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타의 성녀 제르트루드
GERTRUD VON HELFTA
신적 사랑의 파견자
GESANDTER DER GÖTTLICHEN LIEBE
솔렘 베네딕도 수도원 출판
요한네스 바이스브로트 역
헬프타(Helfta) 수도원의 역사
1229년, 만스펠드의 부르크하르트(Graf Burkhardt von Mansfeld) 백작이 독일 시토회 창립에 힘입어 그의 성채 가까이에 한 수도원을 창설했다. 1234년에, 아이스레벤(Eisleben) 서북쪽에 있는 로더스도르프(Rodersdorf)로 이전했다가 다시 1258년 헬프타로 이주하였다. 혼란스런 지역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하케보른의 제르트루드 대원장의 통치하에 13세기를 넘어서 그 유명한 헬프타의 제르트루드와 하케보른의 멕틸드 같은 독일 여성 신비가들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헬프타 수도원은 1545년 완전히 세속의 소유가 되었으며 1999년부터 다시 여자 시토회가 이 수도원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헬프타 수도원 추진회”에서 요셉 호헨아우어(Josef Hochenauer) 주임신부를 중심으로 추진되어 출판된 것이다.
들어가는 말
제르트루드의 생애와 약력
그리스도교 역사 연보에는 제르트루드라는 고대 독일 이름을 가진 다양한 여성들이 거룩한 명성과 신심깊은 공경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헬프타의 성녀 제르트루드가 가장 뛰어나서, 후세에 그녀의 이름 앞에는 명예로움의 상징으로 대(大)자를 붙였다.
여성들 가운데 신적 증거에서 가장 용감하고 성성이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생각해 볼 때, 적잖은 놀라움을 가지게 된다. 이토록 성녀 대 제르트루드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다.
그녀의 양친의 이름과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고,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장소도 미지이다. 그러나 생일은 1256년 1월 6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날은 다시 받아들인 주님공현대축일, 이 축일에는 고대 전례를 통해서 빛과 알렐루야가 주제가 되는 특별한 축일이었고, 우리의 알트포더른(Altvodern)에서는 별의 날로 경축하였다. 고대 이방인들에게도 이 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는데, 해가 점점 짧아지는 계절의 일부가 끝나고, 새로운 빛의 승리를 노래하며 해가 길어지는 날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하는 날로 경축하였다. 이토록 관계성이 충분한 축일로써 하느님의 놀라운 빛 안으로 이방인들이 초대됨을 경축하고, 인간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구세주께서 가나에서 첫 기적을 일으키셨고,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심오한 은총의 혼인을 맺으셨고,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영혼 안에서 이뤄지는 은총의 혼인을 성사시킨 날이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인 영혼의 삶 안에 토대를 형성한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나 특별한 것들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제르트루드의 생애의 후반부, 수 년 안에서 알 수 있듯이, 제르트루드는 세례 날, 마치 생의 지정별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하며, 전례적인 세례시기와 세례성사 갱신 예식에서 첫 번째 심오하고 위대한 “영적 수행”에 자신을 바쳤다.
주님의 공현과 제르트루드의 존재와 사명은 의미깊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온화한 별처럼 성녀는 우리 나라 위로, 가장 사랑스런 분 가운데 한 분으로 독일 민족 위에 떠올랐다. 제르트루드의 숨은 독방에서 새로운 빛, 새로운 따뜻함과 힘, 새로운 위로가 그녀 주변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멀리 떨어진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펴져나갔다. 거의 모든 것, 그녀에게 일어난 것들과 그녀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일어난 것들은 거룩한 전례와 함께 가장 내적인 관계 안에서 형성된 것들이다.
5살이 되었을 때, 제르트루드는 작센(Sachsen)지방, 아이스레벤에 있는 헬프타 수도원 학교에 들어왔다.
