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4년 2월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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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되어 행복하다네

 

자가를 대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신앙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십자고상을 옆에 두는 것도 꺼림칙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까이 하면 고난, 불행 같은 것이 자신에게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덮친답니다. 반면에 어떤 성인들은 단식과 고행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행으로 몸을 혹독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살펴봐야 할 것은 십자가를 고행과 고통, 불행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오직 고통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은 인간의 잘못에 벌을 주는 무서운 하느님, 이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 앞에 인간은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보기에 세상 만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몹시 부정적이고 편협해지기 쉽습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 아빠의 결코 끝이 있을 수 없는 사랑의 체험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이런 영성을 살아가는 수도자는 장중하고, 근엄하며 쉽게 독재자가 됩니다.

반면 십자가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 하느님 아빠와 예수님의 온전한 일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일을 피해야할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불운 속에서도 운명의 여신의 장난질에 성난 바다 위 쪽배같이 까불림 당하지 않습니다. 굳이 십자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생에 고난이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고난의 시련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도 자유가 아닐까요?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꼭꼭 못박혀 있으면서도 마치 날아갈 듯한 자세입니다. 못박힘 당한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고통, 아픔, 슬픔, 절망이 이런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표정에는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슬픔과 아픔이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저 아픔을 보노라면 자유란 오직 사랑을 위한 것, 그래서 어쩌면 자유란 저렇게 매달리는 것, 악의 추함, 부패, 부정을 와장창 힘으로 부수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 사랑의 고통으로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란 오직 사랑하기 위한 것, 사랑은 어쩌면 무력함을 배우고 깨닫기 위한 것,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가 되나봅니다. 바보가 되어 행복한 것-이것이 사랑의 비밀 아니겠는지요.

 

<     새로 얻은 바다     >

바위 앞에서

멈칫거림 없는 파도

부딪쳐 포말로 산산이 흩어져

바다임을 상실하는

앞서가던 파도의 몰락

사랑의 눈짓마냥 강렬히 당기는

힘에 끌려

그대로 자신을 놓아버리네

포말의 자유

죽음의 두려움

죽음의 싱그러움

새로 얻은 바다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