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11월의 말씀
기도의 자리 – 삶의 자리
억이 아련하게 돋는 그림입니다. 옛날이든 지금이든 아이에게 기도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실로 기도의 힘을 믿는 엄마의 진심일 것입니다. 어디 기도뿐이겠습니까?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게임 그만하라고 잔소리, 큰소리 다하면서 자신은 TV나 컴퓨터 앞에서 즐길 것 다 즐기고 있다면 아이의 마음 속에 공부할 의지가 커지는 일은 일어날 리가 없을 것이요, 반항심만 부글부글거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잔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딜 가든 잔소리는 넘치고 넘칩니다.
잔소리는 하고있는 본인과 듣고 있는 상대방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이중 삼중 손해 보는 일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일은 하나의 예술이요, 공감의 차원을 만드는 참 신명나는 일이지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것부터가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내려놓음 역시 억지로 마음을 비틀어 속의 것을 짜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과 같이 터득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기꺼움이 필수로 따라야 하지요. 내려놓으면 신기하게도 상대의 마음이 보입니다. 사실 내려놓음은 비워져있으니 상대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서 상대의 불가능한 영역과 한계가 보이고 더 뻗어 나갈 수 있는 생장점도 보이지요. 이 공감의 세계 혹은 차원 속에 있는 아이는 부모의 재촉 없이도 스스로 자기 성장의 길을 걸어갈 힘과 의지가 생겨납니다.
이 공감의 세계 안에 있는 이는 이미 기도의 입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세계, 삼위일체 하느님의 세계가 바로 공감의 세계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소박하나 정갈하게 꾸며진 방은 문고리 하며 낡은 천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식탁보까지 집주인의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입니다. 화가는 아마 상상 속 집이 아니라, 어떤 가정을 실제로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직 신앙과 이성의 결별이 확실하지 않던 19세기 유럽의 시골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십자고상과 성모자 그림, 성 요셉 그림이 이 집의 유일한 장식입니다. 이 작은 방이 기도하는 곳이요, 밥을 먹는 식당이며,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는 거실이기도 합니다. 창문으로 들어온 따뜻한 햇살은 마치 하느님 아빠의 사랑인 양 모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고, 단 하나뿐인 단출한 메뉴의 식탁조차 모자라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이 가난한 식사 앞에서 식사 전 기도를 아이 스스로 바치게 합니다. 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는 과도하지 않게 살짝 팔로 감싸 안고 옹알거리는 말로 기도를 바치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정갈하게 땋은 머리가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아침식사 시간인 것일까요?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단 한 가지뿐인 메뉴, 소박한 집안, 아빠의 부재 이 모든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는 어느 것도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딸과 엄마의 한마음이 된 기도의 분위기 때문이겠지요. 기도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는 기특함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단정하게 모은 아이의 손이나 자세는 억지로 시켜서는 나올 수 없는 모습입니다. 더욱이 빈약한 음식과 삶의 환경에 엄마가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낸다면, 아기더러 바치라고 하는 식사 전 기도는 강요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있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엄마의 기도 분위기 푹 젖어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빈약한 음식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 마음도 전염될 것입니다. 삶이 좋은 음식과 좋은 옷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음도 저절로 알아듣겠지요. 기도의 자리와 삶의 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Karl Gebhardt 1860-1917 Saying Grace 식사 전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