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사순절 강론 Ⅰ
사랑을 통한 정화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이 평생 하는 일을 마치 정련사가 금과 은을 불로 정련하여 찌꺼기를 걸러내듯 시험하시고 정화시키십니다. 사랑보다 더 효력 있는 정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겪고 있는 곤궁과 고통을 사랑 안에서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 세상에서 불로 단련 받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이중의 환난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2코린 1,3-4). “의인의 불행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하시리라”(시편 33,20) 두 가지 환난 사이에서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차원 즉 어떤 면에서는 육체에 따라 살기도 하고 또 영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세속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육체에 따라 살았고, 천국에서는 완전히 영적으로 살게 될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육적이기도 하고 영적이기도 합니다. 영 안에서 진보함에 따라 더욱더 영적이 되든지 아니면 덜 영적이면서 육적으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이중의 환난이 덮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적인 것은 불행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것은 죄에 빠지기 쉬운 약함을 통해서 환난으로 덮칩니다. 만일 우리 안에 육적인 것이 없다면 불행한 사건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예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안에 영적인 것이 전혀 없다면 죄에 빠지기 쉬운 약함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 대로: “그들은 나쁜 짓만 즐기고 사기 치며 좋아하는 자들이다.”(잠언 2,14)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행한 일들이 우리 안에 초래하는 슬픔은 영적이며 이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먼저 것은 위로가 없으면 죽음으로 이끌어 가지만 다른 것은 위로를 받으면 구원으로 이끕니다(2코린 7,10). 외적인 불행으로 인해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위로가 주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엄하게도 부요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멸망을 위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루카 6,24-26). 불행한 일을 통해 겸손해져야만 될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부요함 때문에 더욱 교만해지고, 그들의 죄스런 탐욕에서는 비계가 불거져 나옵니다(시편 72,7). 실제로 “그들은 건방지게도 하느님께 도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손에 모든 것을 다 맡기셨는데도 불구하고.”(욥 12,6).
일시적인 위로와 영원한 위로
- 만일 일시적인 위로가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더 없이 감사하고 겸허해 집시다. 그것들이 만일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영원한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다 큰 확신을 가지고 기뻐합시다. 몸도 건강하고 날씨도 쾌청하고 재산도 풍부하게 주어졌다면, 그것들을 잘 이용하여 절도 있게 사용하여 죄를 지을 기회를 만들지 말고, 오히려 덕을 쌓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며 좋은 것을 통해서 나쁘게 되기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도록 합시다! 내 영혼은 육체의 쾌락이나 속된 허영의 위로로 위로받기를 거부합니다(시편 76,3). 차라리 모세와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였듯이 죄의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기보다는 학대 받는 길을 택하겠습니다(히브11,25). 우리가 외적으로 위로를 받거나 고통을 겪거나, 우리의 마음에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양 받으실지어다(2테살 2,15). 우리는 곤경 속에서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희망의 기쁨으로 그분과 함께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의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로마 5,3.8; 2티모 2,12).
주님께서는 시련 중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내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에 빠지기 쉬운 약함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체험하면 할수록 더 견디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매일 위험과 맞닥뜨리게 되며 진정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도움을 주지 아니하셨다면, 내 영혼은 이미 침묵 속에 드러누웠으리라.”(시편 93,17).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손길이 더욱 가까이 있습니다.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고 생각했을 제, 주님, 당신의 자애가 저를 받쳐주었나이다”(시편 93,18). 그 때 당신 자신이 베드로에게 직접 보여주신 모범을 지금은 매일 매일 베드로의 아들들에게 영적으로 채워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니다(마태 14,28-29). 다시 말해서 크고 넓은 바다 위를!(시편 103,25) 보십시오, 당신의 힘으로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게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으며 자주 거센 바람을 보고 흔들리다가 그만 물에 빠져들고 맙니다(마태 14,30). 다시 말씀드리자면 거의 유혹자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발이 휘청거려 미끄러졌음을 즉시 고백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 흔들리고 있음을 고백한다면, 믿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기만 한다면, 당신께서는 자애로 당신 손을 뻗치시어 붙잡아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 의인은 매일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들이 쓰러뜨리려 나를 밀쳤어도, 나는 넘어지지 않았나이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17,13). 