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성령강림 대축일 강론 Ⅱ
슬퍼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내려오실 수 있도록 제자들을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성령은 제자들 위에 불혀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구에릭은 그의 아빠스 직무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치유와 위로의 은사를 청합니다. 예수님의 부재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과제를 안겨 줍니다. 마음의 슬픔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공허와 가난을 의식하라는 의미의 슬픔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은사, 성령을 받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 놓으라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거룩한 슬픔이야말로 성령의 첫 은사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미래에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을 외국인의 혀로 전하였다”(사도 2,4). (주석: ‘외국어’를 ‘외국인의 혀’라고 한 것은 구에릭의 표현방법이다). 확실히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입에는 하느님의 찬송노래가 있었고”(시편 149,6),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성령을 보내주소서
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시여! 저도 이렇게 성령의 부음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처럼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련마는! 제 마음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제 혀는 말라버렸나이다(민수 11,6 참조). 그러나 “제 영혼은 비계와 기름을 먹은 듯 배불러, 환호하는 입술로 당신을 찬양 하나이다.”(시편 62,6). “제 입술이 찬양을 쏟아내나이다. 제게 당신의 결정들을 가르쳐 주셨기에”(시편 118,171),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제게 맛보여주신다면, 저는 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겠나이다(마르 12,30). “당신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 당신의 결정들을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 118,68) 당신의 자비가 당신의 향유이며 그것을 통해서 당신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모든 이들이 야훼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이사 54,13; 요한 6,45) 가르칩니다. “복되니이다 주님, 당신께서 징계하시고 당신 법을 가르쳐주시는 사람!”(시편 93,12) “주님의 가르치심은 완전하여 생기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미숙한 이를 슬기롭게 하시니”(시편 18,8), 이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주님이 오른 손에 잡고계신 번개 같고(신명 33,2), 하느님의 손가락(마태 12,28; 루카 11,20; 탈출 31,18; 신명 33,2)으로 온통 마음 안에 쓰여집니다! (주석: 성령의 힘을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표현하였다.)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고 불꽃같은 말솜씨로 입술을 불태우십니다! “높은 데서 내려 쏘신 그분의 불화살이 내 뼛속에 박혔나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저를 가르치셨나이다.”(애가 1,13).
예수께서 이 세상에 불을 놓으시다
아, 예수께서 이 세상에 놓으신 불길은 얼마나 쉽고 빠르게, 넘치는 화력(火力)으로 퍼져나가고 있나이다!(루카 12,49). 그것은 미숙한 사람들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게 할뿐 아니라, 묶인 사람들을 사슬에서 해방시켜줍니다. 그 불혀는 스스로 나뉘어져서 사도들의 정신만을 불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혀에 불을 놓아 그들의 말을 듣는 경건한 사람들을 오늘도 불사릅니다. 베드로는 진정 불혀였고 바오로 역시 불혀였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말씀 안에는 꺼질 줄 모르는 불이 타오르고 있으며, 그들의 불꽃은 가까이 가기만해도 그리고 우리 귀와 마음이 그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우리 마음을 불태우기에 충분합니다.
말솜씨(혀)의 은사
- 저도 이런 혀를 가지고 있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님께서 보상으로 혀를 주셨으니, 나는 그분을 찬미 하리이다”(집회 51,30 참조)라고. 성서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여러 나라 말(외국어)로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들을”(사도 2,4.11참조) 전하였습니다. 저 역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저에게 말솜씨를 익혀주셨고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이사 50,4). 사도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은 각각 그들이 받은 말솜씨로 하느님이 하신 큰일들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말솜씨로 그들은 폭군을 채찍질하고 마귀를 쫓아냈으며 땅에 비가 내리게 하였고 하늘을 열었으니, 이 말솜씨(혀)야말로 하늘을 여는 열쇠가 아니겠습니까?(마태 16,18; 18,18 참조) 왜냐하면 하늘이 이 혀를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빠스의 직무 : 상처의 치유
저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저에게 적어도 개의 혀라도 주신다면 저는 제 상처는 물론, 다른 이들의 상처까지도 핥아주겠습니다.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하느님을 찬미하며 마음은 그분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하고 입술은 환호소리로 충만한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상처에 독이 되는 고름을 핥아줌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사람들 또한 복되다고 칭송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며 개들처럼 굶주림으로 허덕이고(시편 58,7), 먹을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혐오감 없이 먹어치웁니다. 정의에로 회개시킬 수 있다면 어떤 죄인도 그들은 꺼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 10,15)고 첫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말합니다. 네 발 가진 짐승과 날개 달린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말하나 “그런 것은 손도 대기 싫어하고 입맛이 당기지도 않는 것, 몸이 아플 때에나 먹는 것입니다”(욥 6,7). 어떤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 통회하는 아픔이 크면 클수록 구원 후 기쁨 또한 클 것이고, 그의 구원에 대해 좌절감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후의 감사하는 마음 또한 클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커다란 신비입니다. 우리는 구세주께서 잃었던 양을 찾아 그의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시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루카 15,3-7) 보속함으로써 천사들에게 더욱 큰 기쁨을 마련한다는 은총의 말씀에 경탄합니다.
