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996년 3월 26일 밤, 티비린 수도원에는 9명의 수도승들이 있었는데 그 중 7명이 납치되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납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아마 일곱 명의 수도자들은 1996년 5월 21일에 참수되었을 것이다. 56일간 구금되어 있던 상황에 대한 명확한 보고도 없고 그들의 죽음에 관한 것들도 역시 여전히 비밀에 싸여있다.
공포감이 팽배했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함께 알제리아에 머물기를 선택한 이들 수도자들은 1993년 성탄 밤에 무장집단의 방문을 받았고 그들은 수도자들을 협박하고 돌아갔다. 그곳에 함께 머물겠다는 의지표명을 한 그들의 결단은 또한 폭력의 위험에 처한 가난한 이웃들과 연대하고, 교회의 작은 공동체로서 하느님과 알제리아 교회를 위해 자신들을 봉헌하려는 행위였다.
장 삐에르 슈에쉐르 신부에 의한 일곱 형제들의 소개:
동 크리스티앙 드 쉐르제(Dom Christian de Cherge)
동 크리스티앙 드 쉐르제는 수도원장으로서 순교의 가능성까지를 받아들이도록 공동체를 명석하게 이끌었던 영적 여정의 지도자였다. 그는 1937년 1월 18일 프랑스 콜마르(오-링)(Colmar (Haut-Rhin))에서 태어났다. 1964년 3월 21일, 사제로 수품 되었고, 1969년 8월 20일, 에그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다. 1971년 1월, 티비린에 도착해서, 거기서 수련기를 마치고 유기서원을 발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로마에서 라틴어와 이슬람학을 전공했다. 다시 알제리아에 돌아온 그는 1976년 10월 1일 성대서원을 발했고, 1984년 3월 31일,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크리스티앙은 알제리아의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무렵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복무했다. 그 때 그는 거기서 한 이슬람 경찰관과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 친구는 크리스티앙을 위험에서 보호하려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이 체험은 크리스티앙의 전생애 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리하여 크리스티앙은 그 친구와 그의 국민, 그의 나라와 피로 계약을 맺은 장소인 티비린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고 선택했던 것이다. 공동체에 입회하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소명과 공동체의 소명을 양립시키는 것이었다. 공동체는 나름대로 공동체로서 이슬람 땅에 존재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아랍어와 이슬람 경전을 공부해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했다. 그는 코란과 아랍어 성서 공부를 했다. 그에 더하여 회교문화를 알기 위해 많은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교제를 시도했고 발전시켜 나갔다. 수도원에서 개최한 리바트 에스 살람(Ribat es salam) “평화의 끈” 모임에 수피(Sufi)들을 초대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시켜 나갔다. 이 모임이 지닌 목적은 구체적으로 두 종교의 전통과 공통의 영적 제가치들을 함께 발전시키고 서로 손잡고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과정을 함께 해나가자는 것이었다. 1978년 경, 크리스티앙과 끌로트 롤트(Claude Rault)가 창설한 이래, 이 모임은 일 년 두 차례 개최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 기획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침묵 안에서 함께 기도하며, 어느 쪽의 전승에서든지 말씀을 받아서 다음 모임까지 그 말씀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보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 모임은 참가자들 각자의 내적 회심의 진실 된 진보를 격려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슬람과의 친교를 위한 크리스티앙의 카리스마의 중심점이었고,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눈길 아래 살려는 상호원조에 자기를 증여하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도의 영혼과 교류하고 싶은 그의 바람이 훨씬 많은 것을 찾게 하였다. 이슬람교도가 되려는 것은 분명히 그의 의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슬람 안에 말씀의 씨앗이 될 수 있게 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이슬람 형제들과 가능한 한 가깝게 지내고, 창조주의 입김과 생생한 현존의 표시를 그 안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진정한 교회의 한 멤버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그들의 언어로 기도하고 그들의 방법과 그들의 거룩한 텍스트로 하느님을 찾으려 했다. 이 여정에서 그가 희망했던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회심”이 아니라, 말하자면 이슬람교도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든가 그리스도 신자가 이슬람교도가 되게 하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인류가족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많은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친교와 일치를 이룰 때가 도래하여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려는 데 있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하며, 율법의 문자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을 따르고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 크리스티앙의 깊은 마음에서 그토록 열렬히 구하는 이것을 함께 노력해가자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첫 모임에서 그가 약속한 것에 변함없이 머물려는 그 갈망은 그 자신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열망했던 것, 그가 앞을 내다보며 도전한 일이었고, 가끔은 그것이 보상도 되고 기쁨도 되었다. 그의 가장 큰 고통은 그가 하는 일에 형제들이나 무슬림 쪽에서 반대하거나 도전해 올 때였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를 대단히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이 모든 반대보다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희망에 ‘불패(不敗)’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본래 진정한 의미에서 이 말에는 ‘순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알제리아의 위기는 이 순교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희망 안에서 그것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희망은 전쟁과 살인을 맞대면하게 될 때라도 포기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희망의 투쟁은 예수 자신의 투쟁에 걸맞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루어질 수 있는 일, 그것은 그분의 자녀들인 이슬람교도들을 그분께서 바라보시는 그대로 나도 그분과 함께 바라보기 위하여 나의 눈길을 아버지의 눈길 안으로 잠그는 일이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매인 그분의 영광으로 빛을 발하고,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한 신비스런 그 기쁨은 친교를 이루고 모든 차이를 넘어 하나로 만든다.……” 크리스티앙의 희망은 그의 유언서에 쓴대로 이슬람을 존중하는 그의 소명의 중심에 있었다.
