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 대축일 강론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저는 지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축으로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당신 자신을 알리기 위해 계시하신 표징, 익히 알려진 놀라운 표징에 대해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때에 그 표징이 당신 자신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고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계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를 파견하셨다”(루카 4,18; 이사 61,1 참조)라고. 지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그 나라의 기쁜 소식이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 사람들의 것입니다.”(마태 5,3) 이것은 참으로 새로운 은총, 신약의 은총에 가득한 복된 소식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가장 불성실한 자, 가장 게으른 자에게까지도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또한 실행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행복이, 조국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흡족하고 복된 미래를 예상하게 하는 새 계명의 시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계명의 제정자는 처음부터 갖가지 행복의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축복을 받는 조건은 일찍이 하느님께서 계시의 산에서 에제키엘에게 보여주신 천국의 환영과 모형(히브 8,5)을 바탕으로 하여 복음사가가 기술한 순서를 따라 그 여덟 계단을 한 덕에서 다른 한 덕에로 한단씩 기쁘게 올라가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서적으로 배역된 이들 여덟 가지 덕의 그룹은 우리 마음의 상승과 공덕의 증대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덟 단의 돌계단이 붙은 성전(에제 40,34.37)에 들어가는 날, ‘시온에서 하느님을 뵈올’(시편 84,8) 수 있는 단계까지 주님께서는 완덕의 절정을 향해 이끄십니다.
- 그런데 초심자의 첫 번째 덕은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 포기를 통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됩니다. 두 번째 덕은 온유함으로, 이것을 통해 복종하는 일에 힘쓰고 또한 이 덕에 익숙해져 갑니다. 다음에 슬픔, 이것을 통해 자신의 죄를 탄식하고, 용기를 간구합니다. 이 경지에 달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타자를 위해서도 의로움에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며 죄인에 대해서는 정열적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정열이 정도를 벗어나 악에 경주하는 일이 없도록 합당하게 절제해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노력과 혼련을 통해 스스로 공종하고 자비로운 자가 되는 법을 터득했을 때, 우리는 관상과 하느님 뵈옵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정화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관상에 의해 단련되고 시험받은 다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임무를 받아 타자의 아버지가 되고 종이 되어 그들의 중개자가 되고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는 자가 됩니다. 그것도 상호간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가져오는 자가 됩니다.
이리하여 거룩한 선조들에 대한 칭송 가운데 기술되어 있는 즉 “그들은 자기 집에서 평화롭게 지냈다”(집회 44,6)라고 말한 것이 실현됩니다. 이 평화의 사명에 충실하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종종 순교의 덕과 공을 얻게 됩니다. 가끔 그는 옳은 일을 해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거슬렀다.”(아가 1,5)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너무 오래 지내왔다. 평화만을 나는 말하건만 그들은 오직 싸움을 말한다.”(시편 120,6)라고.
- 이 완덕의 절정에 달할 때 얼마만한 영광과 상급이 하늘에 준비되겠습니까? 세상을 포기하는 자에게 주님이 이처럼 큰 행복을 주시는 이유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 사람들의 것입니다”(마태 5,3)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치 없이 내리누르는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천지의 창조주를 소유하는 것 이외에는 부유한 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또한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진 자(2코린 6,10)가 되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됩니다.