헬프타(Helfta) 혹은 옛 문서의 문체에 따라 헬페데(Helpede)는 당시 아직은 아주 젊은 창립 공동체였다. 만스펠드의 부르크하르트 백작과 그의 부인 엘리사벳이 1229년, 그들의 성곽 근교에 여자 수도원을 창설하였다. 그 수도 공동체는 할버스타트(Halberstadt)에 있는 시토 여자 수도회의 어린 가지였고,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랐다. 5년 후, 큰 불황으로 인해 수녀들은 만스펠드 성에서 가까운 로더스도르프로 쫓겨났는데, 여기서도 그들은 1258년에, 물 부족 때문에 다시 헬페데로 이주해야만 했다.
헬페데는 그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비옥하고 낮은 계곡,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그곳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녀들은 좋은 터전을 찾아 수도원을 세우고, 연못이 있는 정원에 울타리를 두르게 되었다. 계곡을 따라서 완만한 언덕과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헬페데는 사계절의 매력적인 변화와 함께 베네딕도적 서원인 정주의 삶을 후원해 주었고, 창조주를 장엄하게 찬미드리는 데 활기를 주었다. “파견자”는 우리에게 제르트루드가 주위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자연을 감지하는 능력은 게르만 민족의 심성과 함께 그리고 옛 고대 수도승들과도 절대적으로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르트루드는 이런 우아한 장소 헬페데에서 탁월한 스승과 모범을 발견했다. 재능이 대단히 뛰어나고 교육시키기 쉬운 이 아이는 수도원 식구들 안에서 자라나면서 그 구성원이 되었고 그들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 수도원의 상급 장상으로 1251년부터 1292년 퇴임까지, 하케보른 귀족 출신인 기품 있고 모성적인 아빠티사 제르트루드가 통치했다. 그는 높은 학식을 겸비한 장상으로서 공동체를 양성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제르트루드는 아빠티사와 구별짓기 위해서 젊은 제르트루드로 불리었는데, 그녀의 진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학업에 열중했고, 격렬하다 할 만큼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예능에는 성과가 적었다. 그들 수녀들을 위한 과목에는 특별히 중요한 라틴어와 음악이 있었다. 제르트루드가 작성한 “영적 수련”에서 드러낸 충만함과 재능은, 유명한 베네딕도회 선배 간더스하임의 흐로취타(Hrotsuita von Gandersheim)를 상기시킬 만큼 칭송을 받기에 합당했다. 성 보니파시오 때부터 그를 따라 육지로 건너온 학식 있는 앵글로잭슨 수녀들을 통해서 수도원 안팎에 독일 여성들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라틴어 시편과 다른 교회서적에 대한 지식 역시 평신도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는 전례의 통상적인 이해에도 크게 조력하였다.
수 년이 지난 후, 제르트루드는 예능과목에서 돌아섰고, 순 영성적인(종교적인) 학문 연구에 전념했는데,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나치게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문법과 세계 문학을 신학으로 바꿨다.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놀라운 꿈을 꾼 예로니모나 클뤼니의 오도와도 같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내적 성장의 새롭고 더 높은 열망에서 생성한 것이었다. 그녀는 전에 전공한 것들을 그대로 넘겨받아 정화된 품위, 질서와 정도正度의 감각으로 숙련된 표현력을 길러갔다. 제르트루드는 자신의 저술에 특징을 부여하여, 다른 비슷한 신비서적들에 다양한 무게를 주었다. 그녀는 성서와 교부학,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그리고 그 당시 스승들인 성 베르나르도와 같은 계열의 스승, 파리에 있는 성 빅토르 후고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완전히 몰입했다.
이 학문적 연구에 이어 천상적인 영감과 환시가 따른다. 1281년 1월 27일,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성녀 제르트루드에게 발현하셨다. 이것이 탁월한 신비적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런 일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끊이지 않는 고통이 내세(천국)와의 교제를 그림자처럼 동반했다. 지상적인 인연들은 점점 눈에 보이게 느슨해졌고, 삶은 지속적으로 완전히 내세에서나 얻을 수 있고 보유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으로 가까워졌다. 그것은 천상적 상태를 부분적으로 선취하여 살게 해주었다.
