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CHTHILD VON MAGDEBURG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
“당신이 나를 이끌어 주시면, 나 춤추리다.”
Margot Schmidt
마르고트 쉬미트 편역
목차 --------------------
본문 텍스트 안내문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1. 기록하라는 명령
하느님의 영광과 책이 가르치는 길들
이 책을 비추는 예언자들
너희가 놀라워하는 것이 나는 놀랍다
2. 영혼은 무엇인가?
나는 품위있게 자유에로 태어났다
하느님 닮음
육체와 영혼의 관계
죄와 하느님 자비
3. 인간의 행복
어떻게 하느님이 영혼을 사랑하시는가
복된 갈망
황홀경
Minne와의 대화
삼위일체의 기적
4. 찬양노래
이렇게 아홉 합창단은 노래한다
한 걸인이 이렇게 말한다
5. 하느님께 가는 길
고통의 길
Minne의 길
덕행의 길
진리의 길
정도에서 벗어남
하느님의 뜻
6. 천사와 악마
찬란한 빛인 천사들
하느님의 권세인 천사들
화려한 천사 옷을 입은 악마
악마와의 논쟁
7. 금언
독수리와 올빼미
Minne 금언- 경이로움
노년의 금언
8. 노동과 활동
너는 노동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기도의 힘
9. 성령
이성과 은총
교회의 힘과 아름다움
교회의 쇠퇴
신속한 전달자인 성인들
본문 텍스트에 관한 안내문
빙겐의 힐데가르드(1098-1179)와 비슷하게, 멕틸드도 “네가 보는 것을 써라, 그리고 네가 들은 것을 말하라”는 번개같이 빛나는 내면의 소리로부터 촉구 받았다. 번개와도 같은 빛과 내면의 소리를 들은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약 1207-1282년경)는 한 세대가 지난 후, 그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하느님의 빛에 압도당했고, 서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힐데가르드와는 반대로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 “하느님과 함께 한 비밀”과 직접 “자신을 알리는 것”은 해서는 안되었다. 그녀의 개인적 체험은 모든 주관적 연관성을 끊어버려야 했고, 원초적 신비체험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과 그분의 “막을 수 없는 은총”, 하느님과의 “숭고한 향유”를 절제 있게 열어 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체험은 하느님 외에 모든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은 밀교의 독서물이 아니라 공적 임무를 띄고 있으며, 그녀가 기록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책으로 가르치기 위해서”였으며, 믿기 어려운 경이로움으로 고백하지만 “하느님은 항상 더 크시고 더 놀랍게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Ⅳ,12)고 썼다.
복된 황홀경과 지상적 현실의 가혹한 충돌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한 편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체험, 다른 한 편에는 불안정과 충격으로 이리저리 찢어지는 상태, 그리고 가릴 수 없이 노출되는 상태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내가 침묵을 지킨다면, 나는 하느님이 두렵고 또한 내가 쓴다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두렵다.”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몰상식한 말과 자유분방한 비판 앞에서 그녀는 기도한다: “결코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읽지 않게 해주십시오.”(Ⅲ,1).
성서 말씀도 그랬듯이, 모든 것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이해받을 때나 이해받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녀의 책도 같은 정신의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더 심하게는 악의를 가진 사람, 경시하는 사람, 말을 곡해하는 사람들과 풍자화가에게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던 체험들, 적어도 세상인심에 대해 충분히 경험했음을 그녀의 기도가 말해 준다: “주님, 저의 책을 거짓말쟁이들의 거짓된 호기심의 눈길에서 지켜주소서. 그들은 지옥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루치퍼의 마음에서 만들어졌고, 종파적인 교만에서 태어났으며 증오로 양육되었기 때문입니다.”(Ⅱ,26). 독자적인 저술가들에게 이보다 더 두려운 박해로 낙인찍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측했던 해악, 몰이해, 적대감과 폭력에도 굽히지 않고 기록하라는 명령에 복종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에 확신을 가졌고, 그녀가 기록할 문서의 의미를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 보인다: “이 책을 나는 이제 모든 종교적인 성직자들에게 보낸다. 나쁜 사람이든지 좋은 사람이든지 둘 모두에게, 왜냐하면 기둥이 무너지면 (교회)건물은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은 기둥의 파괴로 위기에 처해 있다. 성직자들, 그들 중에서도 고위성직자들을 멕틸드가 가끔 노골적으로 “악취를 풍기는 수컷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Ⅵ,3). 이는 하느님께 대한 그녀의 고유한 관계를 창조적 추진력(촉구)을 가지고 유지하려는 것이며, 텅 빈 신앙을 새로운 전체적 관망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을 그의 전체 안에서 사로잡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전체적 열정이 그녀 책의 주제이다. 직접 체험한 황홀경 안에서, 그녀의 신비체험을 통해서 교회 건설과 교회를 굳건하게 하기 위한 사자(使者)로서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책은 그녀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왜? “하느님 자신이 그 말씀을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녀는 서문에서 강조한다. 그래서 책이름도 하느님께서 직접 그녀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그녀가 주님께 “그 책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그것은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서론)이라고 하여라.”는 대답을 받는다. 멕틸드는 하느님의 찬란히 빛나는 광채는 “성령의 힘”이며, 성령의 총체적 진행 안에서 감각과 육체를 침투하는 동시에, 책이 지닌 정신적 유기체적 생명력 안에서, 하느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데 정확한 표현을 쓰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기록동인(紀錄動因)의 전제조건에 관해서 해명할 때도 이와 비슷하게, 영적 방법으로 초감각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듣고 느끼고 보게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녀는 “나는 내 영혼의 눈으로 보지 않고 나의 영원한 정신의 귀로 듣지 않고 그리고 성령의 힘을 내 몸의 지체들 안에서 느끼지 않고서는 쓰고 싶지도 않았고 쓸 수도 없었다.”(Ⅳ13)고 말한다. 하느님이 장본인임을 힘주어 강조함으로써 그녀의 책이 영감을 받아 쓴 것이고 예언적 수준의 것임을 밝힌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나에게, 이 불쌍한 여자에게 그분의 마음과 입에서 나온 것을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셨다.”(Ⅳ,2). 왜 학식 있는 성직자가 아닌 그녀가 하필이면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와 물음에 대해 주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신다: “나에게는 그들이 성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이고, 배우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나의 성령에게서 배워 말한다면 그는 성교회의 영광과 굳셈을 위하여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Ⅱ,26).
