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HTHILD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
“당신이 나를 이끌어 주시면, 나 춤추리다.”
Margot Schmidt
마르고트 쉬미트 편역
5. 하느님께 가는 길
고통의 길
“죄가 고통스러운 사람을 나는 용서한다. 그러나 누가 죄를 아프게 통회하면 나는 그에게 나의 은총을 주겠다. 누가 크게 통회하여, 다시 죄를 짓기보다는 목숨을 내놓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항구히 지킨다면, 그가 비록 속죄는 하지 못하고 다만 매일 대죄를 범하지만 않았다 해도, 이 세상 삶이 끝난 후에 나는 그의 잘못을 심판하여 책벌하지 않겠다.”
(Ⅳ,6)
세 가지 참회(통회)가 있다 …
첫째는 잘못을 참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표시를 가지고 있다: 죄에서 흘러나온 것으로써 마음 안에 괴로움을, 그리고 죄 속에서 느꼈던 그 감각 안에서 수치심을 갖고,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의 삶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이런 통회는 천상 아버지와 죄를 지은 영혼을 화해시켜 주고 그를 영원한 지옥 벌에서 구해 준다.
둘째는 보속으로 참회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세 가지 표시를 가지고 있다: 부지런히 노력함과 항상 모든 유혹을 깨끗하게 이기고, 그렇게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런 통회는 죄인을 모든 연옥 불에서 구해 준다.
셋째는 사랑의 참회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만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혼이 이런 지향으로 산다면, 그는 하느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죄는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Ⅴ,1)
나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관대함에 대해 감사드리며, 전 생애 동안 저지른 나의 모든 잘못을 울며 애통해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유 없이 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Ⅴ,2)
필요성이 없는데도 내 육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놓쳐 버린 모든 선행을 뉘우치고 통회한다.
(Ⅴ,2)
Minne는 고통을 감미롭게 해 준다,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과 닮기를 원한다면, 거의 모든 싸움에서 우리는 이겨야 한다.
(Ⅶ,55)
정녕 그대는 나의 애인(아가 1,15; 4,1):
보라, 나의 눈은 얼마나 아름답고,
내 입은 얼마나 애정에 넘치고,
내 마음은 얼마나 불타고,
내 손은 얼마나 민첩하고,
내 발은 얼마나 신속한지를.
오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너는 나와 함께 괴롭힘을 당하여 죽고,
시기로 배신당하고,
위선이 찾아들고,
미움으로 포로가 되고,
비방으로 사로잡히고,
진리를 밝혀내지 못하게 눈이 가려질 것이다.
세상의 격분으로 매 맞고,
고백소에서 법정으로 끌려가고,
조롱으로 헤로데에게 보내지고,
고독으로 벌거숭이가 되고,
가난으로 채찍질 당하고,
유혹의 화관이 씌워지고,
모독으로 침 뱉음 당하리라.
죄의 증오 속에서 너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네 자신의 의지로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함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성덕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랑으로 상처 입고,
거룩한 항구함으로 십자가 죽음을 죽고,
하느님과의 합일로 너의 심장은 늘 꿰뚫릴 것이다.
네 원수들을 이긴 참 승리로 너는 십자가에서 풀려날 것이다.
무시와 경시 속에서 네 장례가 치러질 것이고,
거룩한 종말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Ⅰ,29)
너는 또한 이것도 감수해야 한다,
너와 함께 포도주 방을 드나들던 이들,
그들이 너를 질투할 것이다.
(Ⅲ,3)
강한 Minne 서원의 망치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모든 피조물은 다시는 그를 되돌려 받을 수 없으리라.
(Ⅲ,10)
영혼이 고귀한 십자가에 달려 있네 …,
성령의 감미로운 숨결 안에 드높이 …,
그리하여 모든 지상적인 것들에 그녀가 메말라 죽게 되었네.