헬프타에서 제르트루드는 이런 은총과 함께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엄청난 이례적인 물음들이 닥쳐올 때면, 언젠가 그녀의 음악 선생님이었던,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비슷한 체험을 한 하케보른의 멕틸드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 후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가 함께 하게 되었다. 전에 그녀는 할레(Halle)에서 설교수도회로서 사목활동을 한 도미니코 수도회가 통치하던 베긴(Beghine)에 소속되어 있었고,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헬프타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경계 없이 흐르는 빛”을 저술한 마그데부르크의 멕틸드는 1285년에 귀천했다. 아빠티사의 여동생 멕틸드는 “특별한 은총의 책”을 저술했고, 1299년 11월 19일에 귀천하였다. 이 책이 라틴어로 저술되는 과정에서 성녀 제르트루드가 많은 부분을 함께 하였음이 눈에 띈다. 이 세 명의 수녀들, 두 멕틸드와 제르투르드를 통해서 헬프타는 그 역사 안에서 정점을 이뤘고, 13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서 신비의 은총을 받은 여자 수도원으로 명성을 떨쳤다.
제르트루드의 신비적 생활은 전 생애 동안 편안함을 주는 단순함, 고요와 균형, 강인함과 온유함이 그 기초가 되었다. 그녀의 사고력과 의지력은 지속적으로 완덕을 추구하게 했고, 자신의 불충분함에 대한 느낌은 정진하려는 영혼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보속의 정신은 그의 불로 불인내와 허영심을 녹여 버렸다. 겸손과 개방성과 인내와 포용력 있는 사랑은 제르트루드에게서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그녀는 영혼의 완덕을 목말라 했고, 받은 은총을 자신만만하게 즐기거나 결코 나태해지지 않았다. 땅이 그녀를 지탱해 줄 가치조차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개인적인 명예나 보상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본보기 역할을 할 뿐이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인간의 유익만을 충만하게 채우셨는지, 가장 비천한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는지를 배우고, 모든 것에 자비를 베푸시는 구세주의 신인적 성심의 파견자의 임무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서 그녀의 인간을 위한 존경심과 순수하고 강한 사랑, 달콤한 부드러움, 깊은 애정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는 가장 숭고한 관상과 함께 고통 받는 동물에 대한 동정심도 가지고 있었다. 제르트루드의 내적 삶에서 드러나는 윤곽을 통합해보면, 그것은 ‟파견자”의 첫 번째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거룩한 복음의 완전한 빛 속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 볼 수 있다.
정신력이 뛰어나고 생기발랄하고 강한 의지력을 가진 성녀는 규칙 72장에서 요구하는 선한 의지에 합당하게 살았다. 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 거울을 통해서 살았던 것이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거기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이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제르트루드가 귀천한 해와 날짜는 모른다. 알려진 것은 다만 1302년 초겨울,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는 곳에서 축일전례를 지내고 있을 때 마지막 천상 파견자가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하늘의 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는데, 그들은 제르트루드를 초대하며 노래를 불렀다: 오소서, 오소서, 여왕이여, 천상 환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베네딕도 축일 성무일도의 두 번째 마니피캇 후렴).
제르트루드는 자기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무덤과 유골은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없다. 저술된 서적과 더불어 그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퍼졌다. 그녀의 저서는 세계 교회의 언어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영역도 빠르게 넓어져갔다. 16세기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부터 그 누구보다도 유명한 퀠른의 카르투시오 회원 란스페르크(Lansperg)의 노력 덕분에 외국에까지 “파견자”가 전파되면서 제르트루드에 대한 공경도 확산되었는데, 특히 스페인에서 그러했다. 성녀 대 데레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그녀가 독일 헬프타의 이 거룩한 동정녀들을 진정으로 공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77년부터 제르트루드의 이름이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었다. 서양 중세 교회와 전례의 영웅서사집과 재속사제 성무일도에서는 성녀의 축일을 11월 15일에, 베네딕도 성무일도에서는 11월 17일에 지냈는데, 거의 성 마우루스, 성녀 스콜라스티카와 성 대 그레고리오와 같은 수준으로 경축하였다.