멕틸드는 자신의 기록사명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인간 사이에서 매개역할을 하는 도구임을 알아들었으며, 그분의 내면의 소리가 그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나는 빛이고 너의 가슴은 등경이다.”(Ⅲ,12). 그녀를 통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과의 관계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가시화되게 하기 위함이다. 멕틸드가 자주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혹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할 때는, 항상 그리스도,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고는 신비스런 근원과 본질과 함께 삼위일체적 하느님 상에 그리고 하느님이신 사랑 안에,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되시어 계시된 그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백신부, 할레의 하인리히(Heinrich von Halle)는 여섯 번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것을 입증하였다: “이 책은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멕틸드의 마음에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Ⅳ,43). 그녀 자신도 그것을 동시대의 성인들, 예를 들면 튀링겐의 성녀 엘리사벳처럼 “신속한 전달자”와 같은 계열에 두며, “나의 책 역시 전달자”라고 설명한다. 경탄해 마지않았던 장거스하우젠의 유타(Jutta von Sangershausen) 부인이 이방인의 프로이센(약 1260-1264) 쿨름(Kulm) 근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강화를 위해 말씀과 행동으로 전교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직 인쇄술이 발견되기 전이었는데도 그녀의 책은 상상을 뛰어넘는 부수의 복사물로 시공을 초월하여 전세계로 보내졌다. 그녀는 이런 유기체적 매체물의 도움으로 그녀의 목소리와 인식과 사고들이 순식간에 널리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자신이 체험한 기적들이 끊임없이 언어로 표현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영감을 받아 기록한 말씀의 힘에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체험에서 나온 인식과 사고의 힘으로 자신의 무지와 현존하는 쇠퇴와 파괴에 맞섰다.
게다가 시대적 역사의 분위기는 1226년 황금문서가 작성된 시기부터, 프리드리히 황제 Ⅱ세와 함께 기사단장 자이차의 헤르만(Hermann von Saiza)에게 쿨머란드(Kulmerland)를 프로이센의 독일 수도원에 기증한 게 인증되었고, 1231년에는 성직 기사단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프로이센 수도원 토지를 점유하여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 독일 기사단의 많은 영적 저작물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런 활동들은 교황 칙서 “세계 모든 아빠스, 수도원장들과 수도자들”을 촉구하였으며, 바이흐셀(Weichsel) 영역을 “책들과 필기도구”로 사용하여 그 나라 안에 그리스도교 전파를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도 전교명령을 내렸다. 그는 분명히 멕틸드를 그녀의 책과 함께 그 일에 참가시켰을 것이다.
그녀는 전교사명과 함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받는다. “너에게 진실로 말한다. 이 책은 내 심장의 피로 기록한 것이다.”(Ⅴ,34). 이는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에 보낸 서간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열정적인 어투로 진술함으로써 강화시켰다는 여운을 남기는데, 바오로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서간”이라고 말하면서 “잉크로 쓴 것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순교자들이 진리를 위해서 그들 자신의 피로 대가를 치른 것처럼, 멕틸드 역시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기록문서와 함께 하느님의 Minne의 피 흘림 없는 순교로 이를 증거하게 된다. 이는 이미 Minne와 영혼 사이에 이루어진 공적 대화에서 방향이 제시되었다는 여운을 남긴다: “Minne 부인, 당신께서 저를 제압하셔서(이기셔서), 저의 몸은 특별한 병으로 뒤틀리고 말았나이다.” 이에 Minne 부인이 영혼에게 대답했다: “여왕이시여, 그 대가로 나는 당신에게 높은 인식과 깊은 사고를 주었습니다.”(Ⅰ,1).
‘두 흐름의 영역’ 안에서 이 책의 오래된 영감적 의미가 구약과 신약을 넘어 그리스도교 안에서 문학과 예술에 뚜렷한 각인을 남겼다는 것을 멕틸드의 다음 말로 입증할 수 있다. “하느님의 위대한 혀가 나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엄청나게 위력있는 말로 말씀해 주셨다.”(Ⅱ,3).
멕틸드는 이 책을 깊이 숙고하지 않고 읽으면 안되기 때문에 서론에서 이렇게 요구한다: “이 책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아홉 번 읽어야 한다.” 이 말의 숫자적 상징을 감추어둔 것이 그녀 책의 특징이며, 이렇게 아홉은 삼위일체의 흐름 안에서 3의 제곱으로써 모든 신비 가운데서도 신비,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가 아니면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것, 모든 독서기법을 초월하여 유일무이한 독서문화가 요구된다는 신호를 보낸다. 주의 깊은 독서가 아니고서는 이 책이 전하고자하는 그의 비밀과 신비를 그리 쉽게 넘겨 주지 않는다. 오직 반복해서 주의 깊게 읽음으로써만 의미를 알아듣는 길이 열리며, 자기 자신의 판단능력을 통해 하느님 닮음의 의미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완덕과 자립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저서는 단지 정보차원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변화를 위한 촉구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녀의 텍스트들을 낯설게 들리게 하는 중남부 독일어 번역본을 뇌드링겐의 하인리히 사제가 바젤(Basel)에서 남독일어 방언으로 번역함으로써 멕틸드의 책이 끼친 영향과 변화의 힘이 그녀보다 한 세대 후에 입증되었다. 그 후 1345년경, 그 사제는 자신의 영적 친구 마르가레타 에브너(Margaretha Ebner)에게 큰 열정으로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권하면서, 딜링겐(Dillingen) 근교에 있는 메딩겐(Medingen)으로 편지를 보냈다.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이라는 책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 이 책은 내가 독일어로 읽은 도서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내적 감동을 받은 뜻깊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세 번 읽으십시오, 그 책에는 아홉 번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만.” 멕틸드가 그녀의 책에서 9라는 상징적 숫자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근원비밀과 실체비밀에 둠으로써 최상의 높이에까지 다다르듯이, 그녀 이후, 단테도 그의 저서 “신생(Vita nouva)”에서 그의 ‘고귀한 분, 베아트리체’를 자신을 위한 영감의 힘과 최상의 완덕을 의미하는 9라는 숫자로 상징 짓는다. 그녀는 9이며, 그로써 삼위일체와 비슷하다. “만일 3이 그 자체로 원동력이라면, 다시 말해 9의 창조주라면, 본래 3은 기적의 창조주이신 것이며, 삼위시며 하나 즉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다. 이렇게 이 부인(베아트리체)도 9이면서 신비였으며, 그녀의 뿌리가 기적을 행하시는 삼위일체 안에 있을 수 있다.”
멕틸드의 저서는 하느님의 경이로움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이런 강도 높은 주장은 비평가, 질투하는 사람, 적대자들을 부추기기에 충분했고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더욱이 그녀가 자신의 책을, 논박할 수 없는 진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을 지칭하며”(Ⅱ,19), 그것은 “기호(말의 약자)”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녀 자신이 완전히 떨어져 나감을 체험해야만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져 버림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의 “말은 소멸되어야 한다.”(Ⅰ,7).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너의 입은 성령으로 형성되었다”(Ⅱ,18)고 인정해 주셨고, 그로써 그녀는 완전히 그분의 대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멕틸드는 바오로의 서간 1코린 2,4의 말씀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자신의 저서도 성령의 증거와 힘에 의한 것임을 주장하며, “그것은 진리의 입이 한 말”(Ⅴ,21)이라고 한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진리이며, 신적 나눔에서 생겨났고, 두려움과 환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책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사랑으로 가득하다.”(Ⅳ,2). 이런 보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은 불안한 상태에 머문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일에 정말 적합한 사람인지 묻는다. 자신은 그런 저술사명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고 “성서학을 전공한 것도 아님”(Ⅲ,1)을 설명하면서 하느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아이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당신은 도대체 저에게서 무엇을 보셨나요? 당신은 제가 어리석은 사람이고 몸과 마음이 죄스럽고 비천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아십니다. 이런 일들은 저보다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을 통해서 찬양받게 되실 것입니다.”(Ⅳ,2). 자신이 혹시나 그런 저술을 통해서 허영심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더욱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의 직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탄한다: “나는 그 말씀을 강요받았으니 써야만 한다, 침묵을 지키고 싶지만. 나는 허황된 명예욕의 숨은 낌새를 너무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너무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Ⅴ,32). 훨씬 나이가 든 후, 그녀가 쓴 저서들 역시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의 명령의 요구에 의한 것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이 말을 하고 또 말을 해야만 하다니, 너무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하느님 앞에서 순명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적인 부끄러움과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나는 내 생애 동안 지고 가야만 한다.”(Ⅶ,8). 그녀는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성의 오명을 거두어 가고 자신의 저서를 정당화할 근거를 영원의 차원에까지 끌어 올린다.
