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JOSEPH CASSANT
성 요셉 까상
Cistercian Witnesses of Our Time
Jean-Christophe Christophe
목 차 -------------------
가족
교회에서
소명
형제회의 기숙학교에서
사제관에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
수련기
은세 수도원 생활과 서원
강제추방 위협
사제서품을 향하여
휴양
꺼져가는 생명
죽음 저편에
그의 생애가 주는 메시지
영적 아버지(어머니)
공동체에서
연대기
가족
그는 어디 출신인가? 그는 로-떼-가료느(Lot-et-Garonne)의 평화로운 작은 촌락 까상네이(Casseneuil)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포도와 자두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양친, 피에르(Pierre)와 아나이(Anais)는 근면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아들들도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실하게 살도록 교육시켰다. 1869년 장남 에밀 그리고 9년 후 1878년 3월 6일에 차남 요셉이 태어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요셉은 형보다 몸이 튼튼하지 못했다. 양친은 그를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태어난 지 며칠 후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교회에서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는 일요일에 그를 꼭 교회에 데리고 갔다. 가족은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교회 근처에 십자가의 자매회 수도원이 증축되었다. 아버지의 두 자매 마리와 필로메나가 그 수도회의 수도자였다. 그들에게는 일요일에 그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보고 듣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소년의 경이로움은 날로 커갔다. 중앙제단과 교구의 주보성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큰 조각상이 주로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리고 빛나는 제의를 입은 사제의 존재, 그들의 여러 가지 동작과 성당의 돔에서 울리는 반향은 그를 매료시켰다.
소명
어린 소년이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쯤 되었을 때 그는 “나는 주임 신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교회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나이 또래가 즐기는 어떤 놀이보다도 그는 여러 가지 교회예식을 더 즐겼다. 그는 집에서 직접 제단을 만들고 종이로 오려서 만든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의 동작과 성가를 흉내 냈다. 에밀은 다른 놀이들과 장터의 오락을 선호했었던 것 같다.
작은 요셉이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했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기도한 것이 확실하게 드러날 날이 오고야 말았지만. “오, 예수 성심이여, 당신은 깨끗한 마음을 사랑하십니다. 제게 필요한 순수함과 사랑을 청하오니 들어 허락하여 주소서.”
형제회의 기숙학교
그가 장래에 무엇이 되든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884년 3월, 6살이 되었을 때 그의 형 에밀은 동생을 생 장-밥티스 드 라 살르 형제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데려갔다. 요셉은 통학생으로 그 학교를 9년간 다녔다. 그는 처음으로 시골의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오락과 유흥의 흥청거림을 피해서 소성당의 평화를 찾아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는 열심히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그것들 안에서 용기를 얻었고, 그런 일은 그를 고무해 주었다. 1887년부터 1888년까지 그의 성적은 17명 학급에서 5등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런데 강의 수가 늘면서 강의 프로그램은 그에게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요셉은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지만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차츰 안정을 잃어갔다. 권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따랐고, 한 순간도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통학하는 길에서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교수들은 모두 그의 노력과 용기를 인정해주었다. 그들은 요셉을 “오락도 전부 포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진지한 학생”으로 묘사했다. 1893년 7월, 하루는 그의 지나친 긴장을 지켜보며 걱정하던 에비엥(Hevien) 수사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하느님께서 나머지는 해주실 거야.” 요셉은 이 때 이미 15세였고, 어쩌면 다음 학기에는 8살-10살의 소년들과 동급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제관에서
교구의 주임신부 필로(Filhol)는 요셉 카산의 성품과 진면목을 인정하게 되면서 그가 계속 학교 수업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고, 그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요셉의 훌륭한 성품, 단순함과 순수함을 경탄하고 있었다. 1890년 6월 15일 그의 첫영성체와 1892년 12월의 묵상회에서 그의 깊은 신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주임신부는 이 젊은이에게 사제성소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1892년부터 그에게 라틴어 강의를 해주도록 보좌신부 뚤르(Tulle)와 그 후 기숙학교의 고백신부인 부르엥(Brouens) 신부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도 간신히 마친 생도에게 라틴어는 너무 어렵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주임신부는 그의 보좌신부들과 기숙학교의 교장 루씨강(Lussigan) 수사와 합의를 보았다. 요셉의 사제소명은 중대한데, 현재 이 상태로는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울게 확실했던 것이다. 모두는 마지막 방법으로 다음의 결정에 동의했다. 주임신부는 그의 양친과 의논한 후 요셉을 1893년 9월부터 사제관에 머물게 하면서 새로 부임한 보좌신부 몽네엥(Monneins)이 그에게 최소한의 고전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수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요셉은 교회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신부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 너무 행복했고, 공부하는데 온 열성을 다했다. 놀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켜야 할 정도였다. 거기서 그는 자유로운 시간에는 성당에서 지냈고, 제의실 담당하는 앙또느 라보리(Anoine Laborie)를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가끔 소년은 앙또느에게 장난을 걸기도 했다. 요셉은 앙또느의 6남매와 복사도 서고 놀기도 했다.
