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2월의 말씀
비움의 무거움과 아름다움
우는 일의 무거움은 도전해본 사람은 잘 압니다. 비웠다 싶으면 슬며시 기어 나오고,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놀래키며 튀어나오기도 하고, 거의 되었나 싶었는데 원상태인 것 같고, 한숨도 참 많이 쉬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비우는 작업 자체가 성과 불문,아름답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애씀은 자신은 안타깝지만 보는 이에게는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하지요. 비우고자 하는 마음 하나 먹는 일도 사실은 인생 꽤나 걸리는 일이지 않습니까. 평생 당신 뜻대로, 마치 온 가족이 기계 속 나사 같은 부품처럼 착착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저희 아버지가 말년에 회심을 하고서는, 어느 날 수도원을 찾아와 “내가 ‘마음 바꾸기 작업’을 하는데 너희 엄마가 만고에 도움이 안된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던 기억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은 지금에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합니다. 엄마로서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을 것이고, 그래 봤자 얼마 가겠나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한 성질하시는 저희 아버지는 그 성질 덕분인지 그 마음 운동을 끝까지 밀고가셨고, 돌아가신 뒤 영정사진을 본 친구들은 “너희 아버지 성형수술 하셨냐?”고 물을 정도로 모습마저 변하였지요. 평생 얼음칼 같던 그 성정으로 우리들에게 상처 꽤나 남기셨지만 그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큰 선물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결국 그것은 비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비움은 왜 그리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움은 살아있으면서 자신을 작은 죽음에 넘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선을 견뎌야 하고, 빼앗고자 하는 이에게 자신의 것을 넘겨주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혹은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다른 이를 도와주어야 할 때 더욱이 그 일이 자신의 일보다 하찮은 일로 보일 때, 갑작스런 불치병 통보를 받을 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할 때 이것은 일종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위의 모든 일들은 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올가미처럼 자신을 더 칭칭 옭아맵니다.
어쩌면 이 해답 없는 난관 앞에서만 비움만이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자유도 비움에서만 시작될 수 있으니, 자유를 찾고자 온 세상을 헤맬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이런 역경 안에서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비운 후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예술 작품인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많은 것을 비우고 남길 것만 남긴 예술 작품이 아름답기가 쉽지 않습니다. 뭔가 시원하긴 한데 어딘지 아쉽고 한 자리가 빈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쉽습니다. 비워내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기술적 구성미나, 평생 갈고 닦은 솜씨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비움에 담긴, 비우고 비워 그래도 남은 그 무엇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술가 자신의 삶이요, 그 삶을 채운 어떤 정신이나 철학이요, 그 채워준 것마저 비우고 비워 남은 것,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그 무엇입니다.
이 묵상을 하게 해준 이창림 교수의 조각은 비움으로 작품이 된 드문 경우입니다. 비우니 방이 생기고 비우니 성모님이 나타나고, 성모님마저 비우니 아기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어떤 모습도, 표정도 없으나 성모님과 아기예수님, 십자가의 철두철미한 비움이 거기 나타납니다. 심지어 무덤 동굴도 나타납니다. 그 무덤 동굴은 썩는 냄새 쾨쾨하고 음침한 동굴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 단순함이 공기로 채워진 들어가고 싶은 곳입니다. 기꺼운 죽음에는 모두 이 비슷한 향기가 나고, 온 존재로 행해진 비움에는 이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비우고 남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끝없이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이 지상의 유일한 존재이니, 자신을 넘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그 복됨. 인간만이 지닌 이 복됨을 포기할 수야 없지요.
이창림, 비움의 아름다움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