실제로 그녀의 책은 자료(문헌) 연구자들이 짜증스러워하리만큼 그녀 자신의 전기에 대한 언급은 아주 간헐적이었고, 산재된 것뿐이었다. 볼프강 모어(Wolfgang Mohr)가 잘 관찰했듯이, 그녀가 하고자 한 일은 그녀의 이력서를 빈틈없이 작성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끔 자신의 전기에서 문맥의 가닥이 빠진 것은 항상 하느님 사랑(Gottesminne)의 “그보다 더 높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Ⅵ,31), 기막힌 강세에 압도되었을 때이며, 그것에 비하면 그녀의 삶의 역사는 아주 보잘것없이 작기 때문에 그렇게 어둠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자신의 신적 출생을 묘사한다: “당신은 나를 당신 신성의 책에 기록해 두셨습니다.”(Ⅲ,2).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책에서 나온 통찰력으로 쓴 것입니다.”(Ⅲ,24). “그 안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이 책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대 영역과 구약성서에서 다니엘의 심판 환시(다니 7,12; 12,1)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상상이다. 생명의 책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신약성서는 자주 언급한다(필립 4,3; 묵시 3,5; 17,8). “영원한 책에서 나온 지식”에서 멕틸드는 하느님께서 창조주로서, 구원자로서 당신 자신을 뜻밖에도 그녀에게 계시하셨다는 것과 중세 예술을 묘사하고자 했다. 하느님의 찬란한 창조의 “영원한 책”은 그녀에게 어떤 사명을 계시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부인, 영혼이여, 당신은 내 안에서 너무도 나와 한 본성이 되어 있어(본성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소. 어떤 천사도 결코 이토록 높여진 적이 없소. 단 한 시간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 당신에게는 영원으로부터 준비되어 있었소.”(Ⅰ,44). 하느님이 인간과의 합일을 약속하신다는 것은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복됨을 선취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본래적 인척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본성상 나의 아버지시며, 그분의 인성에 따라 나의 형제시며, 사랑에 따라 나의 신랑이시다. 혈통(출신)상 인간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안에 등록된 삼위일체적 닮음을 지니고 있다. 멕틸드는 동시에 이렇게 입증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자연본성에 알맞게 살게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런 본성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서 하느님께로 가야 한다. … 내가 이 본성(자연)을 느끼지 않는다고 착각하신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다: 불로 태우실 수도, 기분 좋게 식혀 주실 수도 있으시다.”(Ⅰ,44). 멕틸드가 자주 묘사한 신랑신부 관계에서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신 성령의 영적 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데, 이것은 세기를 거쳐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를 이미지화한 “아가서” 해설의 영향을 받아서라기보다, 이런 사랑관계가 독점과 극복과 관계의 친밀함을 가장 알기 쉽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멕틸드는 같은 맥락 안에서 하느님과의 합일의 과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하느님은 영혼에게 그 힘들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 “본성상 네 안에 살아 있는 힘은 너를 영원히 자극할 것이다. 이것은 너의 고귀한 갈망이며 너의 다함없는 열망이다. 그것을 나는 나의 무한한 낭비로 영원히 채워 줄 것이다.” … 그에 이어 복된 고요가 찾아오고 그것은 그들 양쪽 의지에서 일어난다. 그분은 자신을 그녀에게 주고 그녀는 자신을 그분에게 드린다. “이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녀만이 알 수 있으며, 이로써 그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은밀한 곳에서 두 연인이 함께 있게 되면, 그들은 자주 작별 없이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복된 고요 안에서의 충만은 시간을 중지시킨 영원이며, 스쳐 지나가는 영속성의 한 찰라에 불과하다. 그녀는 체험으로 알아 듣는다: “신적 사랑의 지복이 절정에 이르러 아름다울 때, 그것을 놓아야 한다.”(Ⅰ,2). 멕틸드는 순수한 초지상적인 그리움 안에서 신적 황홀경에로 들어 높여짐과 제한된 피조물 특유의 존재성 안으로 되돌아옴 사이에서 자신의 삶의 드라마를 체험했고, 그것은 그리움의 열망과 자신을 봉헌함과 포기와 의지력의 전적인 투신, “산 채로 죽어 있음”(Ⅰ,2)에 내던져지는 상태에까지 이르는 죽음의 단말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높이 들어 올려질 때, “성령의 달콤한 숨결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영원한 태양 안에서 숭고한 Minne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Ⅲ,11). 그녀 영혼의 감각으로 그녀는 초월적(선험적) 영역을 감지했고, 그것을 열정적인 이미지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으며, 지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서 그 내재성과 초월성의 접합점을 찾아내려고 고역을 치르면서 이렇게 외친다: “주님, 저는 제 영혼에게서 심장을 도려내고 싶습니다, 당신을 그 안에 모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 영혼 안에 무한히 있을 수만 있다면, 나에게 그보다 더한 진통제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Ⅲ,2). 특히 주목할 만한 방법으로 멕틸드는 하느님 자신 안에 그녀의 갈망을 이동시킨다: “내가 나의 귀한 신분 때문에 위로를 받아야 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하느님의 숨결이 나를 그분 안으로 빨아들이셨으면 좋겠다. …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충만하다, 단지 영혼과의 친교만큼은 결코 그분께서 만족하실 만큼 드릴 수 없다”(Ⅳ,2). 왜냐하면 그분은 “그리움으로 불타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며”(Ⅰ,17), “그녀를 사모하는 사랑병(상사병)을 앓고 계시기 때문이다”(Ⅲ,2). 하느님께서 그녀를 차지하시면, 그녀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춤추는 태양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에게는 “하느님 한 분 외에 그 어떤 것도 무미건조하다.”(Ⅳ,2).
멕틸드는 이런 독점과 하늘로 치솟는 움직임 안에서 하느님께로 침투해 들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묘사할 때, 춤추는 이미지로 포착한다. 그녀는 선택받은 이들의 “모방하는 춤(따라서 춤추기)”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통상적인 보통 사랑을 넘어, 신랑과 똑같아지려고 온 힘을 다 쏟는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헌신적 사랑 안에서의 철저한 그리스도 추종이 자기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외친다: “당신이 나를 이끌어 주시면, 나 춤추리다. 내가 너무 날뛰거든 당신이 앞서 노래를 불러 주소서.”(Ⅰ,44). 춤을 청하는 신적 초대의 이미지 안에서 밝혀지는 것은, 은총 없이 신적 춤, 뛰어오름의 움직임, 즉 지상적인 모든 것을 신적 사랑의 초자연적인 것에로 이동시키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모든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는” 체험과 인식을 통해서 존재의 예측 불가능한 오름의 단계를 한 단계 한 단계 오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랑 안에서 솟아오를 수 있으며(날뛰다), 사랑에서 인식에로, 인식에서 향유로, 모든 인간적인 감각을 뛰어넘는 향유에로 솟아오를 수 있게 된다.”(Ⅰ,44).
