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제의
1994년 1월 26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두 번째로 회람의 형식으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회람을 적기보다 ‘직접 가는’ 편이 낫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은 다른 한 가지 일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형제적 일치 안에 굳게 머물며, 기쁨과 마음의 단순함으로 ‘빵을 나누고’ 계시겠지요.
이 서간은 지난번 것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지난번 서간 안에서는 말씀의 식탁에 함께 앉고자 여러분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이번 서간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을 거듭하고자 합니다만, 이번에는 성체의 식탁에 함께 앉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이면서 유일한 축연은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의 모습에 따라 우리를 정비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인 및 수도자의 ‘사랑의 배움터’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배움터 (Schola Caritatis)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성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희생적 사랑의 대화의 성사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로서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예배를 바치도록 우리는 불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세기를 통해서 성체에 대한 교의가 이 비사의 온갖 측면들을 강조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에 감추어진 다른 측면은 내일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성체 신심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 온갖 표현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전통은 거룩한 제사, 성사로서의 제물, 희생의 잔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의 성체의 본질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금세기는 다른 측면을 재발견하였습니다. 과월의 기념, 교회와 교회적 친교의 건설, 세례를 받은 각 사람에 의한 성체적 사제직, 그리고 성령을 부르고 찾는 에피클레시스입니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또 다른 차원이 표면으로 드러났습니다. 부활하신 분의 생명에로의 참여, 우주의 神化, 선취된 재림(Parusia), 그리고 사회적 관계입니다.
모든 것을 말하기를 원치는 않으며 또한 불가능한 일이므로 테마의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그 비의에는 한계를 둠이 없이 열린 채로 두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성체에 관해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비의와 형제적 친교의 비의 라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성체
예수께서 성체를 제정하실 때에 하신 말씀을 참되게 이해해야 합니다. 「받아먹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마태 26:26)라는 말씀입니다. “이는”(빵)이라는 주어는 “내 몸”(예수 개인)이라는 보어를 동반함으로써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이나 예전이나 하느님의 외아드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은 속이는 일도 속는 일도 없는 분이시므로 성별된 빵과 포도주는 참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신앙은 이 점에 있어서 불변하며 일치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고 현존하시는 분
성체는 특히 현존의 성사입니다. 왜냐하면 성체는 과월의 성사이며, 그리스도 자신이신 구원의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로부터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식탁』, 『주의 만찬』(I고린 10:21, 11:20)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식사를 함께 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기억에 새겨 두고 자신들의 식사를 집전하였던 것입니다. 엠마우스의 제자들의 이야기는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언입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쪼개실 때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묵시 3:20)
우리의 미사 성제는 부활하신 분의 출현을 현실적인 것이 되게 해주며, 「나는 여러분에게로 돌아옵니다.」(요한 14:18-22)라는 그분의 말씀을 성취시켜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주간 첫날에 ‘오셨듯이’, 그리고 다음 주의 첫날에 다시 ‘오셨듯이’ 돌아오시리라는 것을(요한 20:19,26)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실된 접촉을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그리고 원칙적으로 성체를 통해서입니다. 성체제의를 거행할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주의 이름 아래, 주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공동체 자체를 통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안에 숨어 있던 제자들의 한가운데에 나타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외부로부터 오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하나로 일치시켜준 하나의 마음의 내부로부터 오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복음 말씀이 낭독될 때도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현존하십니다. 이 이유 때문에 부제의 「이는 주의 말씀입니다.」라는 선언에 대해 우리는 「주 예수여 당신께 영광이 있으소서」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성별된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은 먹히고 마셔지기 위해 빵과 포도주의 형태 아래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 안에 인간으로서 수육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으로 흘러넘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그리스도가 먹혀짐과 동시에 우리를 먹기 위해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를 마시며 배령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현존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그 분의 몸으로 우리가 바뀌어지도록 배령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동화되 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존의 모든 형태는 항상 존재하고 계시는 분, 즉 「참된 존재자」 를 한층 더 현존케 해줍니다.