그가 기도할 때와 성무에 참여할 때 잠심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는 오로지 제대만 바라보았고, 성당에서 결코 신자석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일들을 숨김없이 주임신부에게 드러내보였다. 그는 주임신부를 완전히 신뢰하였다. 주임신부 또한 고행하는 사람이었으며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육식을 삼갔고,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한 해가 지나갔다. 요셉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소신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올 신부는 그에게 사제직을 위한 다른 길을 제안했다. “이 젊은 사람이 침묵도 잘 지키고 잠심과 기도에 열성을 다하고 있으니, 혹시 그가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시토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자가 될 수는 없을까? 그들에게는 교회의 임무가 주어지지 않을 터이니 어려운 신학부 시험 없이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셉은 이 제안을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그런데 과연 그의 건강이 엄격한 트라피스트 생활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이런 그의 상태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필올 신부는 요셉과 함께 라 트라프와 똑같은 시간배정과 생활을 시범적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제의실 담당자와 조리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망연자실하여 주임신부에게 물었다. “주임 신부님, 도대체 왜 이렇게 사시려고 하십니까?”라고. 이런 보강 관찰은 만족스럽게 진행되었고, 할만하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이 이런 엄격한 라 트라프의 생활과 엄격한 금역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주임신부는 양친의 신앙심에 호소해보기로 했고, 그들은 이에 동의해주었다.
이제 그는 뚤루즈(Toulouse)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데제르(Desert)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로 신부는 문하생 요셉을 데리고 그곳 수도원의 수련장 신부 앙드레 말레(Andre Malet)를 만났다. 말레 신부는 요셉을 만나보고 난 후, 이 젊은이 안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알아채고 그에게 약속했다. “신뢰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이미 수도원의 침묵과 전례, 성무와 노동에 매료된 요셉에게는 이 이상 더 큰 기쁨은 없는 것 같았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
잠시 까상네이를 방문한 요셉은 1894년 12월 5일, 16살 9개월이 되었을 때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했다. 거기서 그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과 1869년에 작성된 지침서에 따라 그리고 수도원장 캉디드(Candide)의 지도 아래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온순하고 신심 깊은 요셉은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의지력으로 공동체 생활에 별 어려움 없이 잘 적응해나갔다. 그의 온 관심사는 오로지 지체 없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집 가까이서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그는 수도생활의 매일의 프로그램에 성실했다. 성당에서 노래로 하는 성무일도와 미사 참례, 하느님의 말씀과 영적 저술가들의 저서를 렉시오 디비나(성독), 토지 건물 유지 관리와 공동체의 생계를 위한 손노동 등으로 하루는 충만했다.
