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성령강림 대축일 강론 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을 때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이 은총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믿음을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한편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깨어있도록 우리를 재촉하는 이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희망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우리는 성령의 기쁨 안에서 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겪게 될 가장 큰 위기는 영혼의 포만과 영적 권태입니다. 자신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험준한 낭떠러지에 서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낌없는 사랑
-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너무나 큰 하느님의 자비! 그 이름에 걸맞은 그 행동! 자애롭고 존엄하심이 감탄스럽다함은 그분의 신적 사랑이 우리를 감싸주심이요, 더욱더 감탄스러움은 하느님 사랑이 자애로운 존엄하심으로 우리를 끌어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종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것만도 부족하게 여기시어 그 종들을 아들로 삼고자 성령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아드님은 구원의 대가로, 성령은 자녀의 권리를 되찾는 대가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당신 자신은 양자가 된 그의 자녀들의 유산으로 보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모하신 나머지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고!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닌 인간 때문에, 인간을 되찾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낭비하시는 분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로마 8,32)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듯이 아드님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또한 성령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새롭고 놀라운 풍요로움으로 모든 인간 위에 부어주셨다는 것에 대해 저는 감히 “낭비하셨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물론 방탕한 아들은 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전부 탕진해 버렸고 결국 아버지의 유산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창녀들에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은총과 돈, 영과 육, 하느님과 인간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아버지께서 잃었던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 낭비하신 것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과분한 은총
보십시오, 이 지상에 성령의 은사가 얼마나 과분하게 내려졌는지를! 정의로운 사람을 강하게 하여 줄뿐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보십시오, 성령의 숨을 보내시어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편 103,30). 예, 오늘 지존하신 오른팔을 통해서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시편 76,11) 뜻밖에도 타락한 세리와 창녀들이 의로운 사람들 보다 앞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고(마태 21,31), 꼴찌가 첫째가 되었습니다(마태 19,30).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로마 5,15)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 더구나 죄만 사해진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덕의 공로까지 더해주십니다. 구원은 타락한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보다 더 놀랍게 그를 재창조했습니다.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다!
놀랍고도 신비스런 은총이 그들 안에서 전파되면 될수록 그에 대한 인간의 완고한 거부도 그 만큼 더 파멸적임은 그들이 베풀어진 은총을 거부하거나 받은 은혜를 보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 위에 그분의 빛이 비추이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뜨거움 앞에서 벗어날 자 누가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양심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진리의 빛으로 그를 비추시며 자비의 불꽃으로 그를 따뜻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었고”(요한 1,9),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 5,45)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앙화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역하고”(사도 7,51),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벌이 내려질 것입니다”(로마 2,8). 땡볕에 굳어지는 흙덩이처럼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거부하여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지고, 그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건만 오히려 오만불손만 늘어나 그분에게 대들었습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이 하실 일
- 그러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1코린 5,12) 우리의 설교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에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받을 상속의 보증으로(에페 1,14) 진노의 그릇과는 다른, 자비의 그릇에 새겨진 성령을 받으셨습니다(로마 9,22-23).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아니 그보다는 구원의 희망에 대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이들에게 떨어질 진노가 우리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들 때문에 믿는 사람이 좌절해서도 안되지만 자만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설령 현재 일어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이나 그들의 일을 알고 있다하더라도 미래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판단을 선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그들에 대한 가혹한 심판이든지 아니면 주제넘은 자기 판단이든지- 이것은 생명과 죽음의 심판자이신 지존하신 분의 존엄성에 대해 큰 불의를 범하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그들의 무리 중에서 뽑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로마 9,21). 실상 우리 모두 그들과 비슷하여 본능적인 욕망에 따라, 욕정에 끌려 살아온 진노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입니다(에페 2,3). 그러나 뜻밖에도 우리는 은총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희망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의 모범이 되어야하고 그들을 회개와 보속에로 인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모범이 되어 우리를 인내에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당신 자비를 드러내시어 우리를 사랑에로 초대하시며, 그 안에서 심판을 보여주시고 두려움을 갖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애와 공정을 제가 노래 하리이다!”(시편 100,1) 은총과 자애에 대해 감사드리며 그분은 공정하시기 때문에 간청하는 것입니다. 첫째 것에 대해서는 고마움과 기쁨으로, 두 번째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신중함으로! 두 가지 모두 두려움과 떨림으로 당신을 환호하는 것에 대해 저를 가르칩니다.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도록 제 마음 모아주시면 그 때 비로소 저는 당신의 진실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리이다”(시편 85,11).