춤은 신체적인 움직임의 리듬이며 동작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창조적 원칙으로 우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춤은 균형 잡힌 조화 안에서 일어난다. 필로(Philo)는 이렇게 별들의 비밀(신비)에 대해서 말한다: “별들은 진정 신적 춤을 춘다. 항상 창조(출산)하시는 아버지께서 우주 안에 지시하신 질서를 그들은 저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그리스도인들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서 은밀한 춤을 춤으로써 춤에 성스러움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게 하느님과 인간과의 합일을 표현하려고 했다. 구약성서에도 그런 모델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윗은 계약궤 앞에서 춤을 추었고(2열왕 6), 많은 시편 구절은 윤무의 의미에 근거하여 기도자가 하느님께 찬미 드릴 때, “합창” 혹은 “환호”하라고 촉구하면서 그렇게 했다. 중세기 역시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토두넨지스(Honorius Augustodunensis) (12세기)는 말한다: “시편 기도자의 합창(Chor)이라는 이름은 ‘춤추며 노래함(Chorea canentium)’에서 유래하며, 거기서 춤 합창단이 나왔다.” 그리스도께서 춤 합창단 지휘자로서, 복된 이들을 천상 아버지 앞에서 춤에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교적 모티프이며, 이것은 플라톤(Platon)과 플로틴(Plotin) 그리고 고대 중세에도 존재했다. 멕틸드는 이 모티프를 독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 그녀는 언어가 포착하지 못하는 신비적 현실의 더 큰 진리를 몸 전체를 이용하여 환희의 상태를 리듬과 춤으로라도 나누어 주려는 데 변함이 없다. 그녀의 춤 기적의 비범한 실제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을 뒤로하게 하며, “모든 인간적 감각들을 초월하며”, 이 불가사이 안에서 더-높은-윤무 안에서 항상 그보다-더-초월해감을 지향했다. “나는 그곳에 머물기 원하고, 그보다 더 높이 춤을 추리라.” 줄기차게 윤무하는 춤의 움직임의 이미지는 하느님과 하나됨의 강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려는 것 외에 또한 인간의 정신이 결코 하느님 본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의 불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무한계, 동시에 한계는 내적 활력으로 충만 된 춤의 이미지로 영혼이 점점 더 높이 오름의 표시이며, 영혼과 하느님과의 일치(unio)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것과는 달리 한계를 뛰어넘는 상태 묘사는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경건함을 자칭하는 사람들의 밀담(귓속말)을 들 수 있다: “그런 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그것들은 상상해낸 장난이겠지. 허위 성덕에서 나온 것이다.” 등등. 멕틸드는 바르고 냉철하게 이런 종류의 거짓 성인들, 말하자면 하느님 자녀라는 자들을 비판한다. 그들이 영적 어둠에 싸여 있다고 보았고, 대담하고 정확하게 그 특성을 묘사한다: “그들은 소들이 어두운 외양간에서 서로 좌충우돌하는 것과 같다. 소들은 풀이나 뜯어 먹어야지.”(Ⅱ,19). 이토록 심한 기형畸形과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한 인간들에게 무엇을 명쾌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사랑의 헛된 노고일 뿐, 마치 어떤 사람이 황제의 빛을 어둡고 허물어져가는 헛간에 두는 것과도 같다.”(Ⅱ,9).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틸드는 그녀의 능숙한 상황판단으로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대해 경고를 받았고, 사람들은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그것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식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Ⅱ,26)고 썼다. 여기서 그녀는 아마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는 책들의 운명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녀의 책이 화형선고와 존경 사이에 놓이게 된 것이다. 책을 불태우는 오래된 풍조는 사람들의 이념을 이런 방법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그 근거를 둔 것 같다. 이미 구약성서 예레미야 36, 22-24에 이에 대한 것을 기록했다. 그 후, 사도행전 19장 19절에 보면 바오로의 지시에 의해 첫 번째 분서焚書가 행해졌고, 이렇게 교회는 교회역사 안에서 책에 대한 이중적 관계를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높은 도서문화를 발전시킨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구원의 적대자들의 책이라고 해서 소멸시키기까지 한 불신의 행위를 보여 주었다. 이런 상황이 멕틸드의 저술 안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하느님과 내적 대화를 나눈 후,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그녀는 위협하는 말들에 맞선다. 그녀는 흐르는 물을 역행하며 진리의 요청에 담대하고 강하게 대응한다. 환시에서 하느님 자신이 “그 책을 오른손에 들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이미지는, 4세기부터 중세까지 자주 대형미술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림으로서, 예를 들면 석관石棺 미술에: 그리스도는 천상 스승이시며, 왕으로서 두루마리나 책을 오른손에 들고 계신다. 열려 있는 책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의미하며, 로고스(Logos) 신적 말씀의 위엄을 묘사하는 통치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술이 입증하듯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 새 계명, 복음으로 계시하시는 존엄성을 묘사한 후광과 같은 것이다. 이 환시를 근거로 그녀는 계속해서 논거를 제시한다. 이미 서론에서 9라는 숫자의 상징을 통해서 그녀의 책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향력 안에 두었고, 그렇게 책의 물리적인 객관성(구체성)의 영적 의미를 강화시켰다.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는 그녀의 저술 의무는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예속되지 않음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누가 나의 손에서 이 책을 빼앗아 가려면, 나보다 강해야 한다. 이 책은 성삼위의 책이다.”(Ⅱ,26). 그 후 책의 신성神性에 대한 해석이 따른다. 문자로 기록된 내용을 싸고 있는 양피지는 하느님 아들의 “순수하고 희고 의로운 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글자들이 양피지에 쓰여지는 것처럼 인간적인 자연을 재형성시킨 기념물로 하느님 닮은 모습을 써놓은 것이다. ‘말(언어)’은 물리적 언어테두리를 넘어서 그의 깊은 영적 의미인 ‘놀라운 신성’을 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말의 울림(소리)’은 살아계신 성령을 계시하며, 이는 ‘참 진리’를 밝혀 주는데, 그녀의 저서가 가장 완벽하게 그것을 표현해 준다. 로베르트 쿠르치우스(Robert Curtius)에 의하면, 책을 인간화하거나 인격화하는 묘사는 중세에 자주 있었다. 그 예로 피타고라스는 12세기에 책이 인간화된 사람이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의 대표자로 불렸다. 멕틸드는 이보다 더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교의에 대한 충실성과, 그녀의 내적 체험과 책과의 생존관계에서 그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신적 지혜의 상징이었다. 저서와 책 도구들을 삼위일체에 비교하는 멕틸드에게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나 첼라노의 토마스(Thomas von Celano)가 문자가 적혀 있는 양피지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이교도들의 저서에서 떨어진 조각이라도 땅에서 주웠다는 이야기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제자 한 사람이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의 아들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이름을 글자로 적지 않느냐.”
