은 또 하나의 성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의 수도승적 이상주의 - 정치나 군사행동에 대한 지식은 확실히 아니다 - 는 그를 동양과 서양의 그리스도교 지배자들과 백성이 참여하는 십자군을 제안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편지들을 썼다. 특히 하나는 상당히 길며 다양한 수용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으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때까지 십자군 자원자들의 지원유발 동기는 대사, 특권, 다른 이득의 약속에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십자군을 전적으로 영적인 일 즉 죄를 포기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크게 하는 기회로 묘사하였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리스도교 기사들에 의해 싸움이 치러진 잔인하고 무감각한 전쟁의 자리에 베르나르도는 순수한 관대함의 행동을 요구하였다. 이 감동적인 편지는 십자군을 지지한 연설을 하였을 때 그가 사용한 단어들의 몇 가지 사상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우리 시대에 십자군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이 텍스트를 복사하고 인쇄하며 읽고 번역한다. 여전히 그의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데,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것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 자신들 편에서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찰하게 한다.
1146년 가을부터 1148년 봄까지 1년 반 동안 베르나르도는 제왕들, 귀족, 일반대중을 십자군으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 플란더스, 라인란드 바바리아를 거치며 여행하였다. 그는 전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미 싸움을 한 적이 있던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빨리 라이벌이 생겨났다. 십자군과 그들이 통과했던 나라들의 정부 사이에 적개심들이 보고되었다. 1149년 말 무렵 기획은 붕괴되었고 베르나르도에게 그 책임이 돌아갔다. 그는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그러한 업무의 어려움에 대한 정보를 잘 얻지 못했으며, 바로 그러한 정도에서 패주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군 실패의 주요 원인은 군주와 기사들 사이의 불화였다. 베르나르도는 패주를 하느님께 대한 모독으로 보았다. 그는 뒤따르는 개인적 비하와 자신의 수도원들에 대한 연속적인 인기 하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성직자 개혁 촉진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는 “성 말라기의 생애”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성 말라기는 Armagh의 대주교이며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클레르보에 들렀다가 이곳에서 최근 사망하였다. 베르나르도는 그를 개인적으로 거의 알지 못했으며 아일랜드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로부터 얼마간의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베르나르도가 그러하다고 믿은 대로, 말라키라는 인물을 개혁주교로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아일랜드 주교의 삶은 베르나르도가 얼마 전 상스의 주교를 위해 작성한 교회 고위 성직자에 관한 사목적 소책자를 예증하는 것이었다.
1148년 봄 레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베르나르도는 삼위일체에 관한 포레의 길버트의 가르침이 야기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의 말년의 시간들을 투입한 5권의 저작물 안에 그의 관심이 드러나 있다. 그의 제자였던 에우제니오 3세 교황은 교황직의 영성에 관한 글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은 베르나르도에게 그의 모든 개념들의 종합을 그려내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숙고 Consid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자는 자기인식과 하느님의 관상에 관한 내용이다. 성서 안에서 발견되는 이 용어는 “사목자를 위한 규칙” 안에 나타나는데 이는 대 성 그레고리오가 자신의 시대의 성직자를 지향하여 쓴 것이었지만 몇 세기 후 주교와 사제들의 영적 생활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이것을 자신의 시대를 위해 새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황의 역할은 사목자들을 위한 규칙이 나타난 6세기 이래로 발전되어왔다. 베르나르도가 판단하기에 로마 교황청은 너무 과도하게 발전해왔으며 어떤 남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는 “주교들의 품행과 의무들”이라는 책자 안에서 했던 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수많은 문제들에 그렇듯 효과적으로 개입했던 프랑스 아빠스를 교황 측근들 중에서 모든 이들이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베르나르도와 교황청 이탈리아인들 사이의 긴장은 아날렉투스 분열 때에 그리고 나중에 아벨라르 분쟁 동안 표면에 드러났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던 이탈리아 도시들과 맺은 우정을 유지하였다. 그는 중앙집권화 경향을 지녔던 로마 추기경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교황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일치라는 큰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만큼 그는 중앙집권화의 절대적인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교황청 기구가 아니라 교황의 사람이었다. 숙고의 세 번째 권에서 명백히 보여주듯이 로마 교황청에 대해 쓰여진 것에 대해 가장 악의에 찬 공격이 있었다. 그의 힘 있는 위치가 그로 하여금 교회 통치기관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아첨하거나 그들의 호의를 구하는 일을 피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남용에 대한 그의 비판은 받아들여졌고, 권위로써 그리고 영적 생활이라는 고결한 상황 안에서 바로 그러한 대로 진술되었다. 그는 사실상 클루니를 주제로 한 “변명”과 “주교들의 품행과 의무들”이라는 책자 안에서 성공적으로 이 일을 하였다. 바티칸 도서관에 아직도 보존되어 있는 “숙고”의 수많은 필사본은 교황들, 추기경들 그리고 다른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교회의 사람으로서의 자신들의 의무를 힘차게 상기시켜주는 이 작품의 개인 복사본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심지어 우리 시대에도 어떤 추기경들은 자신의 연피정 동안 “숙고”를 매년 반복해서 읽는다고 밝히고 있다.