조수도자 룩 도시에 수사(The lay brother Luc Dochier)
조수도자 룩 도시에 수사는 꾸밈없는 완전히 인간적인 사람, 그 지역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았고 병자들에게 봉사한 전설적인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4년 1월 31일, 브르그 드 뻬아즈(드로므)(Bourg-de-Peage)(Drome)에서 태어났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육군 장교 군의병으로 모로코에서 복무를 마쳤다. 1941년 12월 7일, 에그벨(Aiguebelle)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의 부퍼탈 감옥에서 포로가 된 한 가정의 가장을 대신하여 자원으로 포로생활을 했다. 1946년 티비리네로 온 그는 1949년 8월 15일, 조수도자로 성대서원을 발했다. 그의 뛰어난 지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낮은 자리를 선택했다. 주저 없이 그는 이 소신을 겸손과 숨은 삶의 표시로 그의 마지막 날까지 지켰다. 1959년, 그는 다른 한 수사와 함께 알제리아 국민해방군에 의해 인질로 잡혀갔으나 2주 만에 석방되었다.
1996년 3월 26일, 수도자들이 납치되어 갔을 때, 그는 82세였고 알제리아에서 50년을 체류했다. 그는 1946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축일에 티비린에 도착했다. 알제리아 독립전쟁 중에, 산지 사람들이 도시와 교류하는 게 대단히 어렵게 되었을 때에도 룩 수사는 가까운 지역에 사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산 속에 있는 사람들의 집에까지 찾아가서 병자들을 치료해주었다. 그의 조수도자 신분은 그를 공동체와 소원하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체와 따뜻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형제적 헌신으로 그러했다. 그는 훌륭한 주방장이었다. 그 자신이 이 봉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 있다. “요리사의 역할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데 있다.” 또 이런 표현도 있다. “공동체 생활의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공헌하는 것이 요리사의 노하우이다.”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서 지혜와 유모어의 은사를 풍부히 받은 그는 긴장감이 팽팽한 토론이나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그것을 이완시킬 줄 알았고, 그들이 몇 년 전에 겪었던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서 모두가 심각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줄 줄 알았다.
룩 수사는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외부로부터 받은 이런 존경은 어느 정도 수도원을 보호하는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이것은 무장집단 안에서도 입증되었다.
영원을 직면하면서 룩 수사는 자신의 보잘 것 없음(무자격)에 놀라워하면서 주님 앞에 선 착한 강도가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처럼 기도하였다. “예수님, 당신 나라에 드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룩 수사는 이에 더하여 “나는 빈손으로 열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여행자와 같다.”라고도 말했다. 사람이 죽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은 그는 많은 질문을 한다. 영광스럽게 된 육신이란 어떤 것인가? 등등. 그가 애독했던 마지막 책의 제목은 “육신의 부활을 여전히 믿어야만 하는가?”였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사람들의 경험들을 종합하여 엮은 책이다. 또한 사후의 영광스럽게 된 육체에 관해서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룩 수사는 천식으로 인한 기침의 발작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침대 위에 앉아서 잠을 자야 했다. 번역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성경의 시편을 가장 즐겨 읽었고 또 하나 그가 좋아했던 책은 준주성범이었다. 그의 마음은 동방교회의 영성과 신비주의로 향해 있었다. 나는 그가 ‘예수의 기도’를 실천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도에 매력을 느낀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조수도자의 신분에 맞는 고유한 기도 리듬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 외에 공동체 성무일도에 참석하는 일은 드물었고, 참가한다고 해도 성당 뒤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대단히 숙련된 독서자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미사 중에 서간만이라도 낭독해주기를 청했다.