제르트루드의 생애는 거의 50년간, 서방의 암흑시대 안에서 지나갔다. 1100년에서 1300년 동안은 중세의 번성기로서 교황권을 확고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시대의 여명에는 성 그레고리오 Ⅶ세 켄터버리의 안셀름(1109년 귀천), 교회가 속박에서 자유를 얻으려는 막강한 싸움을 위해 모인 단체들의 힘이 분출되었고 정신적 목적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그 후에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153년 귀천)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뛰어난 지도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그는 수도승들의 수도공동체와 신비주의의 쇄신에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베르나르도에게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아가 설교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님과 영혼의 개인적이고 살아 있는 교제를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이 방향에서 제르트루드 역시 모든 곳에 시토 수도회가 뿌리 내리도록 전심하였다. 교황 인노첸스 Ⅲ세(1198-1216) 통치 아래 위대한 시대가 고도에 오르게 되었다. 십자군을 통해서 새로운 활성화가 외국으로 충만하게 흘러 들어갔다. 지평은 다양한 곳으로 확장되어 갔다. 새로운 큰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종교적 사상과 삶이 평민들 안에서도 진기한 도약을 이루었다. 많은 빛이 있는가 하면 깊은 심층에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국가적 견해 충돌, 교황과 황제의 통치사상과 통치욕구 사이에 격심한 투쟁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넓게 파문을 일으키며 분열되어 갔다. 이런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들은 신앙심과 신비주의에서 도움을 찾았다. 1245년경, 황제 프리드리히 Ⅱ세 하에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家는 대 전쟁으로 인해 제국이 패망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황제 없는 비참한 시대”가 왔고, 국가 질서와 안녕이 무너졌으며, 그로 인한 구름 낀 종말의 긴 그림자가 평화로운 헬프타의 마리아 수도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파견자”의 증거에 따르면, 시대의 어려움, 나라의 슬픈 상황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 집에서는 경건함과 따뜻한 연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영적 영역에서는 석양같은 패망의 어둠과는 달리 굉장한 빛이 있었다. 동시대의 성인들, 학자들로서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치스칸 신비의 대표자 성 보나벤투라, 성 대 알베르토,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톨드, 로저 바코, 단테를 찾아볼 수 있다.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이런 신학은, 동시대의 독일 여자 수도회, 특히 여자 도미니코 수도회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13세기 말경에는 많은 여자 수도 공동체의 사목을 남자 도미니코회에 맡겼는데, 이들은 학식을 겸비하였고, 양성 받고 입증된 설교 수도회 수사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설교법과 신학적 박식함과 수도원적 신비가 결합되었던 것이다. 헬프타 역시 도미니코회 수사들의 봉사를 받았다. 그들의 가르침이 성녀 제르트루드의 “파견자” 덕분에 탁월하게 입증 되었다(참고: H. Denifle, 독일 신비주의와 초기 설교법, 중세의 문학과 교회사를 위한 문서실 Ⅱ(1886년) 641-643).
“신적 사랑의 파견자”
제르트루드는 많은 글을 썼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저술하는 것이 그녀가 선호했던 사랑의 행위였다. 그녀는 그 위에서 잠을 잤고 쉴 수 있었다. 그렇다, 관상의 기쁨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다. 신심 서적 부족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우선 그것을 해주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길고 넓게 묘사한 것을 그녀는 간단히 쉽고 명료하게 요약해 주어서, 귀중한 영적 보화를 널리 쉽게 유통시킬 줄 알았다. 제르트루드의 저서는 영혼의 열정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정신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영적인 자비의 저술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특히 “파견자” 제1권 4장 참고).
