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 수도원
구에릭 아빠스
(12세기 시토회 사부)
강론집
기쁨으로 만남을 향해
기쁨 안에서 우리는 기다립니다. 오시는 그분은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입니다. 우리 기쁨은 구원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의식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육신으로 오신 첫 번째 오심과 영광중에 다시 오심 사이에서 주님께서는 그 첫 번째 오심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러 오셨고 각 사람에게 지극히 개인적으로 찾아오시어 그분의 마지막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을 위한 희소식
- 보라, 임금님이 오신다! 일어나라, 구세주께 마중 나가자! 솔로몬은 이렇게 멋지게 표현합니다. “먼데서 온 희소식은 타는 목에 시원한 물과 같습니다.”(잠언 25,25) 구세주의 오심을 전하는 이는 분명히 희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세계의 평화와 화해, 오는 세대에 있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반가와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구나.”(이사 52,7) 저는 분명히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시초부터 지금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성령 안에서 파수꾼들이 줄지어 외칩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오직 한 가지만을 외칩니다. “그분이 오신다. 보라, 그분이 오신다.”(에제 39,8 참조).
당신은 그 사자(使者)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습니까? 기록된 대로 “아주 먼 곳에서”, “산 이들의 땅에서”(시편 26,13). 말하자면 그 거리는 죽은 이들의 땅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습니다(루카 16,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와 예언자자들이 그곳으로부터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육신으로 살고 있으나 영신으로는 그곳으로 들어 높여졌고 후에 이곳에서 전파해야 할 것들을 듣고 보라고 파견된 것입니다. 이런 사자(使者)들은 마른 목을 축여주는 시원한 물과 같고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영혼의 효력 있는 음료 같습니다(시편 41,3 참조). 구세주의 오심과 다른 신비를 예고하는 이 사자(使者)들은 그의 구원의 샘에서 기쁨의 물을 길어 이런 영혼에게 제공합니다(이사 12,3). 그러므로 그는 사자(使者)에게 그들이 이사야 예언자이든지 다른 예언자이든지 엘리사벳이 대답한 말로 응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같은 성령으로 충만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시다니요? 문안의 말씀이 제 귀를 울렸을 때에 제 영혼은 기뻐 뛰놀고, 구세주이신 하느님께로 향한 강한 열정에 불타올랐습니다.”(루카 1,43-44참조).
영적 기쁨으로 기다림
- 형제들이여, 우리는 정말 영의 기쁨 안에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마중 나가야 합니다! 지금 벌써, 아직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분께 인사드려야(salutandus)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분께 최소한 답례를(resalutandus)하고, 야곱에게 구원(salutes)을 베푸신 분께(시 43,5).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salutare)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지.”라고 지혜는 말합니다. 인사에 답례(resalutare)하는 것이 얼마나 덜 부끄러운 일입니까! “오, 내 얼굴의 구원, 그 하느님을!"(시 42,5). 당신의 종들에게 인사하시니 이는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광은 그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저희에게 인사만 전하고 구원을 선물로 주지 않으셨다면 그 인사는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희에게 그것을 베푸셨습니다. 인사로만, 평화의 입맞춤으로만, 평화를 이뤄내는 말씀으로만, 당신의 육화 안에서 저희와 하나 됨을 통해서만 베푸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시어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의 영은 활기찬 기쁨 안에서 일어나, 멀리서 오시는 구세주께 달려가 경배하며 인사합니다. “아, 주님, 구원을 베푸소서. 아, 주님, 번영을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시 117, 25-26; 마태 21,9).
주님의 참된 구원
저희를 구원하러 오시는 당신의 구원! 저희를 축복하러 오시는 당신의 축복! 저희에게 구원을 주소서. 인류를 위해 행복과 구원을 가져오시는 이여!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아가 이루소서!(시 44,5)(뜻이 불분명하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복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희의 구원이신 하느님께서는(시 67,20) “그는 복된 완전함을 성취시킬 것이다. 그가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할 것이다”(이사 55,11)라고 아버지께 말씀하십니다. 육욕으로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 한 것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만 된다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막으려 했던 베드로의 생각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마태 17,22 참조).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는 성공을 거두리라”(시 1,3). 인간을 앞질러 달리는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져다주는 구원이란 헛되며.”(시 107,13). “주님께 구원이 있고”(시편 3,9),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성취시키셨으며, 죄를 속죄하시려고 피를 흘리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음료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구원하여 주시면 저는 구원되리이다”(시 17,14 참조). 오소서, 오시어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 79,4.8.20) “저희는 당신만을 기다렸나이다. 곤경에서 저희를 구해주소서.”(이사 33,2).
열렬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주님을 맞아들임.