룩 수사는 대단히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전혀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거나 인내롭지 못한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고 고통을 인내했듯이 다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갖가지 무거운 짐을 이해해주고 함께 짊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고통은 자기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다. 생활필수품과 기부 받은 물건들을 모두 나누어주러 다녔다. 누가 자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외면상으로 그의 태도와 언행이 세련되지 않은 면도 없지 않았다. 옷차림에 대해 관심 밖이었던 데다, 구두, 슬리퍼, 샌들들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사이즈도 맞지 않는 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진에서 모자를 쓴 우스꽝스런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다룬 이런 방식은 성 필립보 네리를 닮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받아들일지 기대한다거나 자신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거나 자신이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의 내적 생활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지를 그의 동료 의사들과 주고받은 서간을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위에 언급했듯이 아틀라스 성모 수도원과 룩 수사가 얼마나 밀접하고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는지 그 관계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50년을 수도원에서 살았다. 사람을 좋아한 그는 모든 사람을 환영했고, 단순함과 형제애, 깊은 신앙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이 하느님의 사람을 그곳 사람들은 ‘마라바트(Marabout) (이슬람교에서 성자라는 뜻)와 의사로 인정했다. 그 때문에 공동체는 주변 세계에 알게 모르게 그런 이미지를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대활약 중에 납치되어 간 그는 작업복 차림이었으며, 82세가 될 때까지 전 생애의 그 많은 세월을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치료하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바로 그 사람들 한가운데서 제물로 바쳐졌다. 그의 죽음은 고통스러웠을지 모르나 그것은 주님 안에 숨겨져 있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크리스토프 르브레똥 신부(Fr. Christophe Lebreton)
크리스토프는 그들 중 가장 젊었다. 그는 1968년 5월 혁명(대학 분쟁) 세대에 속했다. 그의 일기와 시가 그것을 확실히 증명해주듯이 그는 생명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신앙 안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1950년 10월 11일, 불루와(Blois) 롸르 에 쉐르(Loire et Cher)에서 태어났다. 12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는 마지막 학기에 자퇴했다. 대학 법학부에 등록한 후, 의무병역 대신 해외에서 하는 사회봉사를 선택했다. 그는 이것을 알제리아에서 마쳤다. 1974년 11월 1일, 타미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수련자였을 때 티비리네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1977년, 그는 타미에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고, 1980년 11월 1일, 그곳에서 성대서원을 발했다. 1987년 10월 8일, 그는 아틀라스 성모 수도원으로 되돌아왔다. 1990년 1월 1일, 사제 수품을 받았다. 티비린으로 돌아온 그는 농장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이웃하고 있는 몇몇 가정의 젊은이 3명과 공동체가 협동조합을 형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힘든 일을 적극적으로 자청해서 했고 트랙터를 운전하는 일도 했다. 물이나 땅의 분할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잘 중재하였다. 1992년, 수련장이 되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직무를 받고 대단히 기뻐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직무를 수행할 기회를 오래 갖지 못했다. 그가 돌보던 유일한 수련자 프랑소아가 견인하지 못하고 퇴회했기 때문이다.
전례는 크리스토프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났다. 처음에는 셀레스팅 신부가 칸톨이었고 크리스토프는 부칸톨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는 크리스토프 신부가 성무일도를 주관하게 되었다. 또 칸톨 모임과 1주 1회 공동체 성가 지도도 그가 책임자가 되어 지도했다. 이 영역에서 만큼은 두 사람의 토론이 쉽지 않았고, 특히 두 칸톨 사이에 그랬다. 둘 다 급한 성격에다 음악적인 감수성도 서로 많이 달랐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집회에서는 물론 드라마틱한 일들도 없지 않았으나 궁극적으로는 항상 화해로 끝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몇 년간 두 사람은 참으로 멋진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열렬한 기질과는 너무나 다른, 인내와 친절을 훈련해가고, 교양을 쌓고 서로 함께 극복해가는 작은 승리들. 단련시키고 진보해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성무와 다른 여러 가지 예식들을 잘 준비해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손님들은 전례에 참석하는 것을 기뻐했고 높이 평가했다. 아랍어를 조금씩 전례에 도입해서 처음으로 저녁기도의 주님의 기도를 아랍어로 부르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즈카리야의 찬가와 짧은 마리아 찬가의 후렴, 소시간경의 화답송도 불렀다. 크리스토프 신부는 기타 반주를 전례에 도입했다. 예를 들면 부활 전야의 창세기 낭독, 부활절 미사, 성탄 전야미사의 화답송 시편들을 기타로 반주했다. 알리(Ali)가 수도원에서 50년을 일하고 퇴직하던 날, 공동체 집회에서 알리를 위한 연회가 있었을 때 그는 기타를 연주했다.