그녀는 거기에서 눈물도 흘리지 않고,
성삼위 안에서 완전히 타 없어질 때까지, 거대한 천상 불로 불태워지리라.
(Ⅳ,16)
그분이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거리에, 낯선 구유에 내던지셨듯이, 그렇게 우리 주님은 아직도 여전히 그의 선택된 친구들을 지상의 모든 위로(기쁨)에서 뽑아내시어, 그들이 천상 위로에 굶주리게 하시네.
(Ⅵ,4)
이것은 특이한 길이다
고귀한 길
거룩한 길
하느님 자신이 걸으신 길:
인간이 죄와 잘못 없이 고통 받는 길.
(Ⅰ,25)
너는 고통의 물을 마시고, 덕행의 나무에 사랑의 불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Ⅰ,35)
나는 참으로 멸시를 당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놀라지 마라, 고귀한 향유 병(예수 그리스도)이
이토록 모질게 내팽개쳐지고 침 뱉음 당했는데,
아무 가치도 없는 식초병이랴?
(Ⅰ,31)
사람들이 너에게 영광을 돌리거든 부끄러워해라,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거든 기뻐해라,
사람들이 너에게 선한 일을 하거든 두려워해라,
네가 나에게 거스르는 행동을 했거든 마음으로 슬퍼해라.
슬퍼할 수 없거든 생각해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참혹하고 긴 아픔으로 괴로워했는지를.
(Ⅰ,32)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뒤에서 나에게 돌을 던져 치고는 도망간다, 돌로 나를 쳤다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보셨다.
(Ⅱ,24)
때가 된 것 같다,
영성적인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정신을 괴롭힌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스런 아들처럼 그들도 몸과 영혼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Ⅰ,25)
하느님께서 그에게(다니엘) 그의 원수들 앞에서 몸과 영혼을 위한 양식을 주셨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이 비천한 사람에게도 나의 곤경 속에서 그렇게 해 주셨다. 그것을 나의 원수들이 조금 보고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Ⅲ,20)
너의 원수들이 자주 너를 덮칠 것이니, 마치 천상 꽃 위에 떨어지는 지옥 서릿발 같으리라.
(Ⅴ,19)
인간이 아직 죄를 짓고 있다면, 그에게 고통과 덕들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Ⅴ,2)
달림에 있어서 그토록 빠른 누구도,
활동에 있어서 그토록 강한 누구도,
화살에 있어서 그토록 교활한 누구도,
분노에 있어서 그토록 포악한 누구도,
내가 거처하는 하늘을 파괴하거나 절단 내거나 손상시킬 수 없다.
(Ⅵ,38)
세상 쾌락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되돌아가야만 한다.
(Ⅵ,20)
고통 때문에 받는 방해를 한탄하는 사람은
인식에 있어서 장님이거나
인내를 잃었을 것이다.
그는 Minne가 냉랭해졌고
덕에 있어서 늙었거나,
감각이 둔하거나
좋은 말도 하지 못하는 벙어리일 것이다.
(Ⅵ,14)
오, 슬프다, 이 나이에 나를 질책해야만 하다니,
빛나는 업적은 거의 없고,
유감스럽게도 은총에 대해서는 냉랭하기 때문이다.
무력하기 그지없고, 유년기에는 불타던 하느님 Minne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것은 아주 작은 아픔도 크게 느끼는데, 이는 젊었을 때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쁨 가득한 좋은 늙음은 인내심 있게, 오직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Ⅶ,3)
사람들이 아무리 너를 멸시하고 괴롭히더라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더욱 정화되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될 것이다.
(Ⅶ,17)
Minne의 길
오, 주님, 이것은 이해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것들이 당신 Minne의 유희인데,
그들이 Minne를 자신들 안에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들은 당신으로부터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Ⅰ,44)
신부는 다섯 왕국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눈인데, 그것은 울 수 있는 힘으로 만들어졌고, 극기(자제)로 장식되어 있다. 둘째는 생각인데, 그것은 싸울 힘으로 세워졌고, 좋은 생각들로 꾸며졌다. 셋째는 말인데, 이것은 유용함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충실함으로 장식되어 있다. 넷째는 들음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위로로 장식되어 있다. 다섯째는 감각인데, 그것은 굳셈으로 만들어졌고, 좋은 습관들로 꾸며졌다.
