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하느님의 신비에 자신을 개방하기
이미 언급한 주제에 대한 베르나르도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 그리스도, 성령께 대한 교의 신학을 전제로 한다. 그는 이 신비들에 대한 믿음을 가정할 뿐만 아니라, 자주 더 발전된 방식으로 이에 대해 언급한다. 그의 많은 텍스트들은 하느님 신비에 대한 믿음을 명백히 말한다. 나는 이것들 중 일부를 인용할 것이며, 그의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할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그분은 ‘숙고에 대해’ 5장에서 토의되는 절대적인 분이시다. 아가에 대한 8번째 설교에서 이야기되는 삼위일체이신 분이다. 후자에서 베르나르도는 유사한 것과 유사하지 않은 것을 비교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며, 입맞춤을 하는 이와 입맞춤을 받는 이 사이의 교환 그리고 그들을 일치시키는 입맞춤을 묘사함으로써 설명하고자 한다.
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가 우리에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이 신비는 육화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되고 나누어진다.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셨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기에 이미지 없이는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그림책인 성서는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범위 내에 상징, 인물들 그리고 하느님이 그분의 이미지와 자신의 말씀의 오심을 준비하신 예화들을 놓아두셨다. 더 나아가 신약성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전체 지상생활 즉 동정 마리아로부터의 탄생에서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순간까지의 예화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한다. 베르나르도의 그리스도론은 아주 잘 다듬어졌고, 통일성이 있으며, 완성되어 있어서 그것을 요약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그것을 약화시키거나 변형시킬 위험이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텍스트들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요소 두 가지를 인용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경험에 따르는 효과와 모범에 두는 중요성으로, 베르나르도가 이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는 것인데, 특히 그는 예수는 경험을 통해 순종과 고통을 배우셨다고 말하는 히브리 서간 구절을 인용한다. 당신 아들 안에서 하느님은 유한성에 대한 인간 경험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성 안드레아에 대한 설교 중 한 가지 안에 잘 설명되어있는데, 여기서 십자가-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십자가,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 예수님, 당신이 다가가셨던 시간, 당신의 생명을 누군가로부터 탈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닌 분으로 용감하게 서계셨던 순간은 얼마나 위대한지요. 하지만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우리들을 위해 하셨다는 것은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몸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애정으로도 우리에게 헌신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당신의 두려움은 우리를 용감하게 하며, 당신의 슬픔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당신의 혐오감은 우리를 열정적이게 하며, 당신의 고난은 우리를 고요하게 해주고, 당신의 고독은 우리를 위로해줍니다. 저는 라자로의 부활 때 당신의 영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몸부림치셨다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에게 강요되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친절함이 이에 동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더 분명하게 또 다른 사실을 듣습니다. 시종일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우세하여왔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천사가 그리스도를 위로합니다. 누가 누구를 위로합니까? 복음사가에게 들어봅시다. “천사가 나타나 그분을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수난 외에 완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의 인간 존재 전체와 마찬가지로 육화의 순간에서부터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고통은 승천의 빛남 안에서 명백히 드러났던 그분의 영광에로 방향 지어져 있다. 베르나르도는 승천의 신비에 대해 큰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클레르보에 장엄 행렬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시토 관례서에는 없던 것이었는데, 나중에 전 시토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는 수난을 비롯한 다른 어떤 신비에 대해서보다 승천에 대해 더 많은 설교를 남겼다. 그는 승천을 육화하신 말씀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사랑의 신비의 성취로 보았다. 이전에는 육의 겸손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제 아들은 성령을 인간에게 보내시어 그들을 사랑 안에 아버지와 일치시킨다.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육의 생명에서 성령의 생명 안에서 영광에로 통과하심을 상징한다. 육으로부터 성령에로의 이 움직임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도 성취될 수 있다. 성령은 주님의 육이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는데, 이 육은 그분의 신성과 일치되어있다. 인간이신 아들의 육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의 성령께로 들어올려진다.
베르나르도의 그리스도론은 성령의 신학을 통해 완성되는데, 이 요소들은 그의 작품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우리 각자와의 관계 안에서 성령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성령의 “은사”라는 성서 주제를 확장시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카리스마라 부르는 것이다. 다양한 많은 은사들 가운데서, 그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 우리가 받는 것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가 받는 것을 구별한다. 전자는 우리 안에 주입되었고, 후자는 우리 위에 부어진다. 우리는 은사의 이 두 범주를 어떻게 “식별”하는지를 배워야 하며, 이 통찰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효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이들이 자신들 안에 있는 것을 분명히 보도록 돕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노력은 상담의 올바른 목표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격려하고자 하는 것이지 그것을 질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일관된 방식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자유의 성령”을 베르나르도는 신뢰하였다.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일하심에 순종하게 성령의 촉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성령은 우리를 열정과 기쁨으로 축복하실 것이다. 우리가 성령께 자신을 열 때 우리는 그분을 받을 수 있고, 그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너희 중에 누가 그분 마음의 비밀스런 곳에서 ‘아빠, 아버지’라 외치는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과 같은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은 사람이다. 자신을 가지라, 네가 누구이든지, 자신을 가지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아들의 성령 안에서 너 자신이 아버지의 딸이자, 아들의 배우자, 누이임을 깨달으라.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내적 생활”이라 부르는 것의 목표이며, 바로 삼위일체의 그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게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중개자인 그리스도는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그 활동을 계속하게 하신다. 소피 수녀에게 쓴 서간 113에서, 베르나르도는 외적인 것 그리고 밖에 있는 것을 내적인 것과 대조하며, 그리스도인 영성의 인격화된 특징을 모든 이에게 적용 가능한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현존인데, 이는 성 바오로가 에페소서에서 말한 바이기도 하다. “당신이 사랑하는 분은 당신 안에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신 마음 안에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머물고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사랑하는 그분은 바로 당신 마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편 44,14에서 말하는 대로, 임금의 딸들의 모든 영광은 안으로부터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