크리스토프 신부의 강론은 그의 시처럼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것들은 묵상에서 나온 내용이었으며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가끔 그의 사고방식은 난해한 면이 있어서, 크리스티앙 신부처럼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의 존재의 깊이, 신앙, 관대함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자주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신비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실들, 자연, 농사일, 이웃과의 관계, 알제리아의 위기 등등 여러 가지 이미지와 비유를 들어서 강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시 가운데서 내가 많은 시간에 걸쳐서 읽고 묵상한 시, 내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는 시는 “붉은 트랙터”이다. 폭력적 죽음의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 어렵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려는 선택을 표현한 드라마틱한 내용을 그 마음 안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붉은 트랙터에 시동을 걸고 첫째 문을 통과했고, 두 번째 문도 통과했다. 은총이 이긴 것이다. 은총은 두려움보다 강했다. 그는 이제부터 살아가게 될 두려운 미래를 위한 명백하고도 강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길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했다. 그는 힘을 가득 받았고 여러 가지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서 일을 성취시킬 만큼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 그에게 모든 것을 놓고 떠나라고 요청한다면 그렇게 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왜? “가장 사랑하는 어린양”과의 친교가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이 통찰을 통해서 그는 자신 안에 일어나고 있는 반발을 꿰뚫어 보았고, 그 너머에 훨씬 매력적인 사랑하는 그의 예수님이 계심을 보았다. 예수님의 사랑, 그분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수도자가 발하는 서원의 목적이며 그가 열렬히 갈망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과 전면적으로 다시 만나고자 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의 숨은 반항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별’이었다고 확신한다. 이 내적 드라마는 아마 GIA(이슬람 무장 집단)가 1993년 12월 24일 저녁, 처음으로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토프 신부가 원통 속에 숨었던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틀림없다. 다른 형제들이 모두 납치되어가는 순간에 자신만 도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내적 여정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 때 지은 그의 많은 시들은 이것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는 더욱 겸손해졌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다. 그 후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그에게 갑작스럽게 닥치더라도 폭력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그의 열렬한 영혼에게 상응하는 것이며 그를 앞을 향하게 하였다. 결점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배려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크리스티앙과 미쉘과 함께 “평화의 끈”(Ribat es salam) 그룹에 속해 있었다. 열심히 아랍어를 공부했고, 공동체가 화답송을 아랍어로 부르도록 고무하기도 했다. 이슬람 신봉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그들과 함께 기쁘게 살았으며, 그들에게 그런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려줄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 신부와 면담할 때, 그들은 물질적인 것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주제를 가지고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면에서 이들 두 사람은 상당히 달랐으나 일치하는 공통점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셀레스팅과 그의 관계는 전례를 위해서 함께 일할 때 각자 가지고 있는 감수성과 의견이 상당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을 극복하고 조정해 가려고 서로 노력했다. 그들은 확실히 긴 여정을 함께 걸어왔다. 라 퐁뗀(La Fontaine)의 우화에 나오는 오지그릇과 철그릇이 먼 길을 함께 걸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들은 서로 부딪혀 깨지지 않았다. 은총의 불가사의! 이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여정을 함께 걸어간 것이다. 아마도 티비린의 순교자들의 성무일도를 위해 작곡된 다음의 화답송을 노래하면서:
“지금 여기 참 예배를 드리는 순간;
가장 깊은 내 존재 속에
한 불이 타고 있네, 맹렬히도.
가자, 십자가를 만나자.
이 불을 끌 이 누구인가!
미쉘 플레리 수사(Br Michel Fleury)
지칠 줄 모르는 일꾼, 단순하고 과묵한 사람,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신비에 완전히 젖어들고자 갈망했던 사람이었다. 1944년 5월 21일, 브리베 상부에 있는 쌩 안느(Saint Anne sur Brivet)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가 될 때까지 밭을 경작하는 일을 했다. 신학교에서 9년간 공부한 후 프라도회에서 10년동안 머물며 리용, 파리, 마르세이유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80년 11월, 벨퐁뗀 트라피스트 수도원(Bellefontain)에 입회했다. 1984년에 티비린으로 온 그는 1986년 8월 28일, 서원했다.
알제리아로 오도록 그를 매료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84년에 일어난 것 같다. 그는 마르세이유에서 밀링머신(milling machine 금속절삭기계) 기계공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마그렙(Maghreb)에서 온 사람들과 분명히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프라도회를 떠나 벨퐁뗀 수도원에 입회하도록 인도했을까? 그가 마르세이유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나라에 가면 더 많이 봉사하게 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을까? 아틀라스를 향해 시동이 걸리게 된 계기는 콘스탄틴의 총대리 참사회원이 벨퐁뗀 수도원을 잠시 방문하여 알제리아 교회상황을 공동체에 이야기한 것이 시발점이었고, 또 하나는 거의 같은 시기에 친구 장 르방(Jean Levent) 신부가 알제리아에서 돌아와 그를 방문한 일이었다. 장 르방 신부는 여행 도중 방문했던 티비린 수도원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1984년 3월 11일, 메디아(Medea) 병원에서 오벵(Aubin) 신부가 귀천한 것이 깊은 영향을 주었음도 틀림없다. 오벵 신부를 깊이 존경했던 크리스티앙 신부는 부고(訃告)에 이슬람 땅에 현존한다는 것에 대한 몇 가지 의미와 생명을 바침이 그들의 최고의 대관(戴冠)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미쉘에게 있어서 프랑스 수도원에서 아틀라스 수도원으로 옮긴다는 것은 이미 벨퐁뗀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매력을 느꼈던 영적 목표의 객관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숨은 삶과 알제리아 사람들을 위해 침묵 속에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 항상 같은 방향에로 같은 성령으로 고무된 그는 아틀라스에 입회하자 즉시 리바트 모임에 참석했다. 미쉘에게는 아랍어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수피들의 글에 담긴 무슬림 영성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성무나 미사의 공동기도와 중재 기도를 할 때 그것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향을 제안하고 발췌하여 인용하기도 했다.