멕틸드가 그토록 가장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 성스럽게 생각한 그 책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역사 안에서 그 구원을, 그리고 그의 인성을 넘어 하느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제시하는 “말씀의 목소리(말의 울림)”는 문자에 고정시킴을 넘어서, 그것을 통해서 활동하시는 신적 창시자를, 좀 좁은 의미에서 성령을 가리키고 있다. 진리의 “거울”로서 기록된 그녀의 말은 결코 완전히 퍼 올릴 수 없는 영감에 의해서만 해석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녀의 책은 복음에 가까운 것이다. 그녀가 책을 쓰기 위해 충분한 은총을 청하는 다음 기도에서 그것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천상의 책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것들은 금으로 된 활자로 쓰여진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하느님 눈앞에 펼쳐져 있으며, 영속적으로 상기시키려고 말라키서 3장 1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비망록에 쓰여져 있다.” 이런 상상은 중세를 지배했고, 예술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 내용의 숭고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그 연출을 간결한 진술로 끝맺는다: “자유로운 사랑(Minne)은 언제나 인간에게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Ⅱ,26). 왜냐하면 사랑에 대해 가르치신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유이시며,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하고, 나에게 욕망이 일어날 때 너에게 오리라.”(Ⅱ,25)고 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런 뜻을 알고 채워 드리려는 것, 그렇다, 두 의지가 완전히 융화되기까지의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자유의 원칙이다. 대담한 독수리의 자유를 가지기 전에 멕틸드는 대항하는 의식적인 싸움에서 자기 자신을 철야기도, 단식, 청빈, 양심성찰, 통회, 고백성사와 ‘살아 있는 죽음’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래서 후에, 그녀는 이런 체험들을 의미 깊은 잠언(격언)으로 함축시킬 수 있었고, 그 짧고 현실적이며 비유적 표현은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도와주었다. “독수리가 그토록 높이 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올빼미에게 감사할 리 없다.”(Ⅵ,2). 그녀의 예리한 눈빛은 하느님 Minne의 불을 통해서 예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 사랑의 불에 사로잡힌 포로, “그녀에게 사람이 가르칠 것은 아무 것도 없다.”(Ⅰ,28). 그녀는 전존재로서 불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말도,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강한 불 속에서, 살아 있는 불꽃에 의해서.” 그렇게, 그것은 그녀 책이 결코 소멸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감동적인 이미지이다. 그 철저함이나 감동적인 면은 유대인들의 전통이 전해 주는 한 경건한 랍비 이야기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겠다. 로마인들은 활자공경(성서공경?)을 이유로 그 랍비를 양피지 두루마리에 말아서 횃불처럼 불을 질렀다. 죽어가는 그에게 제자들이 물었다: “스승님, 무엇이 보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종이가 타고, 활자(글자)들이 공중에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멕틸드는 이런 이미지로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신부”에 걸맞게, 모든 중상모략에 대항할 반론의 어마어마한 상징을 찾아냈고, “그녀의 생각은 싸움을 위한 힘을 만들었고, 선한 의견으로 장식되었다.”(Ⅰ,46)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일이 없으려면 명민한 이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 베르나르도 역시 이전에 “아가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말씀의 신부는 어리석어서는 안된다.” 그녀 역시 우주적-구원역사 영역에서도 상징들을 내세웠는데, 그녀의 책이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것을 구약 성경의 다섯 예언자들을 불러들여 주장한다. 이렇게 이용한 참고들은 단지 지시된 원천의 일부분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의식을 명민하게 해 주는 데 이바지한다. 그것은 체험된 것, 고통을 참아 견딘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전통이며, 멕틸드는 자신을 다만 그 고리들 중 하나의 고리로 보았다: “모세는 황홀경의 주요 증인이었으며, 모세의 ‘상징’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달로 선택된 것은 바로 그의 하느님을 뵈옴에 대한 ‘감미로운 가르침’이었다. 다윗은 시편에서 찬미 찬양의 상징으로 ‘신부는 찬미가로 장식되었다’(Ⅰ,46)고 노래하였고, 멕틸드는 그녀의 황홀경 안에서 찬미 찬양이 모든 고통을 압도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가서’에서 ‘신부는 도취되었다’고 말했으며, 예레미야는 그녀가 본 이들 중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대표자, 다니엘은 증거자로서, 하느님께서 많은 원수들 한복판에 있는 영혼과 육신을 먹이시는 기적의 증인이었다(Ⅲ,20). 이런 사건들은 그녀를 놀라게 했고, 최상의 복됨에서 시작해서 강한 사랑 서원의 망치로 못 박히는 고통스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전(全)창조에로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Ⅲ,10).
그녀의 고백신부 할레의 하인리히(Heinrich von Halle)가 그녀가 말하는 것과 저서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자, 그에 대해 같은 역사신학적 태도를 취한다. 그녀의 “신적 스승”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그에게 물어보아라, 사도들이 성령강림 후 그들의 큰 좌절에서 어떻게 그토록 담대해질 수 있었는지를? 또 물어보아라, 다니엘이 어렸을 적에 어떻게 말했는지?(Ⅴ,12), 루핀(Ruppin) 강사가 역사신학적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여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지 물어보아라.” 극심한 시련 중에도 그녀 자신은 하느님과 그녀와의 역사를 기억 속에 확고히 간직하고 있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오는 괴로움 속에 있을 때, 그것이 그녀를 “난폭하게 호통칠 때” 그리고 그녀를 “거대한 암흑으로 휘감을 때”도, 그녀는 충실과 불변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Ⅰ,44에서 그녀는 신비적 진술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내적 싸움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때 하늘로부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아라, 너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을 때 무엇을 느꼈고 보았는지를! 그때 아드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아라, 너의 몸이 어떻게 나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었는지를!’ 그리고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각해 보아라, 네가 무엇을 썼는지!’”(Ⅳ,12). 그녀의 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등대이며, 그녀 자신을 행동규범으로 내어주어서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사람들이 그것을 뼈대처럼 붙잡을 수 있게 해야 했다.
