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3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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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걷다 보면

 

15C

한스 히르츠의 그림입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습니다. 얽히고설키어 마치 맹목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한 방향을 향해 가는 벌레들의 무리같이 느껴지는 것은 좀 지나친 일일까요? 분기탱천하여 “예수”라는 공공의 적을 한 마리 짐승처럼 끌고갑니다. 너도 나도 서로 끌고가겠다고 아귀다툼, 아우성이 천지를 진동할 것 같습니다. 창과 칼, 쇠못 방망이까지 동원하고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나섰는데, 대체 무엇을 무찌르겠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 일을 이끌어 가고 있는 이는 누구일까요? 뒤에 숨은 것일까요? 아니면 아예 없는 것일까요?
베드로의 모습 또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꿈틀거리는 무리 위에 허망하게 올라타고선 작은 칼로 한 병사의 귀를 자르고 있습니다. 손이나 급소도 아니고 겨우 귀정도 자르느라 저리 애쓰고 있네요. 잘 알다시피 예수는 베드로의 이 두려움을 무릅쓴 격분을 부추겨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잡혀갑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저항없이 끌려가는 모습의 예수를 그린 듯합니다. 폭력, 분개, 증오, 두려움 그리고 그림 밑에 숨은 야욕, 음모, 욕망, 거짓, 질투가 들끓고 이 모든 것들이 무겁게 짓누르며 밧줄에 묶인 몸 움직이기도 버겁지만 저항도 불평도 없이 그렇게 자신의 길, 남들이 끌고 가는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파리한 하늘 아래 나무 한 그루가 낙엽 한 장 없이 새파랗게 떨고 있습니다. 폭력, 분노, 증오, 음모, 살의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사람들, 과거 역사 안에서나 지금 현대에나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하소연, 울부짖음, 저항, 정당한 싸움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세상에는 테러, 내전, 살인, 원한으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 매일 같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해도 당해도 물러서는 법 없고, 폭력 앞에 폭력 한 번 써보지 않고 바보처럼 또 당하는 가난하고 가난하고 힘없고 힘없는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밀양, 강정의 할머니들 이 추위에도 물러서는 법없이 참 용하고 장합니다. 그렇게 당해도 폭력 한 번 쓰지 않는 바보 같은 분들 정말 대단합니다. 누군들 베드로처럼 칼 휘두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칼은 더 큰 칼을 부릅니다.
실패해도 조롱을 받아도 불이익을 당해도 명예에 먹칠을 당해도 끝까지 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인 것 같습니다. 걷다 걷다 보면 승리조차 잊고 그저 그 길을 걷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처럼…. 저 무력한 예수를 따르고 싶습니까?

 

<     욕망의 열차     >

화정도 내는 것 뭐 어때?
세상 천지 화 안내는 사람 있어?
질투? 좀 치사하고 내 속도 끓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 없잖아?
그래서 사람한테 몰래 해코지도 해봤어
뭘 어쩌라구? 나만 그래?
내 안에도 욕망 들끓어, 질 순 없잖아?
욕망의 열차 타지 않고 세상 어찌 살겠어?
잡아당겨내리고 밀치고 밟고 누르고
당하기 전에 먼저 한 방 먹이고
옆에도 뒤에도 온통 법석이야
그래도 내 앞에만 서지마

꿈틀거리는 욕망의 열차
바다로 돌진하지 않는 건
그 밑에 눌려
미크론씩 걸음을 떼는 사람의 아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