예언자들과 의로운 이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으려고 열렬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달려갔습니다. 영적으로 뵙던 분을 이제는 육신의 두 눈으로 직접 뵙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도 여러분이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했습니다.”(루카 10,23 참조) 우리의 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저승에서 그분을 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을 머지않아 뵙게 되리라는 영적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탄일을 기다리지 않은 우리 마음의 게으름과 고집으로 인해 창피와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 그렇습니다, 우리는 큰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성서는 우리 영혼에게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오시는 그리스도께로 기쁨에 넘쳐 서둘러 마중 나가라고 강조합니다. 지금 이미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것이 미루어지고 지연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라고 합입니다.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
위에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 여러 곳에서는 달려가서 첫 번째 오심을 맞이하라고 거듭 상기시킨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당신은 묻습니까. 이렇게, 즉 그분의 두 번째 오심을 몸의 행동과 환호로 달려가 맞이하듯이, 첫 번째 오심 또한 마음의 환호와 사랑 넘치는 행동으로 달려가 맞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부활에서 새로운 육신을 받으면,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져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테살 4,17)
마음을 드높이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땅에 사로잡혀 태만하지 않으면 우리를 공중으로 들어 올릴 구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약 반 시간만이라도!”(묵시 8,1) 나의 생각이 틀림없다면, 이미 여러분은 경험을 통해서 지금 내가 한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름이 소리치며(시편 76,18), 다시 말해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 퍼졌을 때 그들의 소리는 마치 구름소리와 같았으니, 여러분의 염원은 그보다 얼마나 더 높이 치솟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가끔 그보다 더 높이 들어 올려져, 아주 잠깐이나마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2코린 3,18). 여러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주님께서 구름을 통해 보내시는 말씀의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고, 매일 오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찬미로 제사를 드리는 이가 나를 공경하는 사람이니, 내가 하느님의 구원으로 보여줄 길을 그는 취하리라.”(시편 49,23)
더욱 빈번하고 친밀한 방문
주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시기 전에 이미 친밀한 방문으로 먼저 여러분을 찾아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요한 1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과 마지막 오심 사이에 각자의 공덕과 열정에 따라서 우리를 자주 방문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첫 번째 탄생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마지막 오심을 준비시켜주십니다. 지금 그분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오시는 이유는 그분의 첫 번째 오심이 우리 안에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마지막 오심이 우리에 대해 진노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오심을 통해서 우리의 교만을 변화시키시어 첫 번째 오심으로 증명하신 그분의 겸손한 모습과 닮게 하시려는 의도였고,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시어”(필리 3,21), 그분이 두 번째 오실 때 그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오심의 은총이 베푸는 친밀한 방문과 마지막 오심의 약속을 온 갈망으로 고대하고 열정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진리를 사랑하시고 은총과 영광을 베푸십니다.”(시 83,12). 자비로 은총을 베푸시고 진리를 통하여 영광을 주십니다.
신비스런 영적 오심
- 이 영적 오심은 육신의 오심 사이에서, 비슷한 정도로 한정된 시간 안에서 일어납니다. 중재자처럼 양쪽 모두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은 감추어졌고 자기 비하적 이었지만 마지막 오심은 공개적이며 경탄할만할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주님이 오시는 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비밀스럽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칭찬받을 만한 영혼은 찬양하며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나의 비밀은 나의 것, 나의 비밀은 나의 것”(이사 24,16 불가타역)이라고. 주님께서 찾아 들어가시는 그 사람 역시 그분이 차지하시기 전에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은 내 앞을 스쳐 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시건만 알아볼 수 없네.”(욥 9,11)라고. 사람들은 그분이 오셔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떠나셔도 의식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면 영혼과 이성의 빛이 되어주셔서 눈에 보이지 않게 보여지고 알려지지 않게 알아차리게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오심은 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경탄할만한 놀라움입니까! 오, 감미롭고 복된 놀라움! 그분을 깊이 묵상하는 영혼을 들어 올려 온전히 차지하시는 놀라움! 내적 인간의 모든 지체가 그분께 아룁니다. “주님, 누가 당신과 같습니까!”(시 34,10).
이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경험하려고 충분히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불손한 호기심으로 존엄하신 분에게서 황홀경을 맛보려고 덤벼들어서도 안되며, 사랑하는 분을 존경하는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일으키시고 악인들은 땅바닥에까지 낮추시며”(시 146,6), “교만한 자를 업신여기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야고 4,6; 잠언 3,34).
은총 안에서 오심과 그분의 영광
첫 번째 오심이 은총이었다면 마지막 오심은 영광이 될 것이며, 그 둘은 같은 방법으로 은총과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중간에는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가득한 은총을 통하여 어느 정도 미래에 있을 영광의 맛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존엄하신 하느님의 첫 번째 오심이 멸시 받을 존재처럼 보였다면, 마지막 오심은 두려움으로 나타나실 것이고, 중간에 오심은 멋지고 사랑스러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분으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은총의 내려오심은 경멸이 아니라 오히려 경탄에로 이끄시고,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시는 빛 가득한 영광은 자신을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를 가져오시는 분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분의 첫 번째 오심에 대해 유다인은 “우리가 그를 보니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이사 53,2-3.)고 말합니다. 마지막 오심에 대해 성서는 의인들마저도 두려워 떨 것이라고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내랴?”(말라 3,2)고 말합니다.
우리의 변화: 복된 체험과 믿음의 확신
사도는 이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심은 최상의 경탄과 호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합일 안에서 신랑이 신부를 포옹하듯이, 하느님의 영광의 거울 안에서처럼 그를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십니다(1코린 13,12; 2코린 3,18). 그분의 불타는 사랑의 이런 특권을 지금 벌써 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또한 거룩한 단순함 안에서 언젠가는 이와 같은 보상을 받게 되리라고 희망하는 이도 복됩니다. 전자는 이미 그의 노력에 대한 사랑의 위로와 열매를 즐깁니다. 후자는 받아야할 위로가 적었던 만큼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수고한 이들”(마태 20,12)의 훨씬 더 큰 보상이 오고 있음을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런 위대한 경험으로 위로 받지 못하더라도 확실한 믿음과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립시다(야고 5,7). 이런 생각들을 깊이 믿는 마음으로, 바오로와 함께 기쁨에 차서 이야기 합시다. “나는 내가 믿어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이 내가 맡은 것을 그 날까지 지켜주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2티모 2,12),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줍니다.”(티토2,13).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어지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