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9월의 말씀


수치심