신부는 네 동정녀를 가지고 있다: Minne가 신부를 동반하는데, 그는 순결의 옷을 입고 존엄성의 관을 쓰고 있다. 둘째는 겸손인데, 그는 동정녀를 지탱해 주며, 비천함의 옷을 입고, 승격의 관을 쓰고 있다. 셋째 (동정녀)는 통회인데, 그는 작은 포도송이 옷을 입고, 기쁨의 관을 쓰고 있다. 넷째 동정녀는 자비인데, 그는 향유香油의 옷을 입고, 황홀경의 관을 쓰고 있다. 마지막 둘은 신부의 망토를 들어줄 수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거룩한 소명이다.
(Ⅰ,46)
“우리의 두 Minne로 너는 승격되고, 나의 즐거움의 기적으로 너는 성스럽게 된다.”
(Ⅰ,36)
하느님의 참사랑은 일곱 통로를 가지고 있다:
기뻐하는 사랑은 길을 앞장서고,
두려워하는 사랑은 노고를 짊어지고,
굳건한 사랑은 어떤 영예도 받아들이지 않고,
지혜로운 사랑은 지성을 가지고 있고,
자유로운 사랑은 마음고생 없이 살며,
힘찬 사랑은 항상 지복 안에 산다.
(Ⅱ,11)
위대한 권능을 가진 훌륭한 Minne는
육신은 비록 늙어가지만 영혼은 젊어진다.
정직한 은사에서 나온 사랑 충만한 Minne는
마음의 쓰라린 한탄을 없애 준다.
값비싼 것에서 나온 권세 있는 Minne는
하느님 안에서 가장 감미로운 즐거움을 체험한다.
은밀한 Minne는 거룩한 행위 안에서
선한 의지의 고귀한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
춤추는 물결로 투명해진 Minne는
영혼 안에 감미로운 곤란을 안겨 주며
그는 역시 죽음 없이 죽인다.
권능으로 갑자기 펼쳐지는 Minne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Ⅲ,13)
참으로 순수하신 하느님은 결코 끝나지 않는 네 가지를 가지고 계신다:
첫째, 자라는 갈망,
둘째, 흐르는 아픔,
셋째, 영혼과 육체의 열렬한 지각,
넷째, 주의 깊은 자각을 통한 끊임없는 합일.
(Ⅳ,15)
영혼이 Minne에게 말한다:
“오, 나, 이 불행하고 기진맥진한 개,
나는 절뚝거리며 당신에게 갑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순결한 동정녀들의 무리는 적습니다.”
(Ⅳ,1)
위대한 Minne가 자신의 본성을 이렇게 열어 보인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큰 천상 불로 불타고 있다; 그 안에서 그는 가장 빠르게 흐르며, 그런데도 자신 안에 가장 조용히 머물러 있고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으며, 자신 안에 가장 작은 자로 머물러 있다. 가장 많이 알고 있으나 가장 적게 기억 속에 담아둔다.
오, 가장 복된 Minne여, 당신을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성삼위 안에 완전히 타버려서, 더는 자신 안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복된 이들은 더는 대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너무도 하느님으로 관류되고 둘러싸여 있어서 그들이 자주 유혹으로 시련을 받을수록 더욱 강하게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더욱 오래 여기서 분투하고 사랑할수록 하느님은 더 숭고하게 그들에게 나타나시며, 자기 자신은 더욱 작고 초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왜?
사랑이 거룩할수록, 두려움은 더 크고, 위로가 잦을수록 그 두려움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영혼에게는 겁먹은 두려워함이 아니라, 소상한 방식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Ⅳ,16)
내적으로 크게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는,
외적인 것들이 중지된다.