또 “그는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그의 손으로 받쳐주시기 때문입니다.”(시편 36,24). 다시 말하면 그가 비록 죄를 지었어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을 것이니, 변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2,1). 그는 또한 하루에 일곱 번 넘어져도 일곱 번 다시 일어납니다(잠언 24,16). 그는 넘어진 자리에 누워있거나 오물 속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즉시 일어나 먼지를 털고, 보속함으로써 부정을 씻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발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언제나 먼저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서 입을 연다면 그는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잠언 18,17). 그에게 하시는 주님의 권고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너의 죄를 내 앞에 털어 놓아라, 너는 의롭게 될 것이다”(이사 43,26 불가타). 만일 그가 자신을 먼저 비판하고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보속한다면 그는 정의로운 재판관처럼 두려워해야할 분을, 그의 죄를 변호해주시는 변호인으로 모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정의로우시어 정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0,8). 그분이 정한 때가 오면 그를 정의로 심판하실 그분께서는 불의한 사건을 떠맡지도 않으실 뿐만 아니라 변호해 주실 수도 없게 됩니다(시편 74,3). 그렇지만 같은 변호인께서는 정의롭다고 스스로 자만하는 자들에게는 엄한 심판자로 오시겠다고 가혹한 말씀을 하시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자에게는 변호인으로 오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면전에서 의로울 수 없는 바로 그분 앞에서(시편 142,2) 우리는 자신을 고발하고 징계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정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정의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자로서의 그분의 역할을 우리 자신이 직접 맡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하지 않는 불완전함
-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지나 약함으로 인해 소죄를 범했을지라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여부스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없었으므로(1열왕 9,20-21) 그 땅에 남겨 두고 참아준 그 후손들이 우리와 함께 그 땅을 차지하고 있듯이 우리의 불완전한 신분 또한 예언자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입장에 서서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처음부터 주님께 반역하여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으나 구원을 받았나이다.”(이사 64,5). 나의 불완전함, 그리스도의 몸인 나는 말합니다. “당신의 자애 깊은 눈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책에 모든 것이 쓰여 있나이다.”(시편 138,6) 다시 말씀드리면 “그 안에는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모든 것이 쓰여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화의 필요성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완전에로 이끌어 가시겠다는 약속을 요엘 예언자를 통해서 하십니다. “나는 아직 정화되지 못한 그들의 살인죄에서 그들을 정하게 해주리라”(요엘 3,21). 그러므로 이사야는 먼저 미래의 천상 예루살렘의 완전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온에 살아남은 자, 예루살렘에 남은 자는 성도라 불리리니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남은 생존자의 명단에 오른 이들이다.”(이사 4,3)라고.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의 성덕은 오직 하느님께서 정화시켜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심판하는 입김과 쓸어가는 바람으로 피에 물든 예루살렘을 속속들이 정하게 하십니다.”(이사 4,4) 더러움을 씻어주신다는 약속은 나에게 위로가 되지만 ‘심판하는 입김과 쓸어가는 불길’의 방법은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불은 각자가 한 일을 모두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코린 3,13-15) -기초 덕분에- 그렇지만 그는 불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랑의 불을 통한 정화
- 만일 그렇다면 지금 황홀한 사랑의 불에 타는 것이 후에 징벌의 불에 태워지는 것보다 우리를 위해서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랑의 불 속에서 정화 되어 불쏘시개가 될 만한 세속적인 것들을 모조리 태워서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바빌론의 화덕 안에서 세 소년에게 신선한 미풍이 불었듯이 우리에게도 불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게으르고 마지근한 생활로 인해 나무, 건초, 검불 불쏘시개만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연옥의 시험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다면 “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이 불길을 누가 견디어낼 것이며, 누가 그 영원한 불꽃을 견디어 내겠습니까?”(이사 33,14) 그가 피투성이가 된 그의 군복을 불 속에 던져 불의 먹이로 주지 않고서야?(이사 9,5) 내가 만일 사랑의 불로 충분히 불타고 있다면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 만큼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 7,47)고 하신 말씀이 나에게도 효력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고통의 불을 통한 정화