새 지원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플로렝텅 포르(Florentin Faure)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는 다투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만족했고, 그것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아름답게 나타났다. 모두 그를 사랑하고 존중했다. 그는 언제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어떤 곤란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것은 지나친 말일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생활 안에서 극복해야 할 어려움을 체험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의식해야 했고 그것을 극복해야 했을 것이다. 대단히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어려움을 당할 때 공포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훌륭하게 보일 때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수련장 앙드레 신부에게 큰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자기의 여러 가지 불안을 열어 보일 수 있었다. 신부는 그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모든 것에 앞서 사랑하는지를 가르쳐주었고 ‘저에게는 당신 외에 다른 기쁨이 없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요셉은 또 이것을 자기 양친에게도 권했다. “저는 부모님께서 항상 예수님과 일치하여 살아가시기를 그리고 만사를 사랑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입니다.”
그는 매일 온 정성과 시간을 들여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그는 점점 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마음의 길”에 들어선 그는 즉시 이에 대해 앙드레 신부에게 말씀드렸다. 그것은 현재의 순간순간을 인내와 희망, 사랑으로 사는 것이었다. 요셉은 간단한 모토를 만들어 기도하였다.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기도인가?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젊은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신뢰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성심께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것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에 불굴의 인내와 희망을 더해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1895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공동체는 그를 위한 수련 착복식을 거행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모직으로 된 긴 흰 수도복과 스카플라리오와 갑바를 입혀주었다. 이렇게 요셉은 수련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를 마리-요셉 수사 혹은 단순하게 요셉 수사라고 불렀다. 착복식 후 그는 큰 기쁨으로 그의 어머니와 에밀을 포옹하였고, 그들과 평안과 충만한 기쁨을 나누었다.
수련기
마리 요셉 수사는 수련자가 되어 성 베네딕도의 규칙이 가르치는 “주님께 봉사하는 학원”에서 더욱더 분발했고 심화되어 수도자로서 성장해갔다. 그의 수련장 앙드레 신부는 말과 모범으로 그를 가르쳤다. 그는 은세 공주 수도원 생활을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생활의 완성”으로 보았다. 기도를 중요시했고 공동체가 노래로 바치는 성무일도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 바치는 개인기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시토 수도회의 이상에 대해 “수도자는 회개(고행)를 통해 오관의 영향력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이며,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며 사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수련장은 그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예수님 사랑을 최우선시 하라고 권고하였다. 규칙준수는 거기서부터 귀결된다: 규칙준수 안에서 분투노력한다는 것은 희생과 사랑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마리 요셉 수사는 이 사랑에 자양분을 주어 양육시키기 위해서 동반해 주는 충고자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안내서와 가르침을 듣고 열심히 거룩한 독서에 전념했다. 그는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책은 조금 읽어라, 대신 많이 묵상하라!” 다른 많은 노트에는 “도움이 될 만한 사항들을” 요약하여 기록했다. 그가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은 성무일도와 하느님 말씀이었다. 그는 시편 전부를 암기하는데 온 에너지를 쏟았고, 또한 “끊임없이 그것들을 암송하려고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단편들을,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수난사화를 암기하려고 노력했다. 복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젊은 수사는 자기 자신 안에서 솔직히 인정해야만 하는 자애심과 질투심을 철저하게 없애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명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소심한 성격 때문에 불안의 유혹을 받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동반자에게 마음을 열기를 원하신다. 그는 너를 어떻게 성성에로 인도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리하여 상호간의 신뢰 안에서 조금씩 하느님 사랑에로 향하는 참된 은세 수도원적인 우정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은세 수도원 생활과 서원