죄인들에게 쏟는 정성
- 은총을 받은 사람은 “당신 말씀은 제 입천장에 감미로우며”(시편 118, 103), “주님, 제 영혼은 개들처럼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워서”(시편 58,7 참조), “소태마저 달고”(잠언 27,7), 역겨운 것도 탐스럽게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서의 꿀 같은 단맛을 즐기며 죄인들의 상처를, 다시 말해서 제 자신의 상처와 저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상처를 핥는 일을 즐겨 하겠다고 나섭니다. 죄의 상처는 보기만 해도 역겹고 흉측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핥는 사람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개들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을 맛본(non spit)사람, 그것을 인식한(non capit)사람만이 받는 은총과 감미로움은 또 얼마나 큽니까!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성서는: “네 개들의 혀도 원수들에게서 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시편 67,24)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질책
그러나 큰 열정을 가졌으면서도 멸망해 버리고, 큰 갈망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엾은 이들이 있으니, 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핥아주는 개 앞에 서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치유의 거친 혀를 죽도록 미워하여, 마치 물어뜯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도망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시비를 올바르게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아모 5,10) 내가 여기서 “바른말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설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가지고 질책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참된 사랑” 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참된 미움”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예, 양쪽 모두입니다. 참된 사랑뿐만 아니라 참된 미움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미움은 다름 아닌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증거 했듯이 양쪽 모두의 진리는 오직 하나: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는 것!”(로마 12,9)입니다.
어떻게 형제들을 섬기는가?
- 잠깐 주제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저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혀를 간청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혀를 원했습니다. 첫째 경우는 제 자신을 위해서 거룩한 기도의 열매를 갈망한 것이고, 둘째 경우는 제 형제들의 치유의 이득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어떤 예술가가 능력과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예가는 쓸모 있는 것(유용한 것)도 기쁜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유용한 것과 아름다움을 엮어내는 보상으로 대가를 바란다.”
앞에서 말했듯이 저는 하느님과 저의 형제들인 여러분에게 기꺼이 봉사하기 위해 말솜씨의 은사를 청했고, 이로써 덜 유익한 저의 모범을 저의 말솜씨가 보충하여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제가 행동은 하지 않고 말로만 한다면 제 혀는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 삶에는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너 어찌 내 계명들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시편 49,16)고 죄인에게 말씀하시듯이 제게도 말씀하실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보아도 이 괴로움 멎지 않고 입을 다물어보아도 이 아픔 가시지 않습니다!”(욥 16,6). 양쪽 모두 두려움으로 저를 괴롭히고, 양쪽에서 저를 잡아당깁니다(필리 1,23 참조). 제가 처해있는 위치와 직무는 말을 하라고 저를 재촉하고 저의 개인적인 삶은 그것에 반항합니다. 그러나 저는 현자가 “허기진 배가 일하게 만들고, 그 입이 그를 몰아세운다.”(잠언 16,26)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지위가 요구하는 대로 말하지 않고 이성이 허락하는 대로 아니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과 모든 말함이 그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하겠습니다. “제 혀에게 의무를 지워 부끄럼을 당하지 않도록 억지로라도 노동자의 일에 종사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몸이 쇠약하여 육체노동을 면제 받아야 될 때에는 노동자의 영혼이 그를 대신하여 고생해 주기를, 그리하여 다윗과 함께 “저는 탄식으로 기진해졌습니다.”(시편 6,7)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 저에게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탄식을 주신다면, 성령께서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하시는(로마 8,26)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탄식을 주신다면, 저도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으련마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탄식의 노고는 매일의 노동을 위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탄식