“리바트” 모임 중 하루는 알로와인(Allauines) 사람 3명이 참석하여 공동기도와 침묵 속에서 기도를 함께 하고, 그들이 어떻게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일상생활 안에서 살았는지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기대와 희망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이슬람에 대한 미쉘 수사의 인식은 주로 이런 모임에서 강화되었고 많은 단계를 거쳐 하느님께로 나아갔으며, 상호원조와 존재를 통해서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미쉘은 사제가 아니었다. 그는 성무일도와 미사성제를 사랑했으며, 평상시 제1독서는 늘 그가 낭독했고, 특히 손님과 피정객들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그들에게 책을 제공하고 페이지를 찾아주는 일을 맡아서 했다. 성서낭독을 할 직무가 주어지면 그것을 잘 수행했다. 그의 차례가 되면 독서기도의 제2독서 텍스트를 선정하여 준비했다. 나는 이런 자문을 해보았다. 만일 그에게 사제수품 받을 것을 권했더라면 사제가 되지 않았을까?
거의 마지막 즈음에 그에게 마음의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주는 확실한 증거가 몇 가지 있다 … 특히 그가 거룩한 독서를 대단히 중시했다는 점이다. 충분한 시간을 거룩한 독서에 할애하기 위해 매사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방일로 시간상 균형이 깨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시간을 마련해서 독서를 했다.
모두는 그가 대단히 침묵을 중요시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말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주방이 형제들의 모임장소나 대화 장소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지켰다. 가끔 그는 날카롭게 그런 것을 지적했다. 침묵의 사람이면서도 집회 때나 작업 중에 때때로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강한 태도와 강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그에 대해 모든 이가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게 하기도 했다. 대화는 정말 그의 장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를 성인처럼 존경했다. 그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을까?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적합한 시기에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야채를 나누어 주었고 그들의 가족의 안부를 묻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1993년 성탄전야, 셀레스팅과 내가 이슬람 무장집단 젊은이에 의해 체포되어 성(聖)복도를 지나 주방을 통과할 때 마침 미쉘 수사가 그곳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번만큼은 죽을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었다. 미쉘은 한마디 말없이 묵묵히 우리를 따라나섰다. 이것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는 이사야서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전례 안에서 예수님께 적용했던 이 구절은 1996년 3월 26일 납치되어간 밤과 죽음의 순간까지 지나온 시간 안에서 미쉘의 태도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라는 그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를 인도하여 프라도를 떠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게 하고, 벨퐁뗀을 떠나 알제리아로 오게 한 같은 성령에 의해서 그 자신을 바쳤다.
El hemdoulila - 하느님, 당신께 찬미 드립니다. -주님, 당신의 손에!-
브르노 르마르샹 신부(Fr. Bruno Lemarchand)
브르노 르마르샹 신부는 모로코 페스 부속수도원의 원장이었다. 그는 절도 있으며 사려 깊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내성적이었고 또 티비린에서 머문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1930년 3월 1일 그는 쌩 맥상(Saint Maixent)에서 태어났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뽀아띠에(Poitier)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2년간의 의무병역을 알제리아에서 마쳤다. 1956년 4월 2일, 사제수품을 받았다. 1956년부터 1980년까지 그는 또아의 쌩 샤르레 중등학교에서 교직에 있었다. 51세가 되었을 때 벨퐁뗀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가 첫 번째로 아틀라스에 온 것은 1984년 8월 28일이었고 아직 유기서원기간 중이었다. 1985년 8월 10일,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가서 3년간의 유기서원을 갱신하여 마쳤다. 1989년 성모 영보 대축일에 아틀라스로 돌아왔다. 이 수도원에서 1990년 3월 21일, 성대서원을 발했다. 같은 해 10월에 그는 페스로 파견되어 그곳 부속수도원에서 1991년 10월 1일까지 장 밥티스트 원장의 보좌를 역임했다. 그리고 이 날 크리스티앙 원장신부에 의해 그곳의 장상으로 지명되었다. 티비리네에서 그는 객실을 담당하고 있었다. 브르노 신부의 개인적인 특징은 침착성, 평온함, 조심성, 미소와 교양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겠으나 밖으로 드러나는 그의 인상은 까다롭고 엄격하고 권위적인 면과 날카로운 대답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면들이었다. 작업을 할 때는 조심스러웠으며 때로는 지나친 세심함을 느끼게 할 때도 있었다. 또아의 쌩 토마스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수였었고 그 후 교장직을 맡을 만큼 성공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인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는 동안 교구사제들에게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1991년 이후부터 그는 사제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페스 공동체와 함께 그는 2002년에 열릴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이웃 사람들, 특히 그가 주의를 기울여 배려해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페스 수도원의 장상으로 있을 때 그가 사용했던 사무실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그 자신을 소개할 만한 것이라고는 벨퐁뗀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낼 때 쓴 것으로 보이는 그의 유년기에 대한 것 하나밖에 사실상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 있던 책으로는 사막 교부들, 은세수도원생활의 초기 수도자들에 관한 것, 십자가의 성 요한과 어떤 영적 저술가의 책에서 베낀 개인적인 노트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독서에서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목마름과 참된 사랑,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많은 길을 찾았음을 볼 수 있다. 그의 노트에는 자신과 그의 내적 상태에 관해서 아주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다. 성무일도를 낭송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중재 기도를 바치게 될 때는 그것을 미리 노트에 적어 준비했다. 객실담당이었는데 그의 청결함은 모든 손님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것이었다. 공동체의 의류 세탁실도 그가 맡았다.
