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HTHILD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
“ICH TANZE, WENN DU MICH FÜRST”
“당신이 나를 이끌어 주시면, 나 춤추리다.”
Margot Schmidt
마르고트 쉬미트 편역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멕틸드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보증이 될 만한 정보는 아주 적다. 그녀의 생애는 드물게 저서 안에서 자전적으로 말한 것이 거의 전부이고, 그 중에서도 라틴어로 기록한 서문에서 조금 그녀의 어휘를 통해서 추론될 뿐이다. 그녀의 언어는 그녀가 기사와 궁중에서 성장했다는 것, 그녀의 궁정생활에 어울리는 음유시인과 친숙했었다는 것, “죄에 빠지기 쉬운 허영에 도취되게 할 수도 있는”(Ⅲ,21), 그렇지만 신부다운 영혼의 완덕을 성취하게 하는 유리한 점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왜냐하면 “그의 사랑스러움과 그의 하프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Ⅰ,46)라고 표현한 것이 전부다. 황홀경은 하나의 “영혼의 궁중여행”(Ⅰ,4)이며, 하느님께서 그녀를 “궁정용어로 부르시지만, 사람은 이런 요리법을 알지 못한다.” 그분이 그녀와 함께 “연주를 하려고 하시지만, 농부가 쟁기질을 모르듯, 기사가 무술을 하지 못하듯, 그녀의 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Ⅰ,2). 궁정교육이 반영하듯이,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정신의 자립성은 그녀의 신분에서 유래함을 추론해 볼 수 있게 한다.
아주 짧은 암시를 통해 우리는 멕틸드의 생애를 1207-1282로 정할 수 있으며, 많은 연구자들은 1294년까지로 보기도 한다. 한스 노이만(Hans Neumann)에 의하면, 그녀는 미텔마르크(Mittelmark) 서부, 마그데부르크 교구에 있는 기사성의 귀족출신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남자 형제(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발두인(Balduin)이 할레(Halle)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원장이었으며, 뛰어난 학식과 높은 성덕을 갖춘 이로 칭송받았고, 그녀는 그와 서신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Ⅵ,2). 멕틸드 역시 주의 깊은 궁정교육을 받았다. 그렇지만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멕틸드가 세상적인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는 원초적이고 탁월한 내적 경험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장 강한 자전적 색깔을 띈 Ⅳ,2 장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12살 때 내가 혼자 있을 때였다. 성령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극도로 내밀한 이 부르심(말을 걺)은 매일 일어났고, 매일매일 점점 더 강해졌다.” 그 일은 “31년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그래서 세상이 주는 기쁨, 그들의 달콤함과 영예에 어떤 맛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영적 서적을 통해서나, 영적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을 완전히 전적으로 채운 하느님과의 내적 삶에 예속되게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일찍부터 갑자기 일어난 일, 그리고 거듭 반복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은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일은 그녀의 미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같은 장에서 그녀는 “이 저서를 쓰기 시작하기 전, 하느님으로부터 오직 한 마디 말씀이 내 영혼 안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영적 삶 안으로는 결코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아주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 내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서 뿐이었고 그 신앙을 통해서 나의 마음을 순결하게 지니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하느님 자신이 나의 증거자이시다. 내가 의식적으로나마 나에게 이런 것을 달라고 했다든가, 그래서 이 책에 쓰여진 것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하느님 자신이 증명해 주실 것이다. 또한 나 자신을 그런 종류의 일이 뜻밖에 일어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노인이 되었을 때도, 자신의 지식을 하느님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분에 대해 “나의 스승님께서 나같이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에게 이 책을 가르치셨다”(Ⅶ,3)고 말했다. 이로써 그녀는 자신이 학업을 통해서 얻은 지식과 내적 영감으로 받은 지식을 식별할 줄 안다는 것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혹은 성령을 통해서 내적 스승이셨다는 것과 학업을 통해 취득한 지식을 넘어 하느님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저서 “스승(De magistro)”에서 상술하였고, 그 후 더 상세하게는 프란치스칸 신학자 보나벤투라가 상술한 바 있다.
