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6월의 말씀
생명, 싱싱함 & 폭력성
명력, 싱싱함, 폭력성이 구별할 수 없이 뒤섞여 아이들 장난 속에 펄떡거리는 그림입니다. 사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생명과 폭력성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기가 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깨물거나, 심지어 맛있게 빨아먹던 엄마의 젖을 물어버려 엄마가 비명을 지르게 하는 일도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아주 딴판은 아닌가 봅니다.
19세기 말, 가난한 아이들의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다 해어진 옷에 신발조차 없이, 장난감 같은 것은 구경도 할 수 없는데도 자신들의 놀이 속에 푹 빠져있습니다. 장난감이 지천으로 널린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지만 옛날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만들고, 장난감도 자연이나 쓰다 버린 폐물에서 스스로 구해왔지요. 그래서인지 진지하다 못해 놀이와 현실이 구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어, 보는 사람도 그 놀이 속에 빠져들게 해줍니다. 장님 역할을 하는 아이를 살펴보면 두 아이보다 옷이 더 남루하여 윗옷은 거의 흘러내릴 지경이고 바지는 무릎이 훤히 다 보이는데도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다른 두 아이와 달리 머리를 제법 예쁘장하게 길렀습니다. 두 소년은 장님 역할을 하는 한 소년을 진심으로 골려주고 싶은 심정이 표정에 잔뜩 고여있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남루해도 평소 주눅 드는 일 없는 친구가 살짝 밉살스러웠을까요?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저렇듯 함께 놀고 있는 놀이 속에도 인간관계 역학은 멈추는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놀이 속에서 더 리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이들의 놀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인을 대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법까지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 역학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느냐고요? 장님 놀이를 하는데 두 녀석이 함께 의자 있는 쪽으로 장님 역의 친구를 끌어들입니다. 이 놀이는 자신을 유혹하는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잡으면 역할을 바꾸게 되는데, 제법 넓어보이는 창고에서 하필이면 걸려넘어져 다칠 수도 있는 의자 쪽에서 장님을 유도합니다. 약간 고의성이 보이지요. 골려주고 싶은 마음, 약올려주고 싶은 꼬인 마음이 폭력성을 띠는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어쩌면 생명력이 펄펄 뛰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요소들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가 봅니다.
인간성 안에는 누구나 잘 알고 경험하듯이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다 함께 엮이고 풀리고 하면서 삶을 영위해갑니다. 가족 안에서조차 우리는 부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그에 대처하는 방법도 배우는 것이지요. 점잖아야 할 어른들은 체면 차리다 오히려 체면 구기거나, 상대의 폭력성에 속절없이 당하고는 더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관계가 엮여 본 적이 없는 탓에 상대의 행동이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그러다 보니 쉽사리 상대를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기 쉽습니다. 현실 안에서 많은 일들은 우리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역동성은 영이 단순한 어린이 시절에는 몸으로 뒹굴며 자연스럽게 체득합니다. 삐지고 뾰루퉁해지고 약올리고 속이고 쥐어박고 발로 차기도 하고 이 모든 폭력성이 배인 행동과 말들이 자신과 친구에게 미치는 영향을 싱싱한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배워갑니다. 무시도 당하고 무시도 해보고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을 준비는 어린 시절에 이미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놀이인 장난을 대신하여 이 시대 어린이들은 비싼 장난감만 상대합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같이 장님 놀이할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와 놀 시간 따위는 엄마가 짠 프로그램 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생명력은 또래 친구들을 만나 경쟁하고 아끼고 놀려주기도 하며 쑥쑥 자라 건강한 어른이 되어갑니다.
Guiseppe Constantini 장님 놀이 18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