1984년, 알제리아와 아틀라스를 선택했는데, 1989년에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선택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페스 수도원 사무실에는 손으로 쓴 아랍어 노트 몇 권과 아랍어 입문서, 카셋트, 작은 예수 자매회 수녀로부터 받은 수업노트가 있었다. 이것들은 브르노 신부가 얼마나 부지런히 아랍어를 공부했는지에 대한 증거물들이다. 그는 그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이 영역에서만큼은 진보가 느렸고, 잘 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원예작업을 지도했던 모로코인 타미(Thami)를 무척 사랑했다. 이렇게 그와 함께 친하게 일하는 것은 모로코 사회와 그 문화에 깊이 침투해들어가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 일을 매주 일요일 오후, 그와 함께 스크(Souq)로 산보 가서 옛 도시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계속했다. 매일 점심식사 후 시간을 정해놓고 타미와 만나서 어학공부를 했다. 상호봉사의 정신으로 타미는 브르노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브르노는 그에게서 아랍어를 배웠다.
1996년 5월 21일, 브르노의 사망이 알려졌을 때, 그것을 예감하고 있던 타미는 알제리아에 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렸다면서 흐느껴 울었다. 정원일로 되돌아 왔을 때 브르노가 얼마나 꽃을 사랑했었는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 화원을 좋아했다. 페스에 봄이 오면 정원의 손님전용 통로가 형형색색의 꽃들로 황홀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었다. 만일 이것들이 그의 숨은 영혼을 표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경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페스의 원장으로서 브르노는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잠심과 평화로 가득한 분위기를 즐겼다. 그는 숨은 삶을 사랑했고, 이런 삶은 거기서 가능했다. 그는 “페스는 기도의 오아시스!”라고 편지에 썼다. 1996년 3월 18일, 그는 티비린의 원장선거에 참석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마치 고향집으로 돌아가듯이 티비린으로 떠났다. 그의 뿌리는 항상 티비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형제가 나에게 “그가 알제리아로 출발하던 때의 모습은 결연함과 평화로운 결정을 내린 사람 같았고 완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겨드린 신뢰에 찬 걸음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알제리아가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결연하고 유능한 인물이었던 브르노는 성무와 숨은 침묵의 생활을 사랑했기 때문에 수도자의 봉헌생활을 선택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수도원 형제들, 가난한 사람들과 손님들을 소중히 여겼다. 브르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해온 상호관계의 사려분별이 어떠했는지는 사람들이 지금도 그에 대해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하느님만을 원한 사람의 가장 심오한 일면을 암시해주는 것 같다.