수련기가 끝나고 1897년 1월 17일, 수도원장 캉디드는 마리- 요셉 수사의 서원을 받아들였다. 그는 검은 스카플라리오, 가죽 벨트와 소매가 긴 쿠쿨라를 받았다. 이 날은 예수의 거룩한 이름 축일이었다. 전례 텍스트는 이 젊은 수사가 걸어야할 멋진 길을 보여주었다. “예수님,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리고 당신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는 예식 후 수도자들이 모인 집회에 그의 어머니와 형이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서원식에 참석해준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또다시 그는 프랑스어와 라틴어 공부에 열정을 쏟아야만 했다. 어떤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공부와 하느님의 은총은 함께 진척되어 갑니다.” 그는 또 자신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상기시키는 모토를 적어놓았다. “인내를 요구하는 끈질긴 일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이 모토를 자신에게 거듭 거듭 주입시켰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에 한계를 느끼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밭일은 또 그를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 젊은 수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었을 뿐더러 더 많은 힘든 노동을 반항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피로는 더욱 심해졌다. “나는 수도생활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포기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유일한 생활 방침은 이랬다: “나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이 일들을 한다. 나의 모든 활동은 그것이 높이 평가받는 일이든지 천한 일이든지 끊임없는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의 눈에는 “대자연이 하느님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었고 데제르의 성모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들은 멋진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하고, 고독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천국으로부터 결코 떠나게 되는 일이 없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데 그가 군에 입대할 연령이 되었다. 이 젊은 수도승은 군인으로서의 ‘숭고한 소명’을 존중했다. 그는 그 안에서도 “헌신과 순명의 학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영에는 아무 지지자 없이는 대단히 마음을 어지럽히는 곳임을 염려하고 있었다. 교회가 성직자들을 위해서 병역면제를 청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여러 가지 질환으로 이미 건강상태가 약화되어 있는 그에게 군대 생활은 부적당했다. 1898년 12월부터 1899년 6월까지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12통의 편지에서 병역에 관한 질문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고뇌가 예상되는 문제였고 또한 하느님께 신뢰하는 기회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1899년 4월, 가족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으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보다 큰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1899년 5월 1일, 일시적 징병 유예를 받았고, 1900년 3월 19일에 결정적으로 부적격 제대를 하게 되었다. 징병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지 2개월 후, 마리 요셉 수사는 성대서원을 발할 수 있었다. 1900년 5월 24일, 주님 승천 대축일이었다. 그때의 체험을 그는 이렇게 메모하였다. “서원보다 더 하나 되게 하는 사랑, 하나 된 생명, 사랑을 위한 사랑.”
강제 추방 위협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 상태는 그의 기쁨 위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01년 7월 1일에 정부의 인가가 없는 수도회 연합체들은 국외로 추방한다고 선포했다. 시토회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젊은 수도승은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 일들에 대해 고뇌하였다. 하나는 수도원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일이며, 불안정한 국외로 추방당하는 일 그리고 수도 공동체의 분산이었다. 그는 데제르의 성모 수도원에 정주하기로 서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프랑스를 떠나 외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는 아직도 변함없이 사제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막연히 연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의 영적 아버지는 그를 무척 사랑했다. 헤어짐은 불가피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헤어져 있어야 하는가?
앙드레 신부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수사를 격려해주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헤어짐을 허락하신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 오직 그분께만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그분이 그런 일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더 그분께 밀착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시려는 것이지 결코 당신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떻게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실지, 어떻게 당신을 가르치실지, 당신의 영적 아버지 보다 훨씬 잘 위로해 주실 줄 알고 계십니다.”
사제수품을 향하여
사제성소는 성체성사를 향한 사랑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마리 요셉 수사는 지칠 줄 몰랐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우리를 양육하시기 위해서 내어주셨는데 지금 우리가 그분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성체성사는 지상에서의 유일한 행복이다.” 그는 축성된 호스티아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관상하고 예수 성심 안에 살기를 원했다.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 그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고 매일 전 세계 안에서 거행되는 모든 미사와 일치하여 살고 싶어했다.