왜냐하면 모든 외적 활동은
내적 정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Ⅶ,34)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내 자유의 고귀함을 알고 사랑한다면, 그는 나만, 오직 나 때문에만 사랑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피조물 안에서 사랑한다. 그렇게 나는 그의 영혼의 이웃으로 머문다.”
(Ⅵ,4)
사랑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을 감미롭게 만든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기 원한다면, 많은 싸움에 이겨야만 한다.
(Ⅶ,55)
높아지는 갈망,
낮아지는 겸손,
흐르는 Minne,
이 세 가지가 영혼을 하느님 앞으로 데려간다.
(Ⅶ,34)
덕행의 길
완덕의 길을 깨닫고 그 길을 걸어가는 세 가지가 인간을 품위있게 만든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전혀 우월감 없이 온전히 하느님께 종속시키는 것. …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포기함 안에서.
- 죄만 빼놓고는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환영하는 것.
- 모든 것을 똑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것. 그가 하는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하느님께는 대단히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이니, 이는 마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관상 안에 있는 것과 같다.
(Ⅰ,27)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영혼은 자진하여 자만심에 찬 영예 없이 살고자 한다:
존경받기를 원하지 않고,
두려움받기를 원하지 않고,
혼자 있기를 원하고,
침묵하기를 원하고,
낮아지고 싶어하고,
숭고해지기를 원하고,
합일을 원한다.
(Ⅱ,12)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거룩한 관심을 가질 것이며, 그것을 언제나 자신 안에 간직하여 자신을 결함에서 보호할 것이다. 사랑스런 관심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가질 것이며, 그들에게 좋은 의도로 결점을 알려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불필요한 말을 삼가게 될 것이다.
(Ⅱ,26)
그 앞에서는 근심 걱정도 한탄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본성상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Ⅲ,1)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선한 충고 없이 하는 모든 덕행은 쓸모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느님의 선한 결정에 따라 지상에 왔고, 아버지와 모든 사람에게 큰 복종심으로 일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완전히 자유 안에서 승천할 수 있었다.”(Ⅴ,4)
겸손의 네 가지 종류:
첫 번째 겸손은 외적인 복장과 주거에서 드러나는데, 의복은 알맞고 영적으로 제단 되고 바느질된 것이어야 하며 순수해야 한다.
두 번째 겸손은 사회의 풍속(몸가짐)으로서 모든 환경과 모든 것 안에서 친절함이 드러나야 한다.
세 번째 겸손은 심사숙고로서, 사람이 모든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 사랑함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네 번째 겸손은 영혼 안에 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 드러난다.
(Ⅴ,4)
누가 어떤 능률에 있어서 무능하거든,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Ⅶ,17)
누가 덕행으로 방어하면, 그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고, 누가 하느님 안에 굳건히 서 있다면 그는 마음의 모든 근심을 자랑스럽게 극복할 수 있다.
(Ⅴ,29)
우리가 아직도 분노로 휘몰아치는 한,
우리는 자신 안에 어떤 선善도 가지고 있지 않다.
(Ⅶ,3)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분노와 모든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쫓아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은밀한 곳에서의 죄스런 유혹을 자제하고, 외적으로는 거룩하고 즐거운 태연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Ⅶ,3)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선한 의지와 거룩한 갈망으로 너는, 원하는 것 모두를 잘 균형 잡을 수 있다.”
(Ⅶ,6)
아프거든(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공경하여라. 나에게 봉사하고 기쁜 인내로 항상 나를 사랑하여라. 멸시를 받거든 나를 사랑하고 참아 견디어라.
(Ⅵ,14)
진리의 길
멕틸드가 한 환시에 대해 언급한다:
그곳에서 내가 보고 듣고 알게 된 가장 작은 진리는
지상에서 불러 본 가장 높은 어떤 진리에도 비교할 수 없다.