거룩한 두려움
사랑을 통해 정화된 두려움은 기쁨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존하며, 파괴하지 않고(destruit) 그것을 자라게 하며(instruit), 쓰디쓰지 않고 감미롭게 하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겸손하고 소박 할수록 영속적이고, 엄격할수록 진실 되고, 거룩할수록 사랑스럽습니다. 오, 순수하고 진실 된 기쁨이여! 현자의 “어떠한 재산도 몸의 건강에 비길 수 없고 어떠한 쾌락도 마음의 기쁨에 비할 수 없다”(집회 30,16)는 말은 진정 너를 두고 한 말이로다. 이런 기쁨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혐오하고 질책하는 악인들과 함께 어울려 추잡한 말, 실없는 말, 웃기는 말을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웃음에 대해서 그는 “웃음이란 얼빠진 짓”이고 쾌락에 대해서는 “별 수 없다”(전도 2,2), “웃음 속에도 슬픔이 있고 즐거움이 서글픔으로 끝나기도 한다.”(잠언 14,13)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쁨
- 오, 사랑스런 예수님! 헛되고 거짓된 쾌락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당신의 기쁨은 얼마나 다릅니까! “당신의 자애는 생명보다 얼마나 더 낫습니까!”(시편 62,4), “당신 안뜰에서의 하루는 (다른) 천 날보다 얼마나 더 좋으니이까!”(시편 83,11) 당신은 당신의 가난을 통해서 당신의 가난한 이들을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해주십니까!(마태 5,3) 세상의 모든 부요함보다도 더 그들을 복되게 하여 주십니다. 그들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흘러나오게 마련, 그것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흘러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난한 가정공동체는 다른 기쁨으로 넘칩니다. “강이 있어 그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합니다.”(시편 45,5). 예언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진리의 말씀이 그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그들 안으로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평화(재물)를 개울처럼 쏟아져 흐르게 하리라”(이사 66,12). 얼마나 넘치는 풍요가 이들에게 강물처럼 흘러들어가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 안에서 샘솟는, 살아있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옵니까!(요한 7,38) 사랑만이 그들의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적수도 이겨내지 못할 언변이 폭포처럼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스테파노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지혜와 성령을 받아 말하는 스테파노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사도 6,10).
전제 조건 : 갈망하는 영혼
- 형제들이여, 위로자는 이런 기쁨에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분은 당신 환희의 강물을 목말라하는 영혼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목마른 사람들아,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라고 그분은 외치십니다. 오, 하느님의 넘치는 풍요로움이여! 오,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의 부요함이여!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첫 열매를 오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예, 모두에게! 인간이나 가축이나 할 것 없이 오늘, 주님께서 그분의 보물창고를 여시고 넘쳐흐르는 물을 회중과 가축에게 먹이십니다(민수 20,6). 그들에게 마치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무식한 사람에게나 유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로마 1,14) 그분은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이사 55,1)고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차별대우도 하지 않으시며 먼저 공적을 쌓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갈증을 인식하고 그분에게 가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십니다. 은총은 배부른 자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십니다.”(루카 1,53).
