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6월의 말씀
지금까지 알아온 예수 ? – 새롭게 발견하는 예수 ?
금에야 가장 인기 있는 미술작품이 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한 점에 수십, 수백억을 호가하지만, 이들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는 그림을 사실적이고 실제처럼 그릴수록 평가받는 것이 흐름이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그림그리기에 서툰 화가들의 졸작으로 평가절하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결코 좌절을 몰랐던 인상파라 불리는 화가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런 시대의 흐름을 아주 건너 뛰어버립니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이 “피리 부는 소년”도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빛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물론 당대에는 졸작으로 여겨져 “살롱 드 파리”라는 미술전에서 낙선하는데, 에밀 졸라가 이에 격분했다고도 합니다. 그의 그림에는 입체감, 원근감이 없고 바닥과 벽의 구별도 없이 마치 평면 위에 소년을 오려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이런 평가는 당시 유행의 관점이라는 틀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선으로 보았을 때이고, 그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는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히려 복잡한 배경이나 원근감을 없애니 소년의 매력이 흠씬 풍깁니다. 배경색은 무덤덤한 회색으로 소년의 매력을 누르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른 듯 합니다.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바지와 윗도리의 색상이 소년다운 생명력을 북돋워 주며, 인상파 화가답게 빛을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여 얼굴과 연주하는 손과 피리에만 환한 빛을 비추고 살짝 그림자를 줍니다. 그리하여 소년의 손이 날렵하게 곡을 연주하는 움직임을 빚어내지요. 이 소년의 복장은 프랑스 근위대의 것으로 정교하게 묘사된 단추와 어깨를 감싸며 흐르는 흰색 장식 천과 화려한 모자는 근위대의 위엄을 보여주나 얼굴은 앳된 소년의 순수함과 긴장감이 감돌아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날렵한 손놀림으로 감지되는 근위대로서 자부할 만한 실력과 화폭을 건너오는 소년의 눈빛에서 오는 긴장된 청순함이 묘하게 어울려 화폭에서 소년의 피리 소리가 들려올 듯 합니다.
독창성이란 어떤 신기하고 기발한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이라기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어떤 존재의 매력에 자신이 먼저 푹 빠지는 것이 전제가 됨을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매력을 전달하고자 하는 혼신의 노력이 어떤 새로운 길을 찾아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을 당시의 흐름대로 배경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그리고 소년은 원근법과 입체감을 멋지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그렸다면 그저 멋진 그림 하나로 끝났을 것입니다. 소년의 푸른 긴장감과 그와 대조되는 숙련된 손놀림이 빚어내는 음악적 분위기는 결코 전달되지 못했으리라는 짐작이 들고도 남습니다.
고정관념대로 흘러가는 삶은 안전할지 모르나 지금 자신에게 다가온 세상과 그 새로움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는 짓눌려 터져나오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주류를 따름으로 인해 얻는 이익을 과감하게 포기할 푸른 눈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세상의 편견과 세상이 주는 이익보다 더 큰 무엇을 볼 눈이 있기에 그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눈은 일상의 눈과는 다른 푸른 눈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저 지금까지 알아온 그대로 예수는 어쩌면 내가 지어낸 예수일 수 있습니다. 푸른 눈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예수, 나의 고정된 생각 속의 예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예수는 일상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은 예수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어떤 틀 속에 쑤셔 박아 넣어 무엇이든 똑같이 만들어 내는 이상한 요술상자와도 같습니다. 요술은 요술인 만큼 실제가 아니기에 언젠가는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일상의 안일함은 나를 지켜줄 보호막이기보다 새로움을 가리는 차단막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를 만날 새로운 눈 지닐 준비 되셨나요?
에두아르 마네 피리부는 소년 18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