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작품 선집
지식과 사랑
겸손과 사랑에 대한 작품들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 지식의 빛 안에서 읽혀져야 한다. 두 작품은 서로 병행하며 보완한다. 하나는 지식의 정도와 다른 하나는 사랑의 정도와 관련이 있다. 겸손은 지식 혹은 더 정확하게 세 가지 현실의 진리에 관한 살아있는 깨달음이다. 세 가지 현실이란 첫째, 우리 자신과 우리의 유한성에 관해서이다. 둘째, 타인에 대해서이다. 인간 조건의 불행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거나 우월하다고 느낄 권리가 없다. 셋째, 하느님에 관해서인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진리와 생명의 충만함에로 되돌아가는 길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악에 대한 우리의 경향과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을 고려하는 자아에 대한 진실한 평가인 “자아 경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인 심오한 진리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없이 우리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으며, 이러한 뜻에서 어떤 실존적 진리도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드러내 보이고 가르치고 살아가신 것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상이셨고 모상이시며 우리가 따르고 하나가 되어야 할 모델이다. 그분은 우리를 법과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의 “법”에 복종하셨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의 겸손을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진리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비탄의 무게는 더 이상 우리를 압박하지 못한다. 하느님께 도달함에 대한 확실성은 그분께로의 우리의 상승의 어려움을 덜어준다.” 우리의 애덕은 한계가 없어지며 우리의 원수조차 포옹하게 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이에게 눈에 보이게 자비롭도록 촉구하며 모든 어려움을 받아들이게 한다. 조금씩 열정과 열성이 비참과 고통을 대신한다.
이제 정화되어 마음은 평화를 체험한다. 마음이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다. 즉 마음은 하느님을 봄이 없이 그분을 보게 되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이미 아내가 자신의 남편과 결합되듯이 하느님께 일치되어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가서로부터의 많은 인용문들이 마음에 떠오르는데,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말년을 쏟아 부은 대작에서 이를 충분히 설명한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의 젊은 시절의 업적인 겸손에 대한 작품 안에 이미 배아로 존재한다. 이 책자 역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성령의 해방하는 작업은 우리의 유한성을 넘게 하고,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게 하며,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신 한 분과 일치하게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참된 실현이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인 겸손의 결과로 인간은 자신의 현존에 의미와 방향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이 그의 존재의 이유이며 그는 자신의 소명을 채울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여기서 지니게 된다.
사랑에 대한 책 안에서, 사랑의 정도는 앎의 정도에 상응한다. 이것 역시 숫자 상 셋인데 넷째 것은 천상 영광 안에서 완전한 절대적 사랑을 예외적으로 드물게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타인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육적 조건의 수용과 함께 시작된다. 즉 우리는 몸 안에 그리고 몸과 함께 존재하며 단지 몸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몸이다. 우리는 음식, 옷, 적당한 보살핌과 같은 모든 기본적 필요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 지고 있는 사랑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은 적절하게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몸에 관한 베르나르도의 심오한 낙관주의와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금욕적 수행 주장의 이유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몸의 모든 충동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높은 정도를 습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육적이 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정신이 부여되어있으며 정신은 우리를 타인에게 개방되게 한다.
우리는 먼저 유한성과 잠재적 위대함의 조합이라는 우리 인간 조건이 모든 인간의 공통 운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사회적”이 되어야 하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실의 인정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데 그 사회로부터 받고 그 사회에 공헌해야 하는데, 이 사실은 베르나르도가 종종 자신의 수도승들에게 이야기했던 실제적인 결과를 수반한다. 그는 어떤 공동생활에도 요청되는 “사회적 은총”에 대해 많이 주장한다. 이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나 똑같이 필요한 특성이다. 베르나르도가 그의 나머지 작품들 안에서 형제적 사랑에 관해 말한 모든 것 그리고 그가 이웃에 대한 섬김 안에서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행했던 모든 것은 사랑의 사회적 특성의 실제적 적용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하느님께로 인도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의 모든 수단으로, 자신의 몸 전체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는 것과 몸의 모든 본능적 충동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몸을 파괴하지 않는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몸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된 인간존재로서 그 몸은 영광 안에서 다시 회복될 것이며 영원한 사랑에 무한히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신성의 충만함이 자신 안에 몸으로 머무는 그 사람은 이제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의 빛 안으로 들어간다. 그와 일치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 빛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상 생활 동안 그리고 영원을 통해 몸은 하느님이 영혼에 주신 “동반자”이므로 거기에 합당하게 사랑받아야 한다. “Nec sane dixerim ut vel ipsam odio habeas carnem tuam. Dilige eam tamquam tibi datam in daiutorium.”〔여러분이 자신의 몸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돕도록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런 어떤 것으로 그것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의 결과와 표지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몸은 좋은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베르나르도에게 있어 신약에서 논의되는 “육의 욕망”은 성 바오로가 사용한 의미에 있어서 몸의 현실이 아니라 “육”의 현실이다. 욕망은 죄스런 조건 안에서 존재 전체를 포함한다. 바로 이것이 육욕이 몸 안에서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발견된다고 베르나르도가 말했을 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음이 치유되고, 정화되고, 방향이 새로 잡힐 때 하느님께로 향한 비상 안에서 몸을 취한다. 베르나르도는 인간이 식욕을 통제할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다. 은총의 도움을 통한, 성욕의 현실적인 수용과 성욕의 승화에 대한 그의 믿음은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만 하다. 일단 우리가 베르나르도의 중세 언어의 의미-그 자체로 성서의 유산-를 파악하기만 하면 심리학이 확인해주기는 하나 신학적 관점으로부터는 풀 수 없는 것에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빛을 던지는지 보게 된다.
현대 심리학과 밀접하게 연결해주는 성 베르나르도의 다른 특징은 그가 갈망을 중요시한 것이다. 갈망 안에서 그는 사랑의 형태를 보며, 시간을 넘어 미래에서만 온전히 실현될 하느님과의 일치와 하느님 소유를 지적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갈망”이라는 말에 매우 강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단지 불만족에 대한 느낌이거나 현재의 공허함을 채워줄 것에 대한 감정적 경향이 아니다. 이는 생생하고 긍정적인 현실이다. 하느님은 이 갈망 안에 현존하시며, 다른 모든 갈망들에 의해 야기된 실망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이것을 두신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이미 그분을 소유하는 참된 방식이다. 이는 하느님의 분명한 부재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신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이 부재는 온전한 현존으로 어둠이 빛으로 변모될 것이라는 확고한 희망이다.
베르나르도의 관점 안에 우리 자신을 둠으로써 우리는 사랑의 가장 일상적인 형태로부터 그 가장 숭고한 드러남에로의 사랑의 상승의 원동력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사랑의 최고봉은 드물게, 짧게 그리고 단지 소수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히 그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누구에게나 약속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직접 보는 것으로 변모되기 때문에 갈망은 소유에로 길을 내어준다. 여기서 베르나르도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점진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생활 때부터 우리에게 남기신 모범에 대한 묵상으로 시작하여 “엑스타시”에서 끝을 맺는데, 여기서 사람은 자신 밖으로 옮겨지고, 아주 잠시 동안 자신의 삶이 영광과 일치되며, 그리하여 그의 존재는 영원을 미리 맛보게 된다. 베르나르도는 교회 교부들의 전통적 교의와 이 점에 있어서 온전히 일치하는데, 신비가들의 경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과 함께 일으켜진 이들에게 합당한 복된 선물에 대한 예언자적 선취라는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