제르트루드의 저서 중 우리에게 보존되어 있는 “영적 수행”이 유일한 기도서인데, 보이론(Beuron) 수도회 창립자이며 첫 아빠스였던 마우루스 볼터(Maurus Wolter)가 그것을 신심 깊고 듣기 좋게 번역해서 서문과 함께 독일 국민에게 선물하였다. 이 기도서는 그의 깊이, 권위와 고결한 마음, 전례적인 구조와 형태에서 볼 때, 전례서를 제외하고는 그것과 비견할 어떤 책도 찾아볼 수 없다 하겠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신적 사랑의 파견자”이다. 이 책 전부가 동일한 방식으로 성녀 제르트루드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5권 중 둘째 권은 성녀가 자필로 썼는데, 1289년 성 목요일부터 잦은 일시적 중단을 거쳐 오면서 완성된 것이고 셋째, 넷째, 다섯째 권은 후에 성녀가 준 것을 기록하여 편집, 출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첫째 권의 전체 부분은 제르트루드가 귀천한 후에 첨부된 것이다. 말하자면 첫째 권은 제르트루드 자신의 영혼을 묘사한 영혼의 자화상이다. 저술가가 아니라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녀 자신이 첫째 권의 창작자인 것이다. 보편적으로 이것은 “파견자”를 이해하기에 가장 쉽고 최고로 아름다운 부분에 속한다.
“파견자”는 다양한 세기를 거쳐 왔으며,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이론의 여지없이 영성 저서들 가운데서 첫째 순위에 든다. 그 특징은 금욕에 관한 학습서나 교리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비 신학 서적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생명 넘치는 숭고한 삶과 경건한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생각과 명령을 전달하는 것 외에 행동, 성장, 인간의 고통과 동시에 만나게 된다.
“파견자” 전체 안에는 제르트루드의 기품 있는 정신이 감돌고 있어, 그녀의 신선하고 은총 넘치는 내적 생활 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많은 부분이 자기고백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제르트루드는 대단히 재능이 있었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확실한 교육을 받았으며, 개성이 뚜렷하고 보편적인 그리고 특별한 은사를 충만히 받은 여인이었고, 심리학적이며 정신 수양을 위한 독특한 매력과 가치를 소유하고 있었다. “파견자”는 지칠 줄 모르고 하느님의 사랑스럽고 열렬한 인간 사랑을 설파하는데, 성녀에게 이것은 구세주 성심의 최상의 상징이었다. 이것이 책의 핵심이며 주요 내용이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주고 상승시켜서 하느님과 일치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사명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의 역사적 정보는, 이 책이 얼마나 생기를 북돋우고 활성화시킬 수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내용과 목적은 교육적인 논술이나 설교의 옷차림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제르트루드는 설교 스타일이 아니라 노래로 예찬하고 찬미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직접성과 시적인 정서와 특색들이 천상적 은총에 대한 계시 안에, 기도 안에, 그녀의 삶 안에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자기비하, 겸손과 극기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받은 높은 은총과 사명과 명령을 충실하게 동시대 사람들과 그 후대 사람들에게 내적 생활과 함께 숨김없이 열어 보인다.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지만 외적으로 전혀 이목을 끌지 않았고, 모든 호화로운 것과 환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것도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에는 오직 정신과 자유와 조화가 감돌았다. 우리는 붙임성있는 신앙심과 진정으로 서로를 접속시키는 구속력있는 지배적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제르트루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全교회를 위해서, 고국을 위해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빵을 얻기 위해 일하고 걱정하는 농부들을 위해서, 춥고 배고픈 어린 새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천상적 관상에서 생기를 얻는가 하면 그것과 나란히 민중의 단정한 사육제(카니발)도 적합한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것은 참 그리스도교적 자유와 관대의 정신에서 나온 신앙심이었다.