영적 권태
오, 혐오스런 권태로움이여, 너는 마음을 좀 먹고 정신을 녹슬게 하며 영혼을 우울의 위험에 빠지게 하는구나! 너는 하느님의 좋은 말씀을 역겨워하게 만들고 천상 은혜를 멸시하며, 고기 냄비 때문에 만나에 싫증나게 부추기는구나!(탈출 16,3) 인간에게 이보다 더한 최악의 페스트가 어디 또 있으며 영원한 구원을 잊어버리게 하는 죽을 괴질이 또 어디 있는가! 너는 그들을 웃으면서 악한 길로 끌어들이고 죽음의 문 앞까지 유혹하는구나!(시편 106, 18) 나는 이 페스트가 그리스도의 양 우리 안에 어떻게 퍼졌고, 그리스도의 양들을 어떻게 전염시켰는지, 주님의 양들이 함께 거닐던 그 푸른 목장이 어떻게 스산한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빈 들판이 되고 말았는지 묻고 싶구나!(신명 32,10) 좋은 목장, 기름진 풀을 뜯던 목장에서(에제 34,14) 그들은 게으른 권태로 인해 한심스럽게 멸망하고 마는구나!
이런 하느님에 대한 망각과 무분별은 어디서 오는가?
“이들은 하늘이 주는 선물의 기쁨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또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권세의 맛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까?”(히브 6,4-5)라고 나는 묻고 싶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 마음이 아름다운 말로 넘쳐흘렀으며(시편 44,2), 그분의 넘치는 자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의 입술에서 찬양노래가 쏟아져 나왔겠습니까?(시편 118,171 참조) 그런데 지금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러 와서 졸거나 게을러서 악한 잡념에만 매달립니다. 책 앞에 앉으면 하품만하고, 강화를 들을 때도 귀 기울여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 목장에서 저 목장에로 옮겨 다니지만 새것이나 옛것이나 권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찾지만 결국 허기져서 죽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한 때는 이들도 복된 체험을 했고 최상의 향유를 누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토록 선을 망각하고, 무분별한 생활과 정신적인 나태가 이들을 지배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간혹 이들이 한탄하더라도, 다만 그들 귀에는 “제 마음이 풀처럼 베어져 메말라가니 저는 빵을 먹는 것조차 잊고 있나이다.”라는 시편작가의 탄식소리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들 또한 한 때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유인하여 되돌아가게 만들었습니까? 그 때 성령 안에서 시작한 삶을 지금 이들은 인간의 육 안에서 마치려고 합니다(갈라 3,3). “맛있는 것만 먹던 자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애가4,5).
악한 원수에 대한 경계
-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간곡히 경고합니다. 원수가 아버지의 좋은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듯이(마태 13,24-25) 그리스도의 감미로운 음식을 즐기던 이들 안에 그의 독을 뿌려 식욕을 돋운 다음 갈망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한 때 즐기던 좋은 맛의 기억마저 지워버리려 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사도는 이런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주님의 잔을 마시면서 마귀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또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20-21)라고 가차 없는 판단을 내립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달리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욕정에 끌리어, 분노로 인해, 불인내로, 그와 비슷한 정욕에 휘말린다면, 그는 마귀의 잔을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아주 거기에 취해버렸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이것은 타성에 젖은 습관이라기보다는 죄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먹은 것이 그를 먹어치울 것입니다. 입을 함부로 악행에 내벌리고, 혀는 간계를 일삼고 형제를 거슬러 말하고 어미의 아들에게 오욕을 끼치는 사람은 마귀의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직접 다른 사람을 거슬러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비방하는 사람의 어리석고 허무맹랑한 잡담, 폭소, 산만함을 가져다주는 말을 즐겨 듣는다면 그런 사람도 마귀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한번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의 더러운 예식에 봉헌된 제물의 핏속에서 뒹굴던 사람을, 그대로 다시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식탁에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깨끗함을 즐기고 있는 내가 악한 것을 거기다 덮어씌우려는 의도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따를 때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게으름으로 성령의 은사를 잃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온갖 주의와 깨어있음으로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며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