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2월의 말씀
연탄 이야기 – 성탄 이야기
재형 화백의 자신을 태워 피워올린 그림 하나 성탄에 나눕니다. 6-70년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참 정겨운 장면입니다. 저 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던 고등어, 갈치가 떠오르고요, 연탄 위에 자갈을 올리고 간식으로 마른 오징어나 밤을 구울 때면 아이들의 입에서 침이 돌곤 했지요. 그러나 연탄에 대해서는 이런 따뜻한 추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 이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이 시대의 아픔이 있습니다. 연탄을 갈아야 할 때를 놓쳐 아래 위 두 장 모두 하얗게 다 타버리면 아주 번거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 벌어져, 번개탄에 먼저 불을 붙이고 그 열로 새연탄을 타오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새연탄에 불이 제대로 붙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위 시 그대로 타다만 연탄은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일산화탄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뇌에 치명적입니다. 자다가 참변을 당하여 일가족이 몰살하거나 평생 장애를 얻는 가슴 아픈 일들이 꽤 많았습니다. 연탄에 대한 회상이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절로 이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어중간한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설픈 무당이나 돌팔이 의사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하는데, 실제로 의료사고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같은 큰 건물을 잘못 지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은 일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학문의 어떤 분야를 철두철미 관통하지 못하고 적당히 얼버무린 사람이 어설프게 더 잘난 척하는 모습은 그래도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설픈 경우들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교만함입니다.
그리고 수도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도 예외 없이 이런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 길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적 수단으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며, 그 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것을 요구받고 체험하고 터득해가는 변모의 길입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일등 하라, 최고 되라, 남보다 앞서라, 지면 바보된다.” 이런 가치만이 입력되어 온 뇌속에 “꼴찌나 첫째나 다를 바 없다. 심지어 바보가 되라, 달라면 주고, 때리거든 맞아라.” 이런 소리들은 처음에는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마음은 역반응,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과거와 현재의 역동성 안에 까불리던 어느 캄캄한 밤, 이 새로운 가치들이 환한 빛이 되어 수도자를 비추는 체험을 하는 때가 옵니다. 이 말씀들이 그대로 마음 가득, 영 가득 환함이 되는 체험은 참 중요한 순간이나, 아직 몸 구석구석까지 그 가치가 내면화된 것이 아니요, 은총으로 내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새내기 수도자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자신이 마치 굉장한 단계에 오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살짝 교만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수도의 길에서 정상적인 과정 중에 하나지만, 이 과정이 오래 가거나 여기서 멈추면 아주 이상한 수도자 하나 탄생하는 것이지요. 즉 타다만 것은 쓸모 없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해를 끼칩니다.
이 지상에서 불타는 것은 모두 재를 남기며 원래의 자신은 사라지고 주변에 열과 빛이라는 도움을 남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 유명한 ‘모세의 불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불타 올라 그 빛으로 타자를 온전히 비추며 타자 역시 불타오르게 하되, 자신은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넘긴 예수는 이 지상에 죽은 몸 즉 재로 남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태워, 아버지의 사랑을 인류에게 몽땅 넘겨주시되 자신은 그대로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충만해지셨습니다. 온전한 타오름은 자신도 타인도 풍요롭게 합니다. 성탄, 강생의 신비입니다.
황재형, 연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