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6년 4월의 말씀
부활의 얼굴 그리움의 얼굴
얼굴은 부활의 얼굴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저를 고요히 한 방 치며 들어온 소리입니다. 저의 신앙의 여정 안에서 부활의 얼굴은 참 그리운 바로 그만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림에서도 사진에서도 실물 인간에게서도 만날 수 없었지요. 그리고 물론 저 자신 안에서도 …. 가장 종교적인 그림이라는 이콘에서조차 저는 부활의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부활의 얼굴이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곤 했지요. 하지만 부활은 죽어서 저 세상에서나 맞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리스도교 신학은 분명히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 내 안에 부활이 오지 않았으려니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이 얼굴을 그린 야블렌스키라는 화가는 “얼굴” 연작을 900점 넘게 그렸다 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린 수많은 얼굴 속에서 어느 날 부활과 같은 체험을 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사실 꼼꼼히 따져보면 구체적인 얼굴 표정도 없고 형태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 얼굴에는 오히려 여백이 대부분이고 경계는 흐릿하며 색상 비율도 환한 색이 보라색이나 회색 쪽보다 살짝 많은 정도이며, 입꼬리도 웃고 있는 형상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런 분석 없이 마주친 첫 느낌은 환함이었지요. 해변가의 쨍한 햇살 같은 환함이 아니라 살짝 어두운 숲속 오솔길에서 느닷없이 만난 환함이었습니다.
사각형의 세 모퉁이에는 회색에 가까운 보라색이 반씩 테두리를 채우고 있고 머리 혹은 눈 가까운 부근 선들에도 회색이나 검정에 가까운 색들이 내려 앉아 있습니다. 입술을 감싸며 왼쪽으로 뻗은 하늘색 빛도 있고요. 이런 숫자 세기를 멈추고 그저 멍하니 그림 앞에 서면 나를 고요히 통과할 듯한 투명함과 따뜻함이 번져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얼굴과 그 표정들 속에는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이런 환함, 이런 투명함이 어느 순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말없이 전해준 생명의 푸름과 따뜻함이 제게 위로라는 차원을 넘어 생명을 더해주었던 일도 기억이 났지요. 얼굴을 900점이나 그린 야블렌스키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그 그리움에 인간은 고독함으로 내달려 병을 얻기도 하고, 고독함에 짓눌리다 오히려 그것을 뚫고 어떤 예술성에 도달하기도 하고, 고독함과 고독함이 만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대동 세상을 만들고자 서툰 몸짓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원숙한 사람도 이 고독함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고독함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호수처럼 내려앉아 우리를 그쪽으로 부르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호숫가에서 우리는 설핏 그 그리운 얼굴을 보기도 합니다. 그 호수의 적막함, 스산함을 없애고자 몸부림치던 그 시간도 지나고, 호수에 설렁대는 바람에 폭풍우치는 밤도 지나고, 호수의 고요함 혹은 그저 호수인 그 앞에서 만나는 한 얼굴, 야블렌스키의 900점의 작품보다 더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 인생길에서 이런 얼굴 한 번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복인지요.
군중과 지도자들과 심지어 제자들마저 자신의 얼굴을 각각 제멋대로 오해하는 그 길을 걸어, 배신과 심판의 순간을 거쳐 십자가 처형과 묻힘을 겪은 후, 다시 제자들 앞에 선 그 얼굴, 그 얼굴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수많은 얼굴이 스치고 간 그 길에서 야블렌스키가 만난 이 얼굴 앞에서 설핏 그 그리운 얼굴을 봅니다. 어쩌면 다음 순간 이 얼굴은 부활의 얼굴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지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그 얼굴을 찾아 다시 지금의 자리를 떠나는 지상의 순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활의 얼굴은 고정된 얼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이 사라진 그 폐허의 황량함이 아무리 기름진 들판일지라도 그곳은 이미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지 못할 땅일 테지요.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핑크 심포니, 18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