그녀 내면의 하느님이신 스승에 대한 인식은 그녀를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삶을 선택하여 살도록 내몰았다. 그녀는 1230년 경, 23세였을 때, “그들에게 그녀는 늘 사랑스런 사람이었는데도”(Ⅳ,2), 양친과 친지들을 뿌리치고 외지인들인 베긴 공동체에서 베긴으로서 금욕적인 삶을 살며 가난과 보속과 유랑인의 생활을 선택했다.
멕틸드 시대에 마그데부르크는 발전을 추구하는 한 도시였으며, 다른 도시들과 나라들과의 상업을 위한 중심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슬라브 미션의 출발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성당은 969년, 교구에서 증축한 주교좌 성당이며, 그 상위(上位)에는 스타우펜 시대가 시작될 무렵까지 유명한 대주교들이 상주하였다. 그들은 선교사인 동시에 정치인들이었고, 결정적으로 도시 발전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대주교는 그 당시 주교인 동시에 영주였기 때문이다. 마그데부르크 법률은 13세기부터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그데부르크 배심재판부는 법률 문제에서 재심원의 위신을 떨쳤고, 그것은 다른 어떤 제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위상이었다. 1220년에서 1235년 사이에, 레프코우의 아이케(Eike von Repkow)는 당시 마그데부르크와 할버스타트(Halberstadt)에서 유효했던 법을 그의 ‘작센스피겔(Sachsenspiegel)’에 정리했는데, 이것이 후에 마그데부르크 법이 되었다.
거의 40년(1230-1270)간, 일시적으로 자신의 친지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베긴 수도회에서 베긴으로 살았다(Ⅵ,4. 19). 엄한 고행과 우세한 하느님 Minne가 그녀의 힘을 쇠진시켰다고 그녀 자신이 보고한다: “나는 점점 피곤하고 아프고 쇠약해져 갔다. 처음에는 통회와 고통으로 그 후에는 거룩한 갈망과 영적 노고로 인해서, 그리고 이에 겹친 많은 중병과 자연스런 질병에 걸렸다. 또한 Minne가 강력한 힘으로 다가와 나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아 갔고, 나를 온통 놀라움으로 채웠으며, 그로 인해 나는 더는 침묵 지키기를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Ⅳ,2).
그곳에서 머문지 20년이 지날 무렵, 멕틸드는 43세였다. 그녀는 베긴 수녀로서 도미니칸 영적 지도자의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그들은 마그데부르크에 수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1250년경, 그녀의 고백신부, 도미니코회 수도자 할레의 하인리히 (Heinrich von Halle)로부터 그녀 자신의 무아경에서 체험한 합일의 체험과 환시를 공적인 계시의 증거로 직접 자신의 손으로 써 보라는 격려를 받고 쓰기 시작했다. 그 문서들은 할레의 하인리히가 후에 6권의 책으로 집필했다. 멕틸드는 그녀의 저서로 교회의 폐해에 대한 귀찮은 조언자, 성 안에 사는 귀부인들을 지탄하는 소리가 되었기 때문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Ⅳ,17; Ⅴ,34). 특히 상류사회 귀부인들의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 허영과 호사벽을 지탄한 것 외에도, 환시에서 “지옥문 어귀에서” “여인들 중에서도 후작부인들이 그들 영주들처럼 죄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표현한 것과 연루되었다.(Ⅲ,21). 적대, 이것은 어쩌면 마그데부르크 도미니코회 총회에서 베긴주의에 대한 반대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멕틸드에게 노년을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멀지않은 헬프타 시토 수도원에서 지낼 기회가 주어졌다. 1270년, 수도회에서 그녀를 받아들였다. 당시 그 수도원은 두 번째 대원장으로 하케보른의 제르투르다(1250-1291)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여성 교육과 신비문학의 중심이었고, 최고의 전성기에 있었다. 수도원장의 격려로 그곳 수녀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베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빅토린 수도자들의 텍스트를 읽었다. 이런 동아리 안에서 멕틸드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만난다: 하케보른의 젊은 멕틸드와 수도원 학교 학생인 제르투르다였는데, 후에 이 사람들은 그녀를 대 제르투르다라고 불렀다. 이 두 젊은 수녀는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을 통해 많은 격려를 받았고, 이들 역시 유명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헬프타에서 멕틸드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곱 번째 책을 저술하였는데, 실명한 후에는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동료수녀들에게 받아쓰게 했다고 한다(Ⅶ,64). 그 제7권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하느님 사랑의 파급 범위와 그 변화를 삼위일체적으로 전개시켰고, 그녀에게 하신 하느님의 대답 안에서 감각적인 것을 초감각적인 초월의 연속적 과정 안에 집약하였다: “너의 아동기에 너는 내 성령의 동반자였고, 너의 청년기에 너는 내(하느님) 인성의 신부였으며, 노년기인 지금 너는 내 신성의 아내이다.”(Ⅶ,3).