그런데 나에게 사랑의 불을 통해서 정화될 자격조차 남아있지 않다면 차라리 고통을 통해서라도 정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언자가 자신에게 “뼛속이 녹아내리고 아랫도리가 후들거려도 좋습니다. 재앙이 떨어지는 날 제가 안식을 얻을 수만 있다면!”하고 간청한 그 탄원이 나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면, 그리하여 나를 산산이 부수시고 손을 들어 나를 죽여주신다면, 차라리 그것으로 나는 위로를 받고, 견딜 수 없이 괴롭지만 오히려 기뻐 뛰리라”(욥 6,9-10) “주님, 당신은 저의 됨됨이를 아시고, 제가 티끌임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02,14) “저에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며 무슨 좋은 수가 있겠다고 더 살겠습니까? 저의 힘은 바위가 아니고, 제 살은 놋쇠가 아닙니다.”(욥 6,11-12). 먼저 저는 이렇게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의 진노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당신의 격분으로 저를 징벌하지 마소서”(시편 6,2). 그러나 저는 당신께로부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19)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 매를 맞는 일이야말로 즐거운 일이다.”(욥 5,17)라고 하였으니, “그러니 주님, 화가 나시어 매를 드시더라도 자비하심으로 다스려주시고 당신의 진노하심으로 저를 아주 죽여 버리지는 말아주십시오.”(예레 10,24)라는 간청을 감히 드립니다. 저에 대해서는 “영광에 끝을 내시고 어좌를 땅바닥에 내던지셨나이다.”(시편 88,4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약함을 살피시어 당신의 손을 알맞게 늦추어 주십시오. 너무 세게 매로 치시어 마음의 인내가 부서지지 않도록 하시고, 고통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게 하여 주십시오(로마 5, 3-4 참조). 그러나 내가 매일 불타기는 하여도 정화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다음 말씀은 저에게 똑같이 해당됩니다. “아무리 땀 흘려 애써 보아도, 아무리 불에 올려놓고 달구어도 녹은 가시지 않았다. 음행으로 더러워진 네 몸을 정하게 해주려 하였지만, 너는 그 더러움을 벗어 정하게 되려하지 않았다. 너는 끝내 정하게 되려하지 않는다. 그런즉 나는 화를 터뜨리고야 말리라”(에제 24,12-13).
엄한 생활을 통한 정화
-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엄한 생활은 매일 연옥 불처럼 우리를 정련시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부정을 완전히 정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아마 상전께서 자리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듯, 레위 후손을 깨끗하게 만들 때까지(말라 3,2-3) 어쩌면 우리는 실제로 완전히 깨끗해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정화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다지 큰 도움은 못될지라도 완전히 차후로 모든 것을 미루어 쌓아두는 것보다, 여기서 불의 고통을 견디어 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을 서로 비교해볼 때 지금 여기서 겪는 불은 자비로운 구원 수단이 되지만 다른 것은 진노의 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작가도 이것을 느꼈는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의 진노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당신의 격분으로 저를 징벌하지 마소서!”(시편 6,2) 저는 압니다. 제 안에서 제 영혼이 슬퍼하고 있음을(시편 41,7), “주님, 아무리 노여우셔도 잊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바 3,2). 슬픔 속에서 벌을 받을 때에 더 나은 것에 대한 희망이 저를 위로함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원수의 권세에 잠시 동안 정화를 위하여 내맡겨졌었지만 나는 예언자와 함께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아,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좋아하지 말라. 지금은 쓰러졌지만 일어설 날이 온다. 지금은 어둠 속에서 지새우지만,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실 날이 온다. 나는 주님께 죄를 얻었으니, 주님께서 나를 법으로 다스리시고 재판을 내리시기까지 그분의 진노를 참고 받아야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에게 밝은 세상을 보이시면, 그제야 나는 눈이 열려, 이제껏 해 오신 일이 옳았음을 알게 되리라. 그제야 원수들도 눈이 열려, 빈정거리던 일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리라”(미카 7,8-10). 그 날이 오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한 때 저에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여움을 푸시고 저를 위로해 주셨나이다.”(이사 12,1).
지금 이 때를 잘 이용하십시오!
“그러니 어찌 제가 불행의 날을 두려워하겠습니까?”(시편 48,6) 어찌 좋은 날에 좋은 것을 즐기면서 나쁜 날을 미리 방지하려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은총의 때, 지금이 구원의 날이 아닙니까?(2코린 6,2) 왜 나는 설교자의 충고를 적어도 한번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든 손에 닿는 대로 하여라.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그 저승에는 할 일도, 생각 할 일도, 깨쳤던 지혜도 쓸데없어진다”(전도 9,10). 그리고 사도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갈라 6,10).
항상 주님을 경외함 안에서
처음에는 위로에 대한 말씀을 드리다가 점점 두려운 일들에로 넘어갔습니다. 사실 위로는 두려움과 연관될 때만 이익을 가져다 붑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실 안에 걸으오리이다.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도록 제 마음 모아주소서”(시편 85,11). 그 안에서만 저는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제가 어리석게도 여러분을 안심만 시켜드린다면, 우리 또한 다음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할 자들이 도리어 엉뚱한 길로 이끌어 너희의 갈 길을 망쳐 놓는구나.”(이사 3,12).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의 비참함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경건한 두려움 안에서 그것들을 슬퍼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 안에 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경외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삶을 산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