단지 손상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비판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오로의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베르나르도의 손에서 건설적인 작품으로 세워 올리는데 유용한 것이 되었다.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하기보다 그는 실질적이며, 어떤 영성에서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즉 이웃에 대한 봉사에 깊이 몰입해있는 동안 하느님을 향한 방향 안에 머무는 것의 어려움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가 이 책자 안에서 주는 응답은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다. 확신을 가지고 교육학적으로 쓰면서 베르나르도는 구체적이며 존재론적인 교황의 상태는 남겨두고 적극적인 봉사 안에 종사하는 누구라도 겪는 문제를 썼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독자의 손을 잡아 그를 자신에 대한 숙고로부터 자신 밑에 있는 현실에 대한 고찰로 인도하며, 이어서 자신 주위에 있는 것들에로, 마지막으로 자신 위에 있는 것들에로 이끈다. 그가 이러한 현실들에 대해 토의하고 있는 책 5권은 그의 마지막 문학적 전력투구였으며 그의 교의의 정점을 대표한다. 삼위일체와 육화의 신비에 대한 고요한 관상이다.
1153년 봄, 63세였던 베르나르도는 많이 지쳐있었으나 여전히 대단한 영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개정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올바르고 결정적인 책을 뒤에 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육체적 힘이 쇠진하여 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마침 로레인에서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터졌다. 트레브의 대주교는 메츠로 가도록 베르나르도에게 청하기 위해 클레르보에 들렀고 그는 다시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베르나르도는 일어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메츠로 갔다가 자신의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1153년 8월20일 자신의 수도원에서 임종하였다.
여기서 다루지 않았으나 베르나르도가 개입했던 많은 교회적 문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교회 개혁을 위한 활동이나 수도승 혹은 수도참사회 공동체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베르나르도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클레르보에 의한 공동체 창립도 포함된다. 그의 시토회를 향한 편애가 가끔 문제를 일으켰는데 특히 랑그르와 요크의 교회 감독 임명에 있어 그의 판단은 객관적이라 할 수 없었다. 또한 다른 경우에 -지배자들과 귀족들 사이의 분쟁의 경우와 법적, 정치적, 교회법적 중대성을 지닌 결혼들의 경우-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방침의 정당성을 지나치게 확신하여 수사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과장하였다. 그는 어떤 것을 강조하는 한편 다른 것은 생략하거나 깎아내렸으며 때로는 진실이 아닌 풍문을 기꺼이 들었다.
그의 저작물 안에도 모순들이 드러난다. 때때로 그는 모순에 사로잡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후회를 표현하고 사과를 청하며 보내기 전에 그 편지 안에서 그러한 구절들을 삭제한다. 그러나 언제나 이와 같지는 않다. 베르나르도의 동기를 생각해볼 때 복음에 대한 충실함으로부터 순전히 인간적인 것을 분명히 밝혀내기는 어렵다. 확실히 하느님 한 분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리 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후회를 했던 그러한 불일치의 바닥까지 닿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는 평화를 만드는 역할을 하였으며 적들을 성공적으로 화해시켰다. 그는 또한 자신의 공동체의 영적 진보를 늘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클레르보의 관리와 경제적 발전에 대해서도 책임을 졌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수행한 엄청난 활동에 대한 어떤 생각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데, 그는 활동 중에도 관상적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관상에 대해 그가 쓸 수 없었던 것은 없었다.
베르나르도의 활동과 관상은 그의 성격의 두 측면이며 이것은 자신의 서간들과 설교들 안에서 명백하게 서로 만난다. 그는 천 통 혹은 그 이상의 편지를 보낸 듯 하며 이 가운데 오백 통 이상이 현존한다. 편지들은 대부분 몇 페이지 가량이기는 하지만 그 길이에 있어 아주 다양하며 - 몇 줄밖에 되지 않는 것에서 소책자에 이르기까지 - 주제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일반적으로 특수한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는 업무용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서간들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형성한다. 성서적 암시라는 색조로 고양된 그의 서간들은 영적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기와 의도를 강조하며, 기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역사가들이 그의 서간 안에서 상세한 정보보다 생각이나 감정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을 발견할 때 그들을 어느 정도 실망케 한다. 상세한 정보란 전달자에게 맡겨진 일로, 이들은 그 수령자들에게 구두로 그것을 전한다. 쓰여진 글들은 교회 개혁이라는 전체 맥락 안에 각각의 상황을 두고자 한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서간의 교의적 성격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말년에 자신의 비서인 오세르의 지오프리의 도움으로 출판을 위한 공식적 모음을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는 225통의 서간을 뽑고 텍스트를 개정하고 아주 체계적인 방식으로 정렬하였다. 초기 선집들이 서간들의 색조를 나타내준다. 이것들은 수도승 소명과 그 삶의 원칙적 측면을 묘사하는 텍스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으로 교황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면서 그는 교황들, 추기경들, 주교들, 아빠스들, 평신도, 여성이라는 위계적 순서에 따라 서간들을 구성하였다. 베르나르도가 교회의 각 멤버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교회의 참된 거울”을 창시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텍스트 선택과 그 제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또한 사람들이 일으킨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함에 있어 따라주기를 원했던 원칙들을 지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경우들에 쓰여진 문서들의 집대성은 영성의 적용의 종합이 되었다.