그의 이 열성을 유지시켜 줄 두 가지 기쁜 일이 일어났다. 1900년 6월 3일, 성령강림에 수도원장 캉디드는 그에게 수품의 하급단계인 4단계를 주었으며, 6월 22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앙드레 신부를 신학교의 교수로 임명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원장의 경험에 비추어 봐서 수련장 앙드레 신부는 마리 요셉 수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이며, 학생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새로운 질환이 마리 요셉 수사를 점점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는 심한 두통과 복통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몬시뇰 제르멩(Germain)과 치르게 될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제르멩 몬시뇰은 주교후보자로서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심한 시련은 교수가 바뀐 것이었다. 앙드레 신부는 다른 많은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장은 그에게 교수직을 사임하도록 하고 대신 그 일을 부제인 다른 수도자에게 임명하였다. 이 수도자는 마리 요셉 수사가 여러 가지 지적 능력이 보족하고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설명해 주어야 할 것까지도 거절했고, 학우들 앞에서 그를 꾸짖어 창피와 망신을 주며 냉소를 퍼부었다. “너는 진짜 얼간이야. 너는 공부를 해도 무익한 인간이다. 더 이상 너에게는 공부할 자격이 없어. 네가 수품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제직을 불명예스럽게 할 뿐이다!”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 이 젊은 수도승에게 이것은 내적으로 그를 몹시 흔들어 놓았고 대단히 병들게 했다.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 깊은 상처를 입은 마음을 보고 있던 앙드레 신부는 위로와 현명한 충고로 그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열렬한 기도를 바쳤다. “오, 예수 성심이여. 교수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저는 당신께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신학교수, 학교의 주인으로 선택합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걱정하는 모든 것을 저는 당신께 맡겨드리며 신뢰합니다.”
사제직을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무사히 잘 치렀고 앙드레 신부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공부와 모든 것 위에 그를 보호해주시는 예수 성심 덕분에 그가 사제수품을 받기 위한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라고 말하였다.
마리 요셉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던 수도원장은 그에게 1901년 3월 2일 부제품 前 단계를 수여했고, 1902년 2월 22일에는 몽또방(Montauban)주교 피아르(Fiard)에 의해 부제로 수품 되었다. 젊은 수사는 더욱더 기도를 심화시켰다. “오, 예수 성심이시여, 이 결정적인 길에서 저의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소서. 앞으로 제가 걸어야할 이 길에서 더욱더 당신과 밀착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그의 영적 삶은 심화되어 갔으나 건강은 악화되었다. 수도원장은 그가 이미 손써볼 수 없을 만큼 불치의 결핵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부가 그것을 숨길 수 없는 날까지 혼자서 희생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했는데 그 안에서 어떻게 불평할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사제가 되는 기쁨의 날이 왔고, 그는 이니 수도원장 몬시뇰 마르(Marre)로부터 사제수품을 받았다.
휴양
사제수품 다음 날, 마리 요셉 신부는 까상네이로 떠난다. 수도원장 캉디드는 그가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치유되지는 못하더라도 원기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그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드리는 첫 미사성제는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며 그를 축하해준 축하연 또한… 그렇지만 며칠 후 그는 수도원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 시작했다. 수도원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여러 통 썼는데도 불구하고 동 캉디드는 그에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7주간이나 허락해주었다.
꺼져가는 생명
요셉 신부는 12월 2일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은세공주수도생활의 모든 일과를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기쁨과 관심사는 오로지 매일 집전하는 미사성제를 정성껏 바치는 일이었다. 그는 점점 더 쇠약해졌다. 멈추지 않는 고통스런 기침이 그를 무척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그는 그저 감기 탓으로 돌렸다. 가족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쓸데없는 걱정들은 하지 마시기를,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바랍니다.” 보행이 힘들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교의 교수였던, 마리 요셉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욕을 주었던 그 사람이 이번에는 그를 간호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제멋대로 환자를 다루었고, 때로는 그에게 밥도 주지 않았고 쉬어빠진 우유를 마시게 했다. 그런데도 환자는 전혀 불평하는 일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힘이 없어서 미사집전과 성무일도도 바칠 수 없게 되었다. 질식할 것만 같이 숨이 찬 지독히 고통스러운 상태, 욕창과 다리의 부종으로 괴로웠다. “나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서 이 고통을 받게 되어 행복합니다.”라는 것이 그의 반응이었다. 앙드레 신부는 근심 가득한 마음으로 그를 자주 방문해 주었다. 그에게 귀를 기울였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가 청하면 격려가 될 내용의 텍스트를 읽어주기도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신부는 지난 해 반복했던 그의 기도를 계속 바치고 있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맡겨드립니다.”
