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5년 1월의 말씀


희망의 안테나

무 아름다워 저 속으로 들어가도 죽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젊음의 열기가 모든 것을 태워 제 속이 바싹 마른 사막과 같던 시절 저는 비만 오면 태종대 자살 바위로 가곤 했습니다. 학생이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완행 기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음에도 그런 불편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비가 퍼붓는 자살 바위 위에 서면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은 묘한 일체감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자살 충동과는 다른 바다와 하나 된 느낌이랄까요.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과 바다의 전율 일으키는 깊이 모를 푸름이 나를 그대로 안아줄 것만 같았지요.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은 채로 ….

아이좁스키가 위험을 무릅쓰고 태풍 몰아치는 바닷속으로 들어갔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디지털 측정계기가 없던 시절에 선원들은 먼바다에서 파도를 만날 때 자신의 본능과 관찰의 힘으로 파도의 정도를 헤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적된 오랜 관찰은 아홉 번째 덮쳐오는 파도가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알아내었고, 아홉 번째 파도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그 아홉 번째 파도의 직격탄을 맞고 다 부서진 배의 한 부분에 6명의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사람들은 거의 유령에 가까운 모습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파도의 그 무서운 위력에 죽음의 사신의 손길이 바로 자신의 목덜미를 휘감는 체험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을 터이지만, 짠 소금물을 들이키고 바싹 갈라진 목과 쓰라린 눈, 아직 출렁이는 파도 속에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공포감만으로도 거의 죽은 모습일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 앞을 향해 필사적으로 붉은 천조각을 흔들지만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들이 유령이라도 본 것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널브러진 가운데도 힘이 아직 남은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붉은 천을 흔들어댑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각이 길러진 이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제3의 눈이 생깁니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바다의 대조는 삶과 죽음의 상징일까요. 삶과 죽음은 늘 맞닿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렇듯 장엄합니다. 죽음과 삶을 딱딱 분류할 수 있다면 아주 단순하겠지만,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죽음과 삶의 그 아슬아슬한 맞닿음이 현실에서는 실감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저 아홉 번째 파도처럼 우리는 그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부서진 돛대가 십자가 모양인 것은 화가의 선명한 의식 이전에 보는 이로 하여금 참희망이 솟는 샘자리가 어딘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서 희망의 원천을 찾을 때 절망만이 남을 뿐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그림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2025년 첫 달을 맞았습니다. 그저 2024년의 끝에 이어지는 늘 그런 시간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요, 또한 그것만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운 한 해입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들이쉬면서 어떤 사람은 정신이 맑아진다 하는데 어떤 이는 마음이 시려진다 합니다. 어느 쪽도 현실이나 두 현실은 각 사람의 그 다음 순간들을 아주 다르게 물들입니다. 삶의 가장 마지막, 아무런 선택권도 남지 않은 죽음의 순간조차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선물입니다. 그 큰 선물일랑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인생은 불공평이라는 방석 위에 주저앉는 일 없는 새로운 한 해를 기원합니다.

Iwan Aivazovsky 아홉 번째 파도 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