베르나르도의 생애에 걸친 가르침을 반영하는 다른 일련의 저작은 그의 작품 중 가장 길고 가장 관상적인 전례 설교이다. 베르나르도는 특히 자신의 수도승들에게 많은 설교를 하였지만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글로 쓰여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의 청중들이 메모로 적은 수백이 넘는 문장들- 이것들은 요약이거나 그의 실제 설교의 발전임- 덕분에 그의 설교들을 재구성하고 말하는 스타일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까지 잊혀져 있다가 성 베르나르도의 전작품의 최근의 비판본 준비 동안 발견된 이 잔존물은 중요한 원천 자료들이다. 이것들은 베르나르도의 교의가 자신의 수도승들의 일상의 삶에 영향을 미친 정도를 가리켜주며 그들과 자신의 심리상태를 많이 드러내준다.
교회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베르나르도는 소책자, 아가에 대한 설교, 서간들, 성인의 생애, 전례시기에 따른 설교 등 다양한 문학적 형태를 사용하며 글을 썼다. 그는 수백이 넘는 설교들을 초안하였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온 형태로 설교하지는 않았다. 그의 현존하는 설교들은 비서에게 받아쓰게 한 것이며, 비서가 편집을 통해 완성도를 높이고, 그런 후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상황에 따라서 비서는 설교와 서간 양쪽 모두를 복사하면서 때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여러 차례 다른 편집 과정을 거친 어떤 텍스트들이 있고, 그중 어떤 것들은 그 진정성에 있어 정도의 차이가 아주 다르다. 성 베르나르도는 왁스로 된 필기판 외의 다른 것에 글을 쓴 적이 결코 없으며 이것은 당연히 사라지기 쉬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써서 남긴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싸인조차 그러하다. 설교 저작물에 생긴 문제들은 단지 필사 전통의 도움을 통해서만 해결되었으며, 다행히도 이 필사본은 많은 양이 남아있다. 이는 역사 안에서 아주 독특한 경우이다. 설교라는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결정하면 그는 그 문학 장르에 꼭 부합하게 하였다. 그는 마치 자신 앞에 청중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가 말한 것에 대한 청중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말을 했지만 실제로 그는 단지 한 명의 필사가 앞에서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설교의 색조는 언제나 관상적인 강화 중의 하나였으며, 믿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인 생활 안에서의 효과를 가르쳤다.
베르나르도의 설교는 대부분 전례 안에서 거행되고 선포되는 신비와 성서 텍스트에 관련된다. 그것들 중 몇 퍼센트가 다양한 주제에 할당되었는데 덕과 악습, 수도승적 규칙준수들이다. 초기부터 이들 텍스트들은 상당히 길고 어느 정도 짜여진 설교집으로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조금씩 어떤 틀에 맞추어 분류되었으며, 전례 주기의 발전을 반영하게 되었다. 베르나르도 자신 생애의 말기에 자신의 거대한 설교 모음집 작업을 하였는데 이것은 전례주년에 대한 진정한 주석집이 되었다. 대림절에서 시작하여 12월 교회 전례력의 끝에까지 경축하는 신비를 관통하며 베르나르도는 전례력과 우리의 주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축일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교회의 주된 각 축일을 위해 소책자와 같은 글을 썼다. 그는 특별한 사건의 구약성서 발전으로 시작하고 그 후 그것의 교의적 내용과 신약 성서적 면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며 마침내 그것의 도덕적 심리학적 적용에 다다른다. 최근 학자들에 의해 방법론적 연구의 대상이 된 그의 설교들은 교의적이며 실제적인 신학의 엄청난 양을 보유하며 언제나 새로운 풍요로움을 낳아준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 베르나르도의 작품에서의 그의 발전과 점진적 변화를 보아왔다. 그의 삶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그 삶에 일치를 부여해주는 성장 양식에 있어서 어떤 내적 논리가 있다. 그의 일생은 교회가 특별한 논쟁을 경험했던 시대에 걸쳐있다. 그의 삶은 그의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생겨난 일련의 경험들로 이루어져 있다. 경험들은 갈등 상황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의 저작들은 그가 이러한 상황들과 개인적 그리고 일반적 문제에 보인 반응들을 보여준다. 각각의 경우에 그는 인간 조건과 그것을 변모케 하는 하느님의 활동에 대해 고찰하며, 우연한 사건들의 혼돈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그가 쓴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읽혀져야 한다. 그의 저작들은 그가 사람들이나 사건들과 상호작용할 때 그의 경험의 고찰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의 영성은 역사의 특별한 시기로부터 나온 것이나 그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 교훈은 영속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의 저작들이 종종 상황에 의해 쓰여지긴 했지만 그것들은 그의 심오한 믿음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이것들은 고전 그리스도교의 것과 같은 것으로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