만물을 보존하고 지배하시는 분을 소유한 자, 하느님을 몫으로 삼고, 하느님이 유산이 되어 주는 자(민수 18,20)는 일체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부의 사용에 있어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정도에 따라 그것을 사람들에게 배분하는 사람, 타자의 기쁨의 근원이 되려고 자기 자신까지도 주고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상속자, 그것도 그리스도와의 공동 상속자”(로마 8,17)는 성인이 되어 후견인에게서 떠나, 기대하던 상속의 완전한 취득에로 인도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온 피조물에 대해 완전한 권한과 절대적인 지배권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상속자는 어릴 때에는 전 재산의 소유자여도 종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아버지가 정해준 때까지는 후견인이나 관리자의 감독 아래 있습니다.”(갈라 4,1-2)라고. 그때 피조물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 상속인을 자기 주인으로 알아봄에 틀림없습니다. 만물이 창조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주인을 섬기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원의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어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른 새 인간”(로마 12,2; 콜로 3,10)으로 인정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지금 전 세계를 자기 재산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사용이 자기들에게 맡겨졌음을 알고 쓴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며,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온갖 재산보다도 하느님의 정법을 따르는 길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온갖 재산에 관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허무로 간주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처럼 생각하고, 필요한 것이 없어도 만족하고 하느님께 대해 감사를 드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가난해지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부유하며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을 칭송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살림을 잘하는 여자는 많아도 당신 같은 사람은 없고”(잠언 31,29), “어떤 자는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아도 늘 궁하나, 거룩한 이들은 가진 것을 나누어도 더욱 부유한 자가 된다.”(잠언 11,24). “부자는 궁핍하여 굶주리나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시편 34,11)라고.
- 탐심이 많은 자는 재물을 손에 넣으면 넣을수록 궁핍한 자가 됩니다. 스스로는 가졌다고 생각해도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전의 종, 욕망의 노예, 지갑의 예배자, 금전을 신으로 삼는 혐오할 우상 숭배자는 금전에 사로잡힌 자이지 금전의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인에게 벌써 응분의 벌을 내립니다. 즉 그들이 애착하는 것을 고뇌로 바꾸고, 그들의 악행을 고통으로 바꿉니다. 올바른 자는 더욱 올바른 자로 삼고, 진정한 부를 그에게 가져다주는 금전은 필요에 따라 차례차례로 배분되거나 한꺼번에 배분되거나 합니다. 그러나 탐심이 많은 자가 금전을 수중에 쌓아둘 때 금전은 그를 고뇌에 빠뜨리며 이것을 낭비할 때는 비루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를 더럽힙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은 신앙에 의해 부의 가장 탁월한 사용법을 알고 세상의 예지를 습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복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부를 따라갈 때 그 부가 사람을 가난하고 비참한 자로 만드는데 반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를 업신여길 때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아버지를 찬미합니다. 이 모든 것을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마태 11,20) 여기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란, 지복이 약속된 마음이 가난한 자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닙니다.
- 내 형제들, 벌써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참 가난, 복된 마음의 가난이란 유산이 적은 것보다 마음의 겸허함 안에 있으며, 물질적인 부를 경시함보다 교만을 버리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원을 가진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크게 유익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백해무익합니다. 악마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또 소유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교만 때문에, 주로 그 교만함 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재물의 취득 권을 포기하는 것은 자기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설령 부에서 떠났다 해도 부의 악에 머문다면, 나아가 혹 부를 버렸다 해도 덕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면, 또한 그리스도의 성체에 몸을 두고 있어도 만일 거짓 그리스도파를 돕고 있다면 이 세상의 재물의 포기는 참으로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교만의 진영에 투항한 채 말과 의복만으로 거룩한 이름을 선언하는 생활태도로 공격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바로 거짓 그리스도파를 돕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이 그리스도의 깃발인데 반해 교만은 거짓 그리스도의 깃발, 즉 교만한 모든 아들들을 지배하고 그것도 처음부터 교만으로 죄를 계속 범하고 있는 머리인 악마의 깃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리스도 때문에 빈자(貧者)임을 긍지로 삼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겸손한 자가 되도록 힘씁시다. 