멕틸드는 모든 감각에서부터 시작해서 중복되는 여러 방식을 통해 책의 생명력을 의식하고 있었고, 정신은 텍스트 집필의 포괄적 연관성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의 길을 갔으며, 지식과 교육을 중재하는 가치로 인식하고 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에, 교육 수준이 높은 여자 시토 수도회 헬프타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그녀의 마지막 책 제7권을 쓰라는 요청을 받자, 그들의 높은 학식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지시받은 요청을 겸손하게 거절하였다: “여러분은 저에게 가르침 받기를 원하시지만, 제 자신 너무도 무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들은 여러분의 책들에서 천 배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Ⅶ,21). 우리는 그녀의 이런 소견에서 13세기 여자수도원 도서문화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신앙의 깊이는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고, 영적-정신적 구조는 끊임없는 영적 영양분으로 양육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견실한 학식을 쌓음은 신앙을 깊여 가는데도 이득이 된다는 생각과 자세를 전제로 한다. 주의 깊은 관심, 지구력, 인내, 금욕, 집중력, 기억력, 평정, 모든 자기수행은 깊은 내적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
마음과 정신의 수양을 위해서 도서문화를 존중함은, 책이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서로를 존중하고 분별 있는 태도의 토양이 되기 때문이며, 타락에로 유인하는 책은 악마의 매혹적인 속임수로 알고 피하는 것과 일치한다. 비판적인 눈을 가진 그녀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말을 구별할 줄 알았고, 그녀가 일시적으로 미사성제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유혹을 받은 그 경과를 환영처럼 이렇게 묘사하였다: “지옥의 주인이 나를 넘어뜨리려 한다. 악마가 태양처럼 찬란히 빛났고 천사 같았는데 손에 빛나는 책을 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거룩한 물품을 받아라.” “ 영감이 가득한 지혜로 그녀가 대답했다: ‘너 자신이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다.’”(Ⅱ,24).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거나 아무리 천사같은 언어로 말할지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멕틸드는 여러 환시와 대화에서 악마를 주제로 다룬다. 지금 여기서 벌어진 논쟁은 결국 선한 힘과 악한 힘에 관한 문제인데, 그녀는 논쟁에서 악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내가 항상 원했듯이 지금도 나는 내 자리를 하느님 옆자리에 두기를 원한다.”(Ⅴ,29). 그녀는 그의 오만한 태도와 그로 인한 권력의 미심쩍음을 지적하였고, 자신이 옳게 이해하고 있는 통치는 결코 이기적인 권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권력으로 이해했다. 이는 찬탈한 권력은 위엄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적(영적) 논쟁에서 말은 무기이며, 말로 싸운다. 이 싸움을 위해 멕틸드는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전구를 구하며, 그의 도움으로 말싸움에 나선다(Ⅱ,24).
논박하는 말싸움은 또한 멕틸드의 영혼과 악마가 나눈 대화이다. 그녀는 “거짓말쟁이들은 악마의 종자들이며, 내가 행하는 선한 일을 가능한 한 왜곡시키고 명예를 손상시키려 한다.”(Ⅳ,2)며 이에 대항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명예는 곧 하느님의 영예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곳에서 민감하게 영적 교만이 치고 들어오고, 유혹자가 격렬한 충동을 일으켜 유혹할 틈을 노린다: “네가 높은 의미로 받았으니 그 은총을 과시해 보라”고 부추긴다. 왜 사람은 이런 권력에 대해 한번쯤 악과의 싸움을 즐겨볼 수 없을까? 왜냐하면 권력은 여기서도 쉽게 귄력 도취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주의에 어울리게 멕틸드는 겸손을 다해 반격을 가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아주 작아지지 못해서, 내 모든 원수들의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하늘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구름까지 닿는다 해도, 내 마음은 원수들에게서 완전히 안전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다.”(Ⅶ,7). 엄청난 하느님 두려움, 겸손 그리고 인간본성의 한계를 인식함 앞에서는 악마조차 그 세력을 잃고 만다. 천사와 악마에 대한 멕틸드의 극적 쟁론은 허위적 하느님 닮음의 악마적 표리부동을 꿰뚫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혹시키려는 권력의 표시로 악마의 “빛나는 책” 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런 표리부동을 없애려는 의도에서 단호함을 절찬한 것이다. 루카 복음 10장 18절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주님의 말씀은 멕틸드와 악마와의 대화, 악마의 환시의 표제로 나타난 것 같다. 이 텍스트가 인간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바는, 악의 모든 위장을 없애 버리라는 것이다. 인간이 방심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주 이 위장수단들을 알아 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멕틸드는 자신의 환시나 내적 체험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악마의 속임수는 아닌지 예리하게 관찰한다. “단순한 영혼아, 경계하라!”(Ⅱ,19)고 자신에게 경고한다. 하느님과 사탄, 선과 악의 싸움은 세계문학을 관통하고 있다. 멕틸드는 이 문제에 대해 하느님과 가까이함으로써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악마의 실존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어져 왔는데,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저서에서 그것을 읽어 볼 수 있다. 그의 소설 “유리알 유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탄과 악마를 알지 못하고 그들과의 끊임없는 싸움 없이 고귀하고 숭고한 삶이란 없다.” 이 이야기야말로 멕틸드가 묘사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세의 종말론적인 동요에서 멕틸드는 그 시대 말경, 그녀가 존경하는 설교 수도회(도미니코회)의 새로운 형태를 환시로 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예비지식을 위한 “두 권의 책”이 있다고 강조한다. “큰 책”은 그리스도 신앙의 교의가 설교의 기초가 되어야 하며 이들은 옛 스승들의 설교를 신앙의 전문 분야에 따라 정리하여 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책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멕틸드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자기 무지에 대해 거듭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놀라운 영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작은 책”은 매일의 시간경을 위한 성무일도이다(Ⅳ,27). 명시적으로 이런 예비지식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영적 성장이 이런 자료(매체물) 없이, 즉 책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동시대의 소견을 담은 “스승들”의 텍스트들을 재수용하며, 전통과 연대하지 않고는 “오늘날의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차르터스의 베르나르드(Bernard von Charters)가 그의 시대를, 옛 것과 현대 것의 관계 안에서 난쟁이같은 한 소년이 거인의 어깨에 앉으니 더 멀리 더 잘 보이더라는 유명한 비유를 들어 12세기, 요한네스 살리스베리(Johannes Salisbury)는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노인들이 해 놓은 일을 몰라라 하고, 또 그들보다 나아지려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멕틸드는, 유효한 가치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책을 커다란 기회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성령께서 행하신 쇄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영감이 그녀 저서 전체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계로 눈을 돌릴 때와 반대명제의 판단 안에서 그들의 요구를 피할 수 없었을 때, 알아듣기 쉽고 운율에 맞게 지은 격언을 영적 권고로 쓰거나, 교회 개혁을 위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외쳤다: “외투가 낡았다면, 춥기도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새 외투로 교회를 감싸 주어야겠다.”(Ⅵ,21). 그녀는 그 시대의 악을 핵심적인 언어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나는 두 가지를 무한히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세상이 그토록 하느님을 잊어버렸다는 것, 둘째는 성직자들이 그토록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급격한 붕괴가 발생하는 것이다.”(Ⅳ,16). 성직자들과 교회의 삶에 대해 그녀가 처절하게 한탄한 공개적 발언은 그녀에게 곤경을 가져다 주었다. 친구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뒤에서 그녀를 돌로 쳤으며” “그런 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그녀가 알지 못하게 도망쳤다.”(Ⅱ,24). “수없이 악의의 잔을 마셔야만 했다.”(Ⅱ,24).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했던 것을 그녀는 이렇게 보고 한다: “악의의 잔이 얼마나 악랄했던지 나의 영혼과 목숨을 그대로 꿰뚫는 것 같았다.”(Ⅱ,24). 분명히 그것은 일시적이나마 그녀를 미사성제와 다른 성사에서 제외시킨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는 적대자가 아닌,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성직자들을 친구로 두고 있었다. 특히 마그데부르크에는 그녀가 높이 존경하는 새로 임명된 수석사제 도빈의 디트리히(Dietrich von Dobin)가 있었다. 지극히 존경하는 마그데부르크의 이 수석사제는 자신이 개혁을 위한 주교참사회 의장으로서 새 직무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며 그녀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그녀는 그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Ⅵ,2,3).