마그데부르크 사람인 그녀의 고백신부 할레의 하인리히는 멕틸드보다 먼저 귀천했다. 그녀는 헬프타 수도원에서 12년을 더 살고, 고령의 나이에 귀천했다. 그녀가 얼마나 깊은 감명을 동료수녀들에게 남겼는지는 그들의 보고에서 잘 드러난다. 멕틸드의 귀천 후, 젊은 수녀 하케보른의 멕틸드는 그녀의 저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 (Ⅱ,41; Ⅴ,3, 6)”에서 그녀에 대해서 썼으며, 환시에서 그녀는 이 마그데부르크의 여인이 다른 어떤 지상의 여인들보다 사랑과 지식의 탁월한 은사와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보았다. 그 여인의 통찰의 은사를 높이 칭송하면서, 마치 “독수리처럼 바로(곧장) 주님의 면전으로 날아드는 것”(Ⅱ,41)을 보았다고 묘사한다. 대 제르투르드는 그녀의 저서 “신적 사랑의 파견자”에 멕틸드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그녀 자신이 하느님께, 그녀가 죽은 후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 증거로 그녀의 적대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영적 은총만을 무덤 위에 내리셨다고 한다. 멕틸드가 죽은 후, 아주 일찍부터 그녀에게는 성성의 광채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헬프타를 넘어 아팔타의 디트리히(Dietrich von Apalta)에게까지 이르렀고, 그가 쓴 도미니코의 전기에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가장 근거 있는 계시(ex verissima revelatione)라고 묘사했다. 그녀가 중앙 독일어로 저술한 원본은 손실되었다. 1344년경 교구사제 뇌드링겐의 하인리히의 주선으로 바젤(Basel)에서 원방언(元方言)을 남독일 알레만 방언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그것들 중 사본 1권을 메딩겐(Medingen) 도미니코 여자 수도회 수녀, 그의 영적 친구 마르가레타 에브너(Margaretha Ebner)에게 보냈다. 거기서부터 그 책은 리스(Ries)의 카이스하임(Kaisheim) 시토 수도회와 뉘른베르크(Nürnberg)의 엥겔탈 도미니코회에 보내졌으며, 그 독서물은 서로 빌려가며 읽혀졌다. 이에 덧붙여 하인리히와 마르가레타와의 오랜 서신왕래에서 주고 받은 많은 언어와 사고에서도 멕틸드의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에서 발췌되어 흘러들었음을 잘 볼 수 있다. 마르가레타 에브너의 “계시”도 멕틸드의 저서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14세기에는 남독일 번역 사본이 아인지델 혹흐탈(Einsiedel Hochtal) 포더렌 아우(Vordern Au)의 수녀원 4곳에 오게 되었다. 우회로를 거쳐서 이 사본은 아인지델 도서관이 소장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텍스트 이동이 보여주듯이 뇌드링겐의 하인리히의 유동성을 통해서, 그의 우정의 은사를 통해서, 한 권의 책이 저지低地독일 언어 영역에서 거리가 먼 작센에 있는 마그데부르크/헬프타를 넘어, 남부 독일 바젤로, 오버쉬바벤-바이어른 영역에서 스위스의 아인지델까지 넘어갔고 또 거기서부터 더욱 전파되었다. 17세기에도 멕틸드는 여전히 새로 발견된 증거에 의해서 지성세계에서 그녀의 예언적 정신을 강조할 만큼 유명해졌다. 멕틸드의 예언은 불꽃이었고 초월적 상태의 상징적 불이 되었으며, 또한 지상 여정에서는 힘과 깨달음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의 밤을 통과할 때 그들을 비추던 창조되지 않은 불을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