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7월의 말씀


삶의 층층에 쌓인 지혜

그림을 그린 크리스챤 세이볼트는 바로크 시대 독일 화가로, 현실 모습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게 이상화된 모습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유행이던 시대에, 있는 그대로 인물의 모습을 그린 시대를 앞서가는 초상화와 자화상을 주로 그렸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지닌 어떤 힘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의 마음 속으로 훅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인 예전 세상에서나 지금이나 사람이 늙어가면서 삶의 층층에 지혜가 쌓이고, 자신의 습성이나 약함은 뒤로 물릴 줄 알게 되어, 자신보다 주변을 감쌀 수 있는 그런 노인이 되는 일은 예전 문화에서든, 현대에서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노인의 지혜는 삶이 막힐 때 빛과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만, 요즈음은 참 찾기 어려운 진기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며 난관에 봉착했을 때 친부모보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지식과 달리 지혜는 머리 속에 집어넣어 양을 불리는 일이 아니며, 머리만이 아니라 몸속으로 들어가 쌓여 자신과 하나가 되고 그 사람의 인격이 되어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노인의 지혜는 한 집안뿐 아니라 한 마을을 구하고 인도하기도 하는 등불이었지요.

눈빛의 총총함에 그대로 빠져들게 하는 그림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눈빛은 총명한 눈빛이 보통 보이는 도전적이거나 쌩한 느낌이 없고 모든 것을 수용할 너른 마음의 여지가 읽혀집니다. 주름살이 저리 고울 수도 있네요. 이탈리아의 어떤 배우는 분장사에게 자신의 주름을 보이지 않게 감추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이런 말을 했다지요. “주름은 내 평생 걸려 만든 것이니 감추지 마세요.” 이 그림 속 여인이 했을 법한 말입니다. 넓은 이마와 곧은 콧대, 다문 입술 이 세가지 요소가 합쳐지면 통상적으로 조금은 거친 모습이 나오기 쉬운데, 이 여인의 모습에서는 따뜻함이 절로 풍깁니다. 낯선 사람이 가더라도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은 어렵지 않게 내올 것 같은 인상이지요. 그럼에도 아무나 무시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함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자신의 삶을 내어놓고 바치는 것과 삶과 생명을 허비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의 예전 어머니들 가운데 평생을 뼈 빠지게 고생하고도 자식들로부터 인정받기는커녕 무시당하고, 그 결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허망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보았지요. 그렇게 고생하고도 왜 그 결과는 이리 비참한 것인지요. 제가 보기에 이런 분들은 삶을 바친 것이 아니라, 허비한 결과로 보입니다. 삶을 허비하는 경우, 언젠가는 대가가 돌아오리라 헛된 희망을 품고 맹목적으로 자신의 삶을 타인 특히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만 사용합니다. 자신 안에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남도 들어올 자리가 사실은 없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삶을 바치는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길이기에 갑니다. 자신의 삶과 정열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내 꿈을 대신 채워 줄 대체물로 자녀들을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이에게는 그 삶 자체가 이미 보상입니다. 자신 안에 자신의 자리가 있기에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내 자리를 마련해달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과 에너지만 내놓고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삶 그 자체가 자신에게 보상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삶의 질곡 구석구석 힘겨운 상황마다 그 헌신은 지혜로 차곡차곡 쌓이고, 그 지혜는 그 사람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줍니다. 자식이 주는 행복 이전에 자신이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지혜는 삶을 바라보는 그림과 같은 투명한 눈을 길러주어, 삶 그 자체로 타인에게 빛이 됩니다. 생명이 건너갑니다.

크리스챤 세이볼트 1695-1768 An old woman

(51779)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석곡로 378

E-mail : ocsokr@daum.net ☎ 055-222-3801 Fax 055-221-8961

엄률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