교만한 빈자(貧者) 이상으로 혐오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보다 비참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곤궁함은 그를 괴롭히고 교만은 영원히 그를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겸허한 빈자(貧者)는 ‘불 속에서 단련 받고 고생의 도가니에서 시험받는 것’(이사 48,10)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도 풍성한 마음에서 나오는 냉각제와 거룩한 희망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위로받습니다. 즉, 이런 사람은 마치 씨앗이나 뿌리 속에 있는 것처럼 숨어 있는 하느님의 나라가 ‘성령의 첫 이삭’(로마 8,23), ‘영원한 상속을 이어받을 보증’(에페 1,4)으로 자기 안에 있음을 알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형제들, 아시다시피 이 나라, 즉 온갖 감미로움을 여러분을 위해서는 고통으로 바꿔버리는 가장 감미로운 과실과 지복의 기쁨을 수도 없이 여러분에게 맛보게 해주는 이 나라는 바로 여러분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에 잘못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런 쓸모도 없고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을 내놓고 최고의 것을 사들인 셈이니, 이것이 참으로 유리한 장사였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느끼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인 것입니다.’(로마 14,17). 그래서 만일 이 모든 것을 마음 안에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면 어찌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루카 17,21)고 신뢰를 가지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승낙하지 않으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 그런데 주님께서 가난한 자의 지복을 선언함에 있어, 하늘나라는‘그들의 것이리라’(ipsorum erit)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것이다’(est regnum caelorum)라고 말씀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단지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가 전면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한 절대적으로 확실한 보증과 그 보증을 그들이 완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나라가 ‘천지창조 때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기’(마태 25,34)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보화를 질그릇 속에 담아’(2코린 4,7), ‘자기 몸과 마음에 하느님을 받아서’(1코린 6,20) 이 나라를 어느 정도까지 자기 것으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신 백성은 복되도다.’(시편 33,12) 섬김은 다스림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왕으로 자기 마음에 소유하고, 계속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인지요. ‘측량줄은 아름다운 땅 -저는 빛나는 상속을 받았습니다.’(시편 16,6)라고 시편작가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산분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애 받을 몫, 내 잔’(시편 16,5)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다투고 싶다면 그들에게는 그것으로 족하나, 그러나 그들보다도 비참한 자가 달리 있겠습니까?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을 부럽게 여길 일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내 영혼은 멀지 않아 주님 안에서 기꺼이 즐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04,34 참조).
얼마나 빛나는가, 가난한 자의 몫! 얼마나 복된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풍요로움!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전부 주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온갖 영광으로 채우고 완전한 기쁨으로 넘쳐흐르게 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품에 넣을 수 있는 넘쳐흐를 만큼의 양인 것입니다. “부와 명예, 근사한 재산과 자선”(잠언 8,18)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 아 가난한 사람들, 여러분의 영혼은 자랑해도 좋습니다. 신분이 미천한 영혼도 자랑해도 좋습니다. 미천한 신분 안에서 자랑하고 지상의 온갖 명예를 발아래 짓밟고 업신여기십시오. 무가치한 약탈물에 눈을 주는 것은 자신의 존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당신은 바야흐로 하늘에 올려지려하고 있는데 여전히 진흙탕에 누워 있지는 않습니까? 영원한 것이 당신께 준비되어 있는데 한바탕 꿈같이 덧없는 것을 우선적으로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얼마나 불행한가! ‘영화 가운데 깨달음을 얻음 없이 죽어가는 짐승과 마찬가지가 된 자는.’(시편 49,21). 이는 분명 가난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는 존경받고 지상에서는 감탄 받고, 또한 명부의 나라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된 사람들이 있는데 비해 한편에서는 마음의 눈멀음 때문에 가난을 비참한 것으로 생각하고, 겸손을 비천한 것으로 간주하고 ‘부자가 되기를 바라서 악마의 유혹과 덫에 빠진 자’(1티모 6,9) 거기다 일체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위해 스스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자’(시편 44,13)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내를 버린 자, 악의 길에서 헤매는 자는 불행합니다.’‘주님의 심판 날에는 어떻게 할 셈이냐?’(집회2,4). 그들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변의 진리는, 가난을 벗으로 삼아 마음의 가난을 기쁨으로 삼는 여러분을 위해,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임을 선언하고 보증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마련되어 있으므로 소중하게 지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마음에 있는 이 희망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끝까지 굳건히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주님께 영예와 영광이 세세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