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0월의 말씀
생명 건네주기 – 생명 말리기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인데도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 올라 저 중년 남성의 정강이를 한 번 걷어차주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일상 안에서도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일상의 삶이 참 만만치가 않습니다. 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쉽지 않지만 남의 일이 되면 문제는 더 꼬이는데, 이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남의 일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면에서는 이 말이 맞고, 남의 일에 내가 왜 부아가 치미느냐는 면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남의 약점, 꼬이거나 뒤틀린 면에 속이 뒤집히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속이 뒤집힐 때 그 사람 탓에 이리 속이 뒤집힌다는 사실이 마땅하고 옳은 듯 분통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이 사실을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짜증 나는 신사”가 이 그림 제목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짜증도 내야 할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이 그림을 한 번 살펴봅시다. 열차 안에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검은 상복차림의 한 젊은 여인이 앉아있습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으나 아주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잃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는지 아니면 돌아오는 길임에 분명합니다. 검은 모자에 검은 장갑까지 정식으로 장례식 복장을 갖추었습니다. 그녀의 상실의 슬픔은 주위 시선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큰 듯 하여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남편을 잃은 경우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염치 없는 중년 신사가 위로하는 척 여인의 뒤에서 선심을 보이지만 그림 속에서도 그 검은 속내가 훤히 보입니다. 슬픔이 줄줄 흘러 옆사람까지 적실듯한 여인을 두고 실실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남의 슬픔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 생활 안에서 이런 경우를 적잖게 마주칩니다.
남의 불행을 평소 품었던 원망을 갚을 기회로 보는 사람, 남의 기쁨에 배아픈 사람, 얌체족이라 불릴만한 여러 일들 즉 고생스런 상황이 뻔할 때 자신만 쏙 빠져나가길 밥먹듯 하는 이, 맛있는 것만 먼저 골라 먹는 사람, 사람의 밑바닥을 뒤집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 남이 고생한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 사람,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닌 척 하는 사람. 뭐 이런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우리 일상 안에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좌절을 겪는 사람, 세상을 등지고 고립의 방에 박히는 사람, 세상을 향한 분노로 자신의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의 경우들을 생각해보면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서로에게 생명을 건네주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서로 생명을 말려버리는 그런 상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타자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받은 생명을 또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타자에게 건네주며 생명은 흘러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건네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생명을 서서히 말라가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미움, 질투, 분노, 원망, 모욕, 폭언, 중상 이런 것들은 상대를 서서히 말라가게 만듭니다.
위의 중년 신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젊은 여인의 슬픔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말라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 뻔뻔한 얼굴에 속이 뒤집히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일 듯 합니다. 여인의 눈빛 속에는 슬픔과 함께 분노와 짜증이 가득 고여있습니다. 뒤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노인은 상황을 뻔히 다 아는 듯한 얼굴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기도 뭣해서 그저 모르는 척하고 있으나, 아마도 속은 꽤나 부글거릴 것 같습니다.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전쟁터에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일상 안에 너무도 깊이 들어 와있습니다.
Berthold-Woltze 베르톨트 볼체, 짜증나는 신사, 18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