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처는 무엇인가” 에서
토마스 머튼의 저작
성녀 루드가르디스의 내적 생활의 중심은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성심을 향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야말로 높은 영성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여 예수님 없이 높은 신비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짓밟고 경시하는 것입니다. 루드가르디스는 참으로 그리스도인 신비가로서, 마리아의 아드님 즉 정신과 영혼과 마음을 지니시고 인간의 육신 안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께 대한 열정적이며 순진한 사랑, 더 나아가 감추인 사랑을 지니고 모욕과 굴욕의 보속을 다하는 것을 그녀의 소명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예수의 위격(persona)에 관한 숭고한 사색을 통해 고양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루드가르디스는 다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루드가르디스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복음, 전례, 성사, 그리고 사랑을 통해서, 단순하고 또한 직접적으로 영원하신 하느님을 소유하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엄한 수행을 하던 알비파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천국에 가까이 와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많은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성 바오로의 다음 선고를 상기합시다.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를 즐기는 자는 아무도 여러분을 실격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런 자는 자기가 본 환시에 빠진 나머지 현세적 생각으로 까닭 없이 우쭐거립니다. 그는 자기의 머리이신 분께 단단히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온 몸은 이 머리로부터 관절과 인대를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잘 연결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라는 것입니다.”(콜로 2,18-19)
그러므로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기쁨이 되시고, 우리는 기쁨에 넘쳐 생명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샘솟는 복된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사도들 자신입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1-2)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참으로 살게 되었으며, 진짜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을 때, 영광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심겨져 언젠가는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녀 루드가르디스의 영성이며 신비주의입니다. 이것이 시토 수도회의 영성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 4,21)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이것이 베네딕도 규칙의 기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