(Ⅲ,1)
어떤 이에게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가 대단히 쉬운 일이다.
거기에 진리가 어긋나 있다면, 그는 뱀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Ⅴ,11)
우리는 이 일곱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
삶 안에서 정의롭고,
곤란 중에 자비롭고,
함께 삶에 충실하고,
남 모르게 도와주고,
곤란과 비참 중에 침묵하고,
진리 안에 충만하고,
거짓말에 적수가 되어라.
이 일곱 가지를 수행해야 하고, 우리 불쌍한 육체의 (죄스런) 방탕과 반항에 대항하고 인간적인 감각의 쾌락과 약함에 대항하여 이를 성취해야 한다.
(Ⅴ,22)
정도에서 벗어남
성령의 굳셈 없는 지혜는
마침내 교만의 산더미가 된다.
성령의 고리(끈) 없는 평화는
쉽사리 광기가 된다.
Minne의 불 없는 겸손은
결국 명백한 허위로 끝난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의 깊이 없는 정의는
곧바로 끔찍한 증오로 변한다.
끝없는 욕망으로 가득한 가난은
자신 안에 죄스런 거만을 품고 있다.
진짜 죄에서 나오는 지독한 두려움은
끔찍스런 불인내를 가져온다.
늑대의 본성에서 행하는 예쁜 거동은
너무도 쉽게 현인들의 자취를 따라 잡는다.
온전히 진심 가득한 성스런 갈망은
노고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싸움 없이 얻은 호화로운 삶은
유용한 것을 위해서 게으르게 만든다.
하느님 은총 없는 주제넘은 덕행은
거만으로 전패全敗할 것이다.
충실한 행위 없는 고결한 서원은
위선이고 악마의 권고이다.
영혼의 진실된 안전과 성령의 충만 없는 신뢰는
결국 영혼을 불행한 죽음으로 데려간다.
하느님께 대한 마음의 연정 없는 인내는 내밀한(숨은) 채무(죄과)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에게 큰 치욕이 되기 때문이다.
겸손의 어머니 없는, 거룩한 두려움의 아버지 없는
Minne는 모든 덕들로부터 버림받는다.
(Ⅲ,14)
자신에게 있는 부적격(쓸모없음)은 대단히 해로운 특성이다.
악습은 어느 장소에서든지 우리를 해롭게 한다.
세속적 탐욕은 우리 안에 있는 좋고 거룩한 하느님 말씀을 섬멸한다.
완고함에서 나오는 추한 불평(언쟁)은 많은 불행한 살인을 저지른다.
마음의 원한은 우리 안에서 성령을 쫓아낸다.
분노에 찬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신뢰를 빼앗아간다.
거짓된 성덕은 오래 갈 수 없고,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원수들에게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하늘나라를 빼앗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곳에서 거룩하게 살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늘 전실前室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Ⅲ,7)
위선은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보여지고,
완덕은 지상의 가장 높은 이들에게서 거부당한다.
(Ⅳ,4)
거짓말은 밖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안으로는 흉측하게 얽혀 있어서,
그의 동료들에게는 사랑스런 환영을 받는다.
진리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쫓rusk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갖가지 조롱을 받는다.
(Ⅳ,4)
허망한 것들의 풍요는 불충한 손님이고,
거룩한 빈곤은 하느님께 고귀한 멍에를 청한다.
허영심은 그들의 손해를 유념하지 않고,
불변성은 온갖 덕이 가득 실려 있다.
어리석음은 자신에게서 편안함을 찾고,
지혜는 묻는 것을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분노는 영혼을 엄청난 암흑 속에 집어넣지만
거룩한 온유는 모든 은총이 확고하다.
교만은 항상 첫째이기를 원하고,
겸손은 모든 피조물에게 봉사하지 않고는 달리 쉴 수 없다.
자만심에 찬 명예는 하느님 앞에 벙어리이고 장님이며,
죄없이 받는 굴욕은 하느님 자녀들을 성화시킨다.
