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9월의 말씀


푸른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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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작가의 많은 그림들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각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다가도 문득 루소의 예수님, 베로니카, 여자 광대의 그 눈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그림들은 인간의 어떤 모습을 묘사한 것들로, 심지어 성인이나 예수님, 성모를 묘사하는 데도 사실은 사람의 어떤 모습이 더 많이 투사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찾아 평생 그리움을 끌 수 없었던 고흐는 자신은 렘브란트처럼 창조적으로 성화를 그릴 능력이 없어 아예 그리지 않겠다는 말을 동생에게 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마음, 예수의 마음 즉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욕망을 넘어서는 어떤 푸른 초월성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은 극히 드뭅니다. 인간의 고뇌와 기쁨, 사랑, 우울, 죽음, 생명의 새로움 등을 묘사한 그림들도 분명 우리 마음 속에 파문을 일으키지만, 삶이 그리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이 푸른 그리움을 일으키면 그 어떤 것도 이 그리움을 채워줄 수는 없지요. 그 그리움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최고의 것도 털끝만큼도 채울 수 없으니까요. 그럴 때 이 루오의 그림을 꺼냅니다. 루오의 인물들에서 볼 수 있는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마음을 꿰뚫으면서도 심판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얼굴인데 그 평범함 속에 깃든 무엇인가가 사람을 잡고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 마음의 차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드문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 소재 역시 말해주는 바가 큰데, 그의 소재들은 성서적 인물과 이 시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이들로 거의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지도자도 지니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그는 예수의 눈에 담습니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제가 조금은 더 부드러워진 듯 더 착해진 듯 느껴지는 것도 상상이나 감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림의 색깔이 저를 물들이는 것을 실제로 느끼니까요.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은 저 위 높은 곳에 홀로 고고히 계신 고상한 분이거나, 계신지 안계신지 도통 관심도 없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사실 드뭅니다. 그런데 루오에게 하느님은 현실입니다. 세상 무엇보다 심지어 자기자신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현실입니다. 하느님이 현실로 우리와 함께 머무시며 우리의 힘과 생명이 되시어, 우리 마음의 완고함을 벗어나게 하는 그런 구원 체험이 그림을 보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하느님이 현실로 머무시는 사람은 비록 세상이 무시하는 광대일지라도 하느님과 같은 눈빛, 고귀함을 지니며, 하느님을 무시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은 괴물에 가까운 추함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산 결과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현실로 머무시는 눈길과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살아감으로써 빚어진 추함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를 믿느냐?” 그의 그림의 묘사력은 무서울 정도인데, 그의 표현형식에는 사실 섬세함도 정교함도 찾아볼 수가 없음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다른 어떤 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강렬한 끌어당김이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작품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케 하는 맑고 투명한 색깔도 한몫을 합니다. 그는 말년에 작가로서 성공한 후에도 자신의 기준에 미흡한 작품 300점을 불태워버렸지요. 그가 찾고자 했던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임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작품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이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심지어 직원을 고용해 자신의 작품을 다량 생산해 시중에 내놓는 이들에게는 언감생심 머나먼 저쪽 나라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가 바라본 예수의 얼굴 그립습니다.

조르주 루오, 예수 그리스도,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