셀레스팅 링제아르 신부(Fr. Celestin Ringeard)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1933년 7월 29일, 뚜보아(롸르 아틀랑티끄)(Touvois(Loire Atlantique)에서 태어났고, 12살에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알제리아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1960년 1월 17일에 사제수품을 받았다. 1983년 7월 19일, 벨퐁뗀 수도원에 입회, 1986년에 아틀라스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1989년 5월 1일 서원했다. 벨퐁뗀에 입회하기 전에 셀레스팅 신부는 노숙자들의 구조자였다. 수도자가 된 후에도 그는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 안을 자기집(보금자리)처럼 느꼈다. 20년이 넘도록 약물 중독자, 알콜 중독자, 매춘부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그의 생애는 지울 수 없는 현저한 특징을 지닌 경력을 말해준다. 이런 불쌍한 사람들의 다양한 체험들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가끔 그의 생명에 위험을 느끼게 할 때가 많았다. 그는 이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처지에서 그들을 구해주고 싶은 뜨거운 갈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평판이나 잘사는 사람들의 왕따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온전히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그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한 몸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시려고 죄 없으신 분이신 예수님께서 죄만 빼고 인간과 똑같이 되셨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의 실제적인 긴밀한 일체의 삶이 셀레스팅 신부의 생애를 특징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럽게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갈 결정을 내렸을까? 내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는 그가 한 번은 은둔피정을 하고 싶어서 벨퐁뗀 수도원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그가 수도원을 찾은 이유는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껴서라기보다 지금 자기가 돕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기도생활이 가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능력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분명히 그가 돕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 그가 기대하는 만큼 도울 수 없는 외로움과 무력감, 무일푼인 자신의 가난을 체험했을 것이다. 이런 무력감을 절감한 현실이 어느 날 수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직접적 활동으로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수도원의 숨은 삶 안에서 기도와 자기증여를 통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이, 그토록 열렬한 활동가가 수도승이 될 수 있으며, 수도원에 자신을 가둘 수 있는지 모두 아연실색했다. 그가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게 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날, 한 동성애자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말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사람은 창문에서 뛰어내려 그의 발 앞에 떨어져 죽는 비극을 체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수도원에서도 셀레스팅은 이런 비참한 세계를 마음에 담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양의 메일과 편지를 받았지만 결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받은 충고나 압력들이 은세수도원 생활의 소명에서 그를 일탈시키지는 못했다. 그를 신뢰하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과 서신교환을 통해서 교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공동체는 그의 지금의 상황을 특수한 소명으로 인정해주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알콜을 마시지 않으려고 자신들과 싸우는 중독자들과 연대감을 느낀 그 역시 결코 한 방울의 알콜도 마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언제나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공동체 축일에 형제들과 우정을 나눌 때마저도 한 잔의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려는 결심을 지키는 것은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굽히지 않고 꾸준히 지켰다. 수도원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 고통의 세계는 그와 한 몸을 이루었고, 성령께서는 그를 강한 힘으로 지탱해 주셨다.
셀레스팅의 인품은 그를 특징짓는 몇 가지 생생한 체험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957년, 엘제리아 전쟁시 그는 프랑스군 간호병이었다. 군인들이 기관총으로 복부를 똟은 국민해방군의 레지스탕스 병사를 그가 중재하여 살아남게 한 일이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이 기억이 동기가 되어서인지, 그는 1968년 벨퐁뗀 수도원으로 가게 되었고, 아틀라스 공동체로 가서 정주할 수 없는지에 대해 원장에게 허락을 요청한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서도 그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일치의 서약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변함없이 동팔찌를 왼손목에 끼고 있었다. 그것을 벗어놓은 적이 없었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없었다.
이 두 가지 서약, 하나는 노숙자들과 맺은 것, 다른 하나는 알제리안 당원과 맺은 서약을 넘어 알제리아 국민과 맺은 서약이 사제직과 수도서원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계약과 일치되었으며 그것은 셀레스팅 신부의 영적생활의 기초와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쾌활하고 열정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수한 사건들이 많았던 삶이었기 때문에 어떤 역풍에도 흔들림 없는 충실함과 앞을 향한 자세와 자신을 내어주는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인생의 흐름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모든 일들은 1996년 5월 21일, 봉헌의 날까지 그를 과월로 인도한 것이다.
뽈 파브르 미베이유 수사(Br. Paul Favre-Miville)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비상한 재능을 갖춘 뽈 수사는 남을 돌보는 일을 좋아했으며 모든 사람의 친구였다. 1939년 4월 17일, 비제(Vizer)오뜨-사보와(Haute-Savoie)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 같이 대장간에서 일했고, 전문직을 위한 양성을 받은 후 배관수리 기술공이 되었다. 뽈 수사의 유년기와 본느보(Bonnevaux)에서 지낸 청년기는 그리스도교적인 분위기에 초점이 맞춰졌고, 노동과 소교구에서의 생활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아주 일찍부터 그의 마음은 미세하게나마 점진적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그에게서 드러난 것은 그가 성지순례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그는 먼저 로마와 이스라엘 성지, 루르드를 순례했는데 그곳에 갈 때는 시 쌩 삐에르(Cite Saint Pierre)에서 병자와 다른 순례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했다.