“파견자”의 정신세계는 높고 깊으며,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다. 제르트루드는 교회적 신앙과 삶의 금빛바탕 위에 서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 확실성과 가톨릭 세계의 모든 계층과 함께 같은 기초 위에 있다는 평온함을 준다. 제르트루드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교회의 가치를 발견하였다. 교회에 대한 충실성과 의탁, 그 안에서 살아감과 그와 함께 살아감은 제르트루드를 위해서 근원적인 은총이었으며, 그녀의 인간 본성을 파괴하거나 압박하지 않고 오히려 승화시키고 고결하게 해주었다. 제르트루드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독특한 개성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신비는 “덧없음의 비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비유적인 언어를 좋아했다. 성녀 제르트루드는 발달시킨 자연 감각과 예술 감각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명상에서 나온 것인데 특히 명쾌함과 고결함을 정도에 맞게 갖추고 있었다. “영적 수행”과 마찬가지로 “파견자” 안에서도 문학적인 면에서 대가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제르트루드는 훌륭한 원천을 찾아 퍼올릴 줄 알았고 위대한 모범들과 교제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많은 것을 성서에서 퍼올렸고, 거기서 내용과 표현에 있어 성숙한 건실함을 얻었다. 삶과 저술을 위한 다른 원천은 전례였는데, 그 안에서 그녀는 살았고 생각했고 느꼈다. 전례의 큰 사상과 봉헌, 아름다움과 그 열매는 그녀의 영혼과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뛰어난 특색과 높고도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저서 또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저서와도 현격한 차이가 드러난다. 전례는 제르트루드에게 성성의 학원이고 내적 삶의 한 형태가 되었다. 제르트루드의 저서들은 많은 부분이 성대한 성사행위로 각인되어 나타나며 이런 성대함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와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우리는 “파견자”를 라틴어 전례의 많은 부분을 신비적으로 해설한 교회 전례력의 관상적 해설자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는 또한 선생티를 내지 않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정신생활(영혼의 삶)에서 거룩한 전례를 열매 맺게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전례적 발전 시기에 특별한 사명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파견자”는 진지하고 아주 섬세한 위안서이다. 제르트루드는 자주 또 오랫동안 중병을 앓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받을 줄 알았고,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훌륭하게 위로해 줄 줄도 알았다. “파견자” 안에 담긴 위로의 말은 아직도 그 능력을 잃지 않았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가시적 성과 없음(열매 맺지 못함)이며, 그로 인한 몰이해이다. 우리의 성녀는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깊이 보았고, 그녀가 전달한 것에 의하면, 우리가 옳게 참아 견디기만 한다면 그것들이 숭고한 행위와 지식이 된다고 한다. 특히 그녀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외적으로 아무 작업도 할 힘이 없을지라도 충만한 삶이 가능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런 삶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영혼의 삶이다. 제르트루드의 두 책은 받은 신적 덕 안에서의 삶과 활동으로 그 본질적 의미에 끊임없이 접근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점이라고 말해 준다. 그것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 깊은 영적 갈망인데, 그것은 제르트루드에게서 대단히 강하게 두드러지며 이 두 저서에서 그에 대한 감동적인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제르트루드의 영혼이 완전히 그리스도교적 사고로 충만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스런 갈망은 착실한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다”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1서에 대한 네 번째 설교, 여섯 번째 구절에서 말한다.
우리는 “파견자”를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읽으려 해서는 안된다, 마치 그것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예술 감각이 필요한 것과 같다. 그래야만 사람은 결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제르투르드는 그녀의 충만한 어린 시절에 결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유명한 라이브니츠(Leibniz)가 1696년 12월 10일에, 여성 신비가들에 관해 쓴 부분을 보면 그러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쉽게 믿어버리는 경신의 태도를 그들의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 안에서 핵심적인 탁월한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만족한다. 이에 대해서는 존경하올 아빠스, 영적 스승 루드비히 블로시우스(Ludwig Blosius)가 더 깊이 있게 다루었다. 제르트루드의 “파견자”에 정통한 이 전문가는 1551년 9월 13일, 플로렌치우스(Florentius)에게 쓴 것에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복된 동정녀 제르트루드의 책을 권한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책은 정말 특별한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에 관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력이 없는 교만한 관능주의자들은 겸손하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완전히 거리낌 없는 영혼과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온 이 숭고하고 내밀한 거룩한 책들을 던져버릴 것입니다.”(Ludovici Blosii Opera, Ingolstadii 1726, 23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