우리의 관상생활을 유발시키는 힘은 『찾음-만남』이라는 말을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체 안에서 우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와 만나시며, 우리가 예수를 찾고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상에로 방향지워져 있는 우리들의 생활은 참된 존재자를 찾고, 우리가 존재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관상생활은 성체 없이는 또 성체에 대한 깊은 참여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
성체는 주께서 개인으로서 오시는 성사입니다. 이 오심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매일의 성체제의의 동기 부여를 해줍니다. 성령과 신부와 함께 우리는 외칩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묵시 22,20)라고. 우리 자신을 『교회-신부』로 이해하며 또한 현존과 친교가 연장되기를 희망하여 우리는 성별된 빵을 성체제의 뒤에 모셔두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남편이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다.」(1고린 7,4)라고 적혀있는 대로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의 이미 영광에 싸여 있는 몸에 대한 권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와 결혼상의 일치와의 사이에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에 관련하여 어떤 관계를 설립할 수 있을까요?
교부들은 에페 5,22-32에 근거하여 성체와 결혼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관련지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혼례는 성체라는 혼례 잔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신랑이신 주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서 또 교회를 자신의 몸과 육으로서 당신 자신과 합치시키십니다. 이러한 이유에서부터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도 자기 육신을 미워한 적은 없고, 오히려 기르고 볼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이와 같이 대하십니다.」(에페 5,29)
다른 한편 교회는 새로운 하와로서 「그분의 뼈의 뼈, 그분의 살의 살」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시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넘겨주셨습니다.」(에페 5,25) 주님이신 신랑의 이 자기증여에 그 신부인 교회의 완전한 자기증여가 상응하는 것입니다.
「새롭고 영원한 혼인의 계약」은 성체 전체이며, 우리의 은세공주수도생활의 봉헌 안에서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이 됩니다. 이 계약과 봉헌은 바로 성체제의의 혼례 잔치 안에서 이루어지며,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그것이 쇄신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야말로 신부인 교회에 풀 수 없는 끈으로 일치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랑의 충실함 안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신비주의
성체제의에 의해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이것은 바로 성체에 관해 성 바오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한 말입니다.「여러분들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1고린 11:18)
만약 기도가 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성체가 어떻게 기도를 양육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를 기도하는 몸이 되게 하기 위해 성체가 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체제의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받아먹어라. 받아마시라.」 받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체의 기도는 상호간의 자기 증여와 상호간의 받아들임 안에서의 친교입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다음의 말씀이 성취됩니다.「여러분들은 내 안에 있고, 나도 여러분들 안에 있습니다.」(요한 14, 20)
성체의 그리스도는 성령과 아버지와의 완전한 친교 안에 있는 영광 받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받아먹는 것은 삼위일체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먹고 배령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 됩니다. 우리중의 누군가가 사랑 담긴 신앙으로 성체에 다가간다면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라고.
「그리고 그는 곧 성령을 통해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로 끌어 당겨지게 되며, 그 사람 안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 머무실 곳을 마련하시는데 그것은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며 생명이 넘치는 몸과 피의 비의에 의한 신체적인 방법으로도 그것을 마련하신다.」(Saint Thierry의 아빠스 William의 묵상집-Meditations X : 8)
성체 배령은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신비적으로 변모되기 위한 진실한 문이라 함은 너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성체의 비의가 신비적 체험의 탁월한 장이라는 것을 언명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스도가 태워버리는 불이라면 쪼개진 빵을 나누어 먹을 때, 우리의 마음이 신앙의 어둠 안에서 불타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체와 형제적 친교
신약성서의 성체에 관한 텍스트를 그저 훑어보기만 해도 성체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형제들과의 연대의 성사라는 것, 또 서로 나누는 삶의 성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의 삶과의 또한 같은 빵을 함께 나누는 모든 신자들과의 연대 안에서의 친교를 표현하며, 이루어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이 삶을 함께 나누는 일에 참여케 합니다.
만약 은세 수도원 공동체가 무엇보다도 먼저 신앙의 공동체라면, 그때에 일치의 성사인 성체는 성취해야 할 최고의 기능을 성사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일치의 성사를 함께 거행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치를 표현할 수 있으며, 또한 종말의 충만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그 일치를 키워갈 수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함께
전례 안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을 찾고 만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그리이스어로 전치사 에이스: ~안으로, ~에로 라는 뜻)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알아 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단지「~안에」모이는 것이 아니라 「~을 향해」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이름에 대한 열렬한 탐구에로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즉 「바로 그분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번 더 왜 성체 모임 안에서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마라나타!」라고 외치는가를 설명해줍니다.
