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9월의 말씀
새길 앞에서
구에게나 비켜 갈 수 없는 삶의 한 자락쯤은 있게 마련인데, 이 그림은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 무엇도 어떤 이도 개입할 수 없을 듯 한껏 몸을 구부린 이 연로한 이는 아브라함이요, 내 삶의 그런 순간이 오롯이 겹쳐집니다. 자신의 존재를 훌쩍 넘어서는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는데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는 무력함 앞에 던져지지만, 그 누구의 힘도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전체를 다 뒤져도 세상적 인간적 방식으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샤갈은 그림 전체를 모래알로 그린 듯한 화법으로 이 상황을 이해시켜버립니다. 그림의 틀도 모래알이요, 아브라함과 물병과 지팡이 심지어 천사마저도 모래알 같은 점으로 그렸습니다. 이전까지의 세상은 그 앞에 그렇게 스르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라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정착의 땅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유랑의 삶으로 들어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을 샤갈이 포착한 것입니다. 성경보다 더 깊이 성경을 읽어내는 그의 깊음이 새삼 부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느닷없이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 앞에 한없는 무력함을 느낄지언정 그의 몸짓에는 거부가 전혀 읽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온존재로 받아안기는 했는데, 자신에게는 한 발자욱도 그 길로 갈 수 있는 힘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천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미 온몸이 향하고 있고, 땅에 내려놓은 지팡이도 그쪽을 향합니다. 아브라함과 달리 천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힘있게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갑작스런 하느님의 지시에 무력함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간적 세상적 방식을 찾고자 동분서주하지 않으며, 앞으로 갈 길의 프로젝트 같은 것을 꾸미지도 않습니다. 그는 온몸을 웅크리고 내면 깊은 곳의 심연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의 힘과 지혜와 생명과 사랑의 원천은 오직 그곳에만 있음을 그는 알기 때문이지요. 그의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내면의 목소리, 그의 힘과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자 마지막인 그 목소리에 닿는 일만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의 힘과 지혜는 오직 여기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신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생명은 이미 제단 위에 부어질 포도주로 바쳐졌습니다.”라고 한 사도 바오로가 떠오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없는 무력함과 동시에 유일한 분께 대한 신뢰입니다. 무력함과 무기력함은 아주 다릅니다. 무기력함은 자신의 힘에 의지함에서 나오며 쉽게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무기력함만을 오래 경험한 이는 정신병적 상태로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전혀 가보지 않은 새길 그것도 위험과 도전이 있을 것이 너무도 뻔한 길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무력함 앞에 저렇게 온전히 그분 목소리만 귀 기울이며 내면을 향할 수 있는 그 존재의 바탕은 참 부럽고도 부러운 것입니다. 이런 신뢰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일의 성과나 사람들의 평판 여부에 삶이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새길에 들어서면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경력, 여정, 가문, 능력. 가까운 사람 등은 전부 무가 됩니다. 이것은 존재가 잊혀지는 일입니다. 삶이 온전히 무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가게 될 방향 앞에 놓인 예상되는 미래는 인간적 시선으로 볼 때 결코 탄탄대로가 아니며 오히려 고난과 역경의 연속임에 틀림없지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과 가장 필요한 것과 현재 시급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 시선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모래알처럼 무너지는 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때입니다.
마르크 샤갈, 성경삽화 중 아브라함, 19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