시간이 지나면서 극심한 적대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사람들이 존경스런 조언자로 멕틸드를 찾았다는 사실은 그녀가 고령이 된 후에 기록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와 이야기할 수 없었다면, 내 책을 읽으시오.”(Ⅵ,1). 여기서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영적 자주성을 표명하고, 그녀의 서술에 무게를 더해 주며, 입으로 전하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설교의 성격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면 그녀가 설교한 것은 무엇인가? 그녀의 깨어 있는 정신의 전체 역량은 다양하고 간결한 격언과 잠언적인 격언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어디든지 지식과 지혜와 Minne가 합일을 이루는 곳에서는 신의 선택이 열매를 맺는다.”(Ⅴ,28).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선택한 것에 대해 다음의 말로 묘사한다: “이 책은 Minne 안에서 시작했고, Minne 안에서 끝맺었다.”(Ⅳ,28). 이로써 R.쿠르치우스는 그의 명제가 그녀에게서 입증되었으며, 중세에는 그녀의 책에 관한 두 세계가 서로 교차했다고 말한다: 지식과 신앙, 상징과 문법. 타고난 시적 재능의 달변과 경쾌함, 그리고 하느님께 미쳐버린 사람의 어휘력 안에서 멕틸드는 많은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그것이 경건한 서정시-찬송가와 찬미의 표현이거나, 교의를 객관적 형태의 다양성 안에서 말하거나, 깊은 성찰 안에서, 극적인 형태의 대화 안에서, 환시와 비유 안에서, 역설과 함께 부분적으로 엄격하게 구성된 비교언어학과 반대명제적인 문장 안에서, 수사학적 문체를 정확하게 사용하면서 말한다. 전체 형태의 이런 다양성은 긴장 넘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본성을 폭파시켜 버리려고 위협하고 극단적인 혼합의 현실, 형언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체험의 강도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것들을 멕틸드는 “자기 교육”(Ⅴ,11)으로 습득하였다.
저서의 회고록에서 멕틸드는 그녀의 은총체험의 총계를 이렇게 분류하였다: “이 책에 묘사된 은총은 주님께서 나에게 세 가지 방식으로 주신 것이다. 처음에는 큰 감미로움으로, 그 후에는 깊은 내적 신뢰로, 지금은 큰 고통으로 주셨다.” 우선 고통을 받을 능력이 사랑의 힘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인데, 먼저 감미로움을 통해서, 그 후, 인식의 충만함을 통해서, 세 번째로 버림받기를 갈망하는 열망을 통해서이다.”(Ⅵ,20). 마치 바오로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철저한 그리스도 추종을 원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 9,3)라고 말했듯이, 사랑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봉헌, 사랑의 철저함 안에서 자신의 모든 쾌락으로부터의 자유, 최상의 정화만을 추구하며,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만을 구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적 자세와 하느님을 맛봄의 대단한 체험에서 멕틸드는 하느님의 지복을 거절하며 말한다: “아이고, 사랑하는 주님, 제발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당신의 감미로움을 저에게서 거두시고, 오직 당신의 낯설음 안에 저를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느님의 낯설음을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Ⅳ,12). 하느님의 밤 속에서 그녀가 넘어지고 함몰되기까지,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를, 또 그리되어야 한다면 “루치퍼의 꼬리까지”(Ⅴ,4)라고 청한다. 그래서 사랑의 불 옆에 지옥의 고통이 함께 있어서 그녀의 영혼과 육신의 고통이 되었고, “그리하여 싸움에로 향하자마자 그녀의 몸은 땀으로 젖었다.”(Ⅳ,12). 그러자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멕틸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분의 낯설음을 그분 자신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겨지게 처리해 주셨다.”고 보고한다. 그녀는 하느님의 밤을 “복된 하느님의 낯설음”(Ⅳ,12)의 상태라고 칭송한다. 모든 고통이 감미로움으로 변화된 근거는 그녀에게 흔들림 없는 신뢰를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여 말한다: “주님, 순수한 겸손 깊은 곳에서는 제가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 없습니다. 제가 깊이 침투해 들어갈수록 더욱더 저는 감미롭게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Ⅳ,12).
이 보고는 독자에게 극한까지 맛본 삶의 차원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실제의 폭과 밀도 깊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고로 심도 있는 높이와 깊이를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멕틸드는 언어의 한계성을 거듭거듭 상기시켰으며, 단지 짧은 이미지 언어로 암호화하여 말하기까지 하는데, 예를 들면 “내 영혼의 입천장에서는 쓸개가 꿀로 변한다. 그런 일이 나에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나는 도무지 말로 묘사할 용기가 없다”고 말한다든가 하는 것인데, 아무튼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탁월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랑의 힘이 삶의 쓰라린 괴로움을 감미롭게 녹아 버리게 하는 것을 그녀에게서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지칠 줄 모르는 순직한 용사라고 “악의 없는 비둘기”(Ⅰ,11)라고 칭송하신다.
유일한 지식의 가능성, 유일한 신적 지식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영혼, 아직 Minne 앞에서 한 번도 놀란 적이 없는 그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서 아직 한번도 사랑스럽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니, 이럴 수가, 유감스럽구나! 그런 사람에게는 이 삶이 깊은 밤이겠구나”(Ⅲ,24). 멕틸드는 지력으로 아는 지식과 나란히, 아니 그에 앞서 신적 황홀과 두려움에서 오는 내적 체험에서 얻은 지식을 앞세운다. 하느님을 앎, 신학과 그리스도교 교의만이 아니라 그녀에게 항상 살아있는 대답과도 같고, 지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광채를 통해서 일어나는”(I. F. 괘레스) 것에 대해 말한다. 이렇게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선택하게 되고,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구체화하려고 한다. 이런 선택은 뇌를 통해서나 원칙만 따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으며, 마음의 자유와 힘에 의해서, “말을 걸어옴”을 통한 경이로움을 체험함으로써 일어난다. 멕틸드가 12살부터 31년 동안 “신적 인사”를 받았고, 하느님 사랑의 우세함을 체험한 그 놀라움을 하느님과 자신과의 역사歷史로 이해했으며, 그것으로 그녀의 저서를 합법화했고 권한을 부여하였다. 탁월한 언어구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멕틸드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감미로운 마음의 소리, 그것을 나는 숨겨두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의 손으로도 그것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Ⅱ,25). 인간적 언어의 한계로 전할 수 없을 뿐더러 모든 지상적 한계를 초월하는 신비적 체험지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숙고에 앞서 본질적인 지식을 보여준다. 한편에는 이런 한계와 제한적(상대적) 의미, 다른 한편에는 초월적 현실의 실제를 두고 멕틸드는 자신이 본 천상 환시를 재현해 보이려 할 때, 이미지로 자신의 무능함을 비교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이만큼밖에 나눌 수 없다고, 이것은 마치 “한 마리 벌이 꿀통에서 발에 묻은 것만큼밖에 꿀을 가져갈 수 없는 것과 같다.”(Ⅲ,1). Minne의 일곱 단계의 길을 설명할 때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생각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섯째 단계는 내가 그것을 부를 수 있는 용기조차 나지 않았고,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상에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일곱째 단계는 사람이 말로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황홀하게, 갈망하시며, 사랑에 가득하시고, 열광적으로 깊게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오시는지를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느껴 볼 수 있을 뿐이다.”