성체 안에서 우리는 종말의 때를 향해, 그리고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목표를 향해 긴장을 느끼며 공동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탐구합니다. 성체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첫째 계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둘째 계명을 배경으로 우리의 공동체 - 형제, 자매라는 사람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요한 복음서는 성체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특히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체 제정에 대해 이야기할 곳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그것을 생략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요한은 그곳에다 새 계명을 두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 34) 복되게도 이 서로간의 사랑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요한 6, 56)
수도규칙의 맨 마지막에 성 베네딕도는 우리에게 영적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시오」라고. 그리고 나서 성 베네딕도는 그의 마지막 바램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성체는 열렬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타오르는 사랑의 화산인 것입니다. 성체제의를 거행할 때마다 주께서는 우리를 함께 그 영광으로 빛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성체 안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즉 주님이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이유 때문에 바오로는 「주의 만찬」, 「주의 잔」, 「주의 식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Kyrios)라는 명칭은 공동체에 대한 관련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세계의, 교회의, 그리고 공동체의 Kyrios - 주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서 아무도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도 없고, 또 자신만을 위해서 죽는 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 실상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곧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4: 7-8)
성 바오로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과 맺는 친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오로는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바오로는 그 뒤에 서로간의 실제적인 일치는 제의의 구성 요소라고 언명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함께 모여도 주님의 성찬을 먹는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1고린 11:20)
더 나아가 1고린 11:29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심판을 먹고 마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맥 안에서 ‘몸’이라는 어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어귀는 「부활하신 분」의 성체의 ‘몸’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되지만 또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이 문장 전체의 구조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도는 이미 말하였습니다.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 17) 그리고 조금 뒤에 바오로는 확언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1고린 12:27)라고.
베네딕도는 장상이 하루에 두 번 소리 높여 주의기도를 낭송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수도자 전원은 서로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을 새롭게 하고, 걸림돌이 되는 가시를 없앨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권고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분들이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좀 늦은 감이 들기는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현존하실 때, 우리가 모여있다는 것 외에도 우리가 일치하고 있음을 주께서 보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제의의 진정성 (모임의 화합)보다 제의의 외적인 형식 (전례 기준에 맞는가)에 더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친교와 나눔
예루살렘의 첫 공동체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떼고 신명나는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46-47)고 하며 그 결실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신도들의 무리는 한 마음 한 정신이 되었고,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 32)
앞에서 기술한 것에 관해 성체와 공동생활의 박사라고 불리는 포드의 수도원장 보드윈은 자신의 생활과 묵상의 결실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소유권을 공동의 것으로 바꿀 수 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있다. 개인의 소유물을 제거해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소유물이 공동체에 도움이 되게 함으로써이다. 이렇게 하여 공동체 안에서의 친교가 상처받는 일이 없고 친교의 선이 방해받는 일도 없다. 그러나 친교의 선을 방해하는 분열과 개인적 소유물은 사랑에 대립한다.”
“여러 가지 영적 은사는 일치와 친교에로 인도되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다. 우선 첫째로 개인에게 주어진 은사가 사랑의 친교에 의해 공동으로 소유될 때이다. 그리고 그 은사가 서로 나누는 사랑에 의해 공동으로 사랑 받을 때이다. 은총의 선물은 언제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나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에게나 공동 소유이다. 만약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자가 다른 이와 그것을 서로 나눈다면 그 사람은 다른 이를 위해 은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되며, 이때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도 그것을 지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은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문 XV, 공동 생활에 대해)
또한 더 나아가 이 함께 나눈 식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가난하고 인간성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연대할 때에만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연회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불구자들, 절름발이들, 소경들을 초대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복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당신에게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루가 14, 13-14)
복음적, 은세 수도원적 청빈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도록 그리고 비인간적 행위로 부서진 사람들을 우리가 선택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 초대에 대한 관대한 응답은 우리의 육과 피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자의 몸과 피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연대를 부여해 주시는 성부의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체제의의 거행에 그 원천과 중심을 두지 않으면 결코 건설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 정신의 육성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
이러한 이유로부터 저는 이 회람을 성체께 바치고자 합니다. 이 회람이 차기 남녀 합동 회합의 중심 테마
『공동체, 사랑의 배움터』에 대한 다리 역할을 하고, 그 준비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지하 묘소인 카타콤바를 방문했을 때 대단히 오래된 그림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한 부인이 양손을 기도의 자세로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마리아, 교회, 우리 각자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계신 예수님처럼 예수를 통해,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체에 대한 봉헌물로써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모든 흩어진 아들과 딸들이 성체 배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적 사랑을 보냅니다.
베르나르도 올리베라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