6월 17일 새벽, 성체를 받아 모신 후 그는 숨을 거두었다. 마리 요셉 신부는 25살 이었다.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고 그의 기쁨이었던 그리스도를 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죽음 저편에
그가 죽은 후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한 여인에게 예상 밖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는 임신부인데다 암수술을 받은 후였다. 요셉 수사의 전구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의 전구로 다른 많은 특별한 은사들도 베풀어졌다. 그는 1926년 출판된 그의 소책자 “사막의 두 꽃송이”가 널리 분포되면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1903년부터 2001년까지 418건의 기적들이 시복조사기록에 시사되어 있다: 회심, 화해, 질병의 치유, 건강회복, 학업의 여러 가지 성공 케이스, 물질적인 은사 등등. 또한 1936년부터 2001년 사이에 30개국에서 1850통의 메시지가 도착했고, 이것은 모두 이 “사랑스런 작은 신부”에 대한 감탄과 존경을 담은 증언들이었다.
이런 증언들이 뚤루즈와 아쟁과 로마에서 공식적인 시복조사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1984년 6월 9일 이것들을 기초로 해서 마리 요셉 신부의 모든 영웅적인 성덕을 인정하는 교령이 고 되었다. 그리하여 2004년 10월 3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그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모든 것에 앞서 예수님을!
마리 요셉 수사는 본질적인 것에로 직진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친교에로. 그는 직관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고 계시며, 미사성제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생애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고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해서 중개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희생과 고통 안에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고 매일 아침 예수님의 빵(몸)을 간절히 바랐다. 매 순간을 그는 예수 성심께 위탁하였다. 얼마나 자주 그는 서간을 통해서, 그 자신에게는 물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성심에 의탁하라고 말했던가!
그가 수정한 한편의 그림은 성체성사와 예수 성심께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증명해 준다. 가장 상부에는 십자가가 가시나무가지로 둘러싼 심장의 불타는 광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심장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성작에 받아서 성체성사를 거행한다. 앙드레 신부와 제자를 상징하는 두 비둘기가 갈증을 풀고 있는 그림이다.
영적 아버지(어머니)
이처럼 마리 요셉 수사는 우리에게 영적 안내자, 영적 동반자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앙드레 말레 신부 없이 이 젊은 수사는 인간적으로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앙드레 신부는 관대함으로 마리 요셉 수사의 불안과 면학의 어려움에서 오는 일종의 ‘열등감’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줄 줄 알았다. 그리고 젊은 수사가 가졌던 동반자에 대한 솔직함과 전면적인 신뢰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완전히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그룹 안에서의 수사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가족에게, 교구 안에서 그리고 은세 수도원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큰 평온과 만족을 주었던지, 그런 그는 보기에도 참 아름다웠다. 이 세 그룹은 모두 각각 나름대로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젊은이가 함께 할 때는 가장 좋은 것이 유지되었다.
시간
“모든 것을 지체 없이 하라!”는 모토를 삶의 수단과 해결방법으로 삼고 산 이 젊은 수사는 단순하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아들이고, 매순간을 현재의 순간에 살라고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과 매일의 임무수행에 온 마음을 둘 것과 낙담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단순성
위대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작은 것의 가치를 보여주었고 일상의 현실과 행위의 가장 평범한 것들을 그의 표어대로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은 마리아를 통해서” 산다면 얼마나 비범한 것이 되는지를 증명해 주었다.
연대기 -------------------
1878년 3월 6일 까상네이에서 출생
1878년 3월 7일 세례
1890년 6월 15일 첫영성체
1892년 12월 18일 견진
1894년 12월 5일 데제르 성모 수도원 입회
1895년 1월 6일 수련 착복
1897년 1월 17일 유기서원
1900년 5월 24일 성대서원
1902년 10월 12일 사제수품
1903년 6월 17일 귀천
1984년 6월 9일 그의 성덕의 탁월함에 관한 로마의 교령 공표
2004년 10월 3일 로마에서 시복선언
* 일어와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