(Ⅵ,24). 그 강도가 더욱 강해져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쓰고 싶지만 그것을 할 수 없다. 황홀감, 영광, 흠숭, 친밀감과 진리는 그 크기가 나를 뛰어넘어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더는 말할 수 없다”(Ⅵ,41). 자신을 이 제압에서 구제하기 위해 멕틸드는 여기서도 대담한 어법을 취하여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얼마나 더 오래 너는 불쌍한 개의 허울을 쓰고 여전히 짖어대려느냐? 너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가장 사랑스런 것에 대해서 너는 침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Ⅶ,1). 만일 그녀가 “살아계신 존엄의 거대한 불 속에서 살아 있는 불꽃으로 타고 있었다면”(Ⅰ,28) 그리고 마치 복된 이들이 “하느님 위엄을 반영하고”(Ⅳ,41) 있는 것을 보았다면, 어찌 또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신비 체험들은 꾸밈없는 하느님 열정으로 보여진다. 불일치의 압도적인 체험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의 이름을 “존엄”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관계를 이렇게 표현한 이름은, 후 세대 스페인 신비주의 안에서 성녀 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선호한 하느님 이름이 되었다. 현대에 유행하는 “파트너”를 하느님과 연관시키는 것은 이런 체험 증거에는 이치에 어긋난 것이며, 더욱이 모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파트너”는 어쨌든지 차원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나 여기서는 정확히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신비주의 안에서 체험을 통해 확증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에서 멕틸드는 우리에게 사랑의 천재처럼 두드러져 보인다. 그녀의 탁월성은 개시 대화에서 사랑으로 하여금 영혼을 여왕님이라고 지칭하게 한다. 여왕으로서의 태도를 갖춘 영혼은 삶과 죽음 사이의 싸움을 이끌며, 그 안에서 깊은 감정과 마음의 모든 힘을 이성의 집중력과 함께, 강한 의지력과 선한 의견의 은사와 연결시켜서 그녀의 사랑의 힘으로 미로(mâze)에 들어가라고 강요한다. 평범하지 않은 내적 체험들을 그녀는 자신을 뛰어넘어 인간을 위한 쇄신 계획으로, 개방의 의미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신적 영감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상으로 이끌어 간다. 이 계획을 일단 계명 아래 둔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인지력을 주시면, 우리는 그 탈렌트를 사용해야만 한다.”(Ⅳ,20). 그녀의 쇄신 프로그램은 쇠퇴를 의식함과 진보의식이 병존함에서 야기된 것이며, 역사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류의 기억은 하느님의 기억 안에 보관되어 있다: “하느님의 기억과 사랑하는 영혼은, 마치 태양이 공기와 함께 어우러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함께 한다. … 감미롭게 골고루 스며들어 섞이고, 그렇게 태양은 공기의 냉기와 어둠을 물리친다.”(Ⅶ,55).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건네시는 말씀의 뜻을 더욱 활기차게 하는 것이며, 그것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저술 노고에서 신비를 신부와 예언자적인 것과 연관지었다. 멕틸드는 거기서도 은총을 받는 데 대한 오만이 전혀 없었고, 헬프타에서도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 나를 가르치셨다. 그분은 그 일을 내가 더는 잘 할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잘 할 수 있게 해 주셨다.”(Ⅶ,3).
그녀에게서는 언어의 풍부함과 주제의 충만함에서 두 개의 화법이 특별히 두드러진다. 하나는 황홀경에 깃든 관상적 영혼의 무아-신비적 상태묘사에 있어 친밀함과 치밀한 묘사를 통해 하느님과 영혼 사이에 일어난 생생한 교환을 펼쳐 보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힘찬 예언적 말씀이다. 이것은 그녀의 시대상황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깊은 내적 명상과 무아경 안에서 전개되는 동시에 말씀과 저술 사이에서 비범한 용감성을 가지고 현실주의의 놀라운 감각과 담대함과 익살까지 포함하여 추진력 있게 발전시켜 간 것이다. 멕틸드는 신비가들이 참된 현실주의자라는 명제를 증명해 보인다. 왜? 초월적이고 신적인 실제를 체험함으로써 그들 안에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식별하고 그래서 사소한 것에 매이거나 빗나가게 하는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W. 프레거의 진술에 의하면 멕틸드는 “하나의 큰 개성화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써 자신의 체험의 초감각적인 경과를 형태와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완벽하고 생생하게 묘사할 줄 알았고, 그 힘으로 다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면전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타락을 눈앞에 전개시켰다. 그녀에게 책은 하느님께서 그녀를 뛰어넘어 말씀을 건네시는 매개체였다.
현대의 다양하고 피상적인 매개체인 라디오나 TV에 비하면 멕틸드의 저서는 “신적 도서”로서 특허 받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 책은 빛을 잃지 않는 매개체이며 그 이상으로 그를 통한 체험은 사멸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의 붕괴 과정을 막아 주고, 물질과 언어와 문자들의 덧없음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저서는 불가항력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빌라도의 말을 상기시키는 형태를 띄고 있다.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요한 19,22). 신적 계명과 같은 의미를 가진 이 계명의 성격은 모든 자유재량과 개인의 자유와는 반대되는 것이며, 그보다는 영원한 존속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써 마치 욥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영원 안에 남기려고 글로 새겨놓기를 원했던 것과 비슷하다.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두기를” 바라며,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욥 19,23-24)하고 바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멕틸드는 스스로 자신에게 맹세한다: “그의 기초가 나인 만큼, 탑첨(탑의 뾰족한 끝)도 나임을 고수한다.”(Ⅵ,38). 이 이미지 안에는 그녀 존재의 전체가 실질적으로 담겨 있으며, 그녀 자신이 등대가 되어 시간을 초월하여 신적 Minne의 빛을 비추려는 것처럼 보인다.
멕틸드의 관점에 비춰 보면, 그녀 이전의 빙겐의 힐데가르드와 그녀 이후의 단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본성은 살아 있는 영원한 빛이며, 세상만사를 지탱하는 그분의 불꽃을 보내는 것이었다. 인간의 대답은 “신적 불에서 다시 태워지는 것”이며, “결코 꺼지지 않는 것”(Ⅶ,29)이라고 한다. 열렬한 마음으로 불타는 이 관계는 계속해서 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뜨거워질수록 더욱더 불꽃이 일어날 것이고 타면 탈수록 더욱더 찬란히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Ⅰ,22). 이것으로 멕틸드는 자신과 사랑이 인격화된 형태로써 합일을 이룬 화신임을 설명하고 관상의 강함이 스스로 신적 우세를 굴복시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단지 “냉랭한 영혼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위대하신 하느님을 작은 마음속으로 끌어들이고, 배고픈 영혼을 충만함이신 하느님께로 몰아가기 때문이다.”(Ⅴ,13).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의 저서 “신비, 1928년 512페이지”에서 멕틸드가 그녀의 신비적 사랑의 독특한 친밀감을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보다 훨씬 전에 이미 상세하고 힘차고 정열적인 방법으로 묘사했고, 그 사랑은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어 영원을 생각하게 하고, 모든 외적 무기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고통 받는 사랑과 무아적 충실의 학원을 통해서 강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도 합당하게 그는 멕틸드를 ‘태양같은 성녀’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