탐욕은 항상 아우성치는 입을 가지고 있으며,
복되게도 한계를 아는 것은 항상 감미로운 근원을 알고 있다.
태만(게으름)은 충분한 이익에도 주의하지 않고,
거룩한 부지런함은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지 않는다.
불충실한 사람은 항상 잘못된 충고를 하고,
완전히 충실한 이는 결코 선행을 놓치지 않는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복수할 수 없고,
불안정한 마음은 항상 평화를 깨려고 한다.
거룩한 예배는 악행을 범할 수 없고,
악의는 어떤 사람에게도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악은 본성상 흉한 근본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은 사랑스런 얼굴과 감미로운 입을 가지고 있다.
숨은 잔인한 행위는 아첨하는 입을 가지고 있고,
개방된 친절은 하느님 보화를 간직하고 있다.
잘못된 관심은 미움과 가깝고,
거룩한 자비는 하느님과 홀로 있기를 원한다.
미움은 끊임없이, 항상 화를 내고,
Minne는 아픔 없이 불타며, 모든 고통 안에 머문다.
악한 질투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미워하고,
순수한 마음은 복됨 안에서 사랑에 찬 즐거움을 즐긴다.
험담은 사람 앞에서는 수치심을 갖게 하지만,
모든 것을 보고 들으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방해받지 않는다.
절망은 하나의 비참한 파산이며,
참 희망은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간직한다.
거짓 위로는 결코 기쁨이 될 수 없고,
진짜 잘못은 그를 우울하게 한다.
(Ⅳ,4)
하느님께서 소수의 사람에게 주신 순수한 단순함이 많은 사람의 비방을 받게 되면, 그는 하느님의 지혜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은사를 잃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불타는 하느님 Minne도 꺼져 버리고 만다.
(Ⅴ,24)
영적인 사람이 작은 죄를 범하는 데 경계하지 않으면,
바른 완덕에 나아가는 데 가장 많은 방해를 받는다.
(Ⅴ,33)
사람이 쓸모 있고 필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낭비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 모두 죽은 것이다.
(Ⅵ,1)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물론 그들은 그럴 듯한 변명을 한다. 그들은 많은 것에 매력을 느끼고, 세상적인 일들을 사랑하면서, 나를 잘 섬기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나보다 자신을 더 섬기는 이들이다. 누가 자신의 편안과 경건함을 위해 한다면 그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 한 것이다.”
(Ⅵ,4)
깨달음을 원하나 적게 사랑하는 이는, 항상 착한 생활의 시작에 머물러 있다
(Ⅶ,43)
하느님의 신적 사랑의 넘치는 풍요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이 끊임없이 흐르고, 어떤 노고도 메마름도 없이 감미로운 강이 되어 흘러서, 우리 작은 그릇을 넘치도록 채워 준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완고함으로 메워 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 그릇은 항상 하느님의 은사로 차고 넘칠 것이다.
(Ⅶ, 55)
하느님의 뜻
아아, 주님, 누가 저를 도와서 모든 길에서 제가 미끄러지더라도 넘어지지는 않게 해 주겠습니까? 두려움이 붙들어 줄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저를 인도해 줄 것입니다.
(Ⅵ,38)
사랑하는 친구여,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분의 뜻을 기뻐하여라.
(Ⅵ,42)
천국에서 가장 큰 기쁨은 하느님의 뜻이다. 만일 불만이 선의가 된다면,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 안으로 신적 기쁨이 찾아들 것이다.
(Ⅵ,42)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위로 받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뜻에 의해 위로 받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순수하지만
우리 뜻은 육적인 것과 섞여 있기 때문이다.
(Ⅶ,34)
주님, 그 많은 해와 날들을,
당신에게 큰 희생 바침 없이 살았나이다.
나의 뜻이 아닌,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더는 내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모든 것 안에서 오직 당신에게만 속하겠습니다.
(Ⅶ,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