- 형제들이여, 여러분이야말로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구하기를 배웠으니(1코린 12,31)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은사를 여러분에게도 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약한 사람을 위해서 이보다 더 알맞고 더 도움이 될 만한 성령의 은사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을 때(마태 3,16), 이 탄식소리보다 더 친숙한 환영의 소리가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이사 59,1). 그러나 우리의 교만이 비참함을 감추거나 우리의 의식이 무감각, 무관심과 정신 나간 행동으로 무뎌져있지만 않다면 비탄과 탄식만큼 알맞은 재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어떤 것도 저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약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치료를 직접 맡아 보시는 빛이시며 구원이신 성령의 첫 번째 약효입니다. 말하자면 정신 나간 사람(미치광이)은 제 정신을 차리고 이성을 되찾아 마음 안으로 돌아와서 예언자와 함께 “당신이 저를 회개시켜주시니 저는 부끄러워하며 통회하였고 잘못을 깨닫게 해주시니 가슴 치며 뉘우쳤습니다.”(예레 31,19)라고 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깨달음이 없다면 뉘우칠 것도 없고 통회의 아픔도 없으며 위로 받을 것도 없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슬픔과 위로
만일 사도들이 주님이 떠나가시는데도 슬퍼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협력자 성령께서 오실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겼는데 어찌 신랑의 친구들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마태 9,15 참조) 그래서 그분은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요한 16,7)라고, 그리고 만일 “나의 육신의 현존이 너희에게서 떠나지 않으면, 나의 영적 손님이 너희를 위로해 주러 올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분은 “취하게 하는 술(독주)은 슬퍼하는 사람에게 주고 포도주는 상심한 사람에게 주어라”(잠언 31,6). 그러나 “세상의 향락에 취해 있는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이 될 수 있겠습니까?”(2코린 6,14) “주님의 잔을 마시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잔을 마실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것을 마시고 가난을 잊어라!”(잠언 31,7)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며 이에 대해 그들은 “우리는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든다.”고 응답합니다. 떠나가신 신랑을 슬퍼하며 괴로움을 잊으려고 마시지만 오히려 그들은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2코린 5,16)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시편 작가와 함께 경건한 사랑으로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시편 68,30)라고 말한다면 당신 또한 그렇게 부요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잔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져서 비록 가난할지라도 그 가난이 당신의 영을 괴롭히지 않고, 죄로 인해 통회의 아픔을 느낄지라도, 죄의식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령
-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슬퍼하는 사람이 더는 슬퍼하지 않게 하시고, 웃는 사람이 영원히 위로 받을 수 없는 슬픔의 고통에 떨어지게 하지 않으시려는 것은 아닌지 한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웃는 사람의 집보다는 슬퍼하는 사람의 집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전도 7,3). 지혜로운 사람은 슬프고 괴로운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위로 받아 마땅하지만, 자신 안에 새로운 위로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슬픔과 고통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아부 섞인 칭찬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그는 자신을 비판하고, 의로워질수록 더 엄하게 자신을 판단하고 다스립니다. 제가 틀리지 않다면 위로자 성령께서는 이런 사람을 더 자주 찾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시기 전에 미리 계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위로를 주러 오시지만, 그 전에 슬퍼하는 것을 가르치러 오십니다.
슬픔은 얼마나 중요한가!
경건하고 하느님께 지향을 둔 이 슬픔은 찾아오는 순서로 보나 유용함으로 보나 성령의 가르침의 첫자리를 차지합니다. 슬픔은 성인들의 최상의 지혜, 정의의 파수꾼, 겸손한 이들의 절제, 초보자의 첫째 덕, 진보한 사람들의 촉진제, 완덕에 나아간 사람의 면류관, 탕자의 구원, 위험에 빠진 사람들의 피난처입니다. 한 마디로 슬픔은 지금 여기서는 위로, 미래에는 기쁨의 약속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슬픔이 우리를 살아계신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