1984년 12월 24일, 타미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1986년 12월 21일, 유기서원을 발했다. 1989년 12월 29일, 아틀라스 수도원에 도착했다. 1991년 8월 20일, 티비린 수도원에서 성대서원을 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생애에서 성탄절이 차지했던 비중이다. 아틀라스에서 그는 객실담당자였고 수도원 관리를 맡고 있었다. 객실담당자로서 크리스티앙 신부와 협력했다. 크리스티앙은 손님맞이와 영적동반을 맡아서 했고, 뽈 수사는 접대와 식사대접에 종사했다. 작업장에서는 자격을 갖춘 유능한 배관공답게 자신이 전공한 카리스마적인 재능을 과감하게 발휘했다. 이 직업은 수공업에 알맞은 그의 모든 재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티비린과 같은 큰 수도원에서는 이런 종류의 일들이 중요했다. 수도와 전기, 철공, 페인트 등등, 이 모든 일은 그의 몫이었다. 무슨 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에게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아서 잘 해주었다. 그의 일하는 스타일은 정확하고 신속하고 효율적이었으며 절차가 분명했고 조직적이었다. 대단히 헌신적인 그는 그에게 청하는 것은 절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까지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때로는 메디아시에서 장인들이 찾아와 그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들으려 했고, 조언을 구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한 전기공이 그의 집에 새로 설치하려는 중앙난방시설의 설계도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그는 전기용접부터 시작해서 동이나 땜질 등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엄청난 비용이 예상되는 관수용 시스템을 그는 완전히 개수 변경했고, 수도원과 협력하는 4명의 가장들과도 협력하여 저수지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작업했다. 수도원용 물과 이웃사람들이 밭에 쓸 물을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여름에는 물 부족이 심했다. 그래서 공정한 물 배분이 필요했고 아무도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실제로 저수지는 봄만 되면 식수도 모자랄 만큼 건조해지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웃사람들이 물 때문에 끊임없이 불평을 했다. 그는 토목관 양성을 받을 때 수업시간에 들은 지식을 토대로 해서 실제로 그것을 되살리며 엔지니어의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서 천둥 번개와 뇌우 때문에 발생하는 전기설비 누전과 파열, 중앙난방 시스템의 펌프 고장, 대형세탁기의 자동 스위치의 불작동, 주방 냉동고 모터 파열의 원인을 찾아냈다. 원인은 건조한 지면의 기초역량부족이었다. 충분한 지면 기초역량부족으로 인해서 수도원의 전기 공급 고압선이 뇌우시 항상 작동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대공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수도원 둘레의 연결부위를 추가로 단단하게 다져줌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했다.
뽈 수사의 성향은 쾌활하고 늘 기쁨에 넘쳤고 붙임성이 있고 협조적이며 부지런했다. 형제들과 이웃사람들, 종업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랍어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수화와 제스처를 통해 소통이 가능했고 많은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공동체에서 토론을 할 때 발언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충돌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고, 그 나름대로 뚜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좋아했던 나눔은 농담과 웃기는 이야기 형식이었다. 그런 모험은 해도 괜찮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전례와 기도, 성체제의 안에서의 독서, 성무일도와 성가를 좋아했다. 사제가 아니었지만 이 점에 대해서도 그는 완전히 만족한 상태였다. 엄청난 양의 노동과 많은 책임을 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무일도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무척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청결한 쿠쿨라와 수도복을 착용하고 출석했다. 그래서 그의 생활의 첫 자리를 무엇이 차지하고 있는지를 누구든지 알 수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그의 판단은 무경험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단히 객관적이었다. 이슬람교가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관해서도 그렇고, 알제리아에 현존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 관해서도 별로 특별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언젠가 일어날 사태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93년 성탄절, 무장집단이 다녀간 후, 우리는 그에게 사보와(Savoie)에서 병상생활을 하고 계신 고령이신 모친을 방문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것은 절실히 필요했다.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는 점점 더 알제리아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고, 그래서 돌아갈 것을 선택했다. 그 이후, 습격과 폭력적인 죽음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선택한 동기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도 그리스도처럼 이웃들과의 연대 안에 충실히 머물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그도 크리스토프 신부가 원통 속에서 몇 시간을 숨어 있었던 밤의 체험과 비슷한 내적 여정을 통과했음에 틀림없다.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배신하는 감정 없이 도망칠 수 없는 일이다. 그 중대한 것 중의 하나는 수도자의 서원에 포함된 내적 계약, 다른 하나는 정주서원으로 공동체에 머물기로 약속한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알제리아 국민에 대한 충실성이다. 그가 납치되던 날 밤, 바로 전날에 뽈 수사가 티비린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위대한 신비인가! 뽈 수사 역시 다른 수도승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려는 불타는 염원을 안고 출발했던 것이다. 이 불타는 염원은 타미 수도원에서 아틀라스 공동체와 결합하려고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의 길을 비추는 빛이었다. 우리는 공동체의 문서 안에서 뽈 수사의 빠른 영적 성숙의 증거가 될 만한 글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 시련이 각 개인과 공동체 전원을 변화시켜주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폭력의 극한 상황 앞에서 무사하기를 희망하면서 그에 접근 할 수 없다.” 드발 추기경(Cardinal Duval)과 일곱 형제들의 장엄한 장례식이 1996년 6월 2일, 알제의 아프리카 성모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동영상 : 아틀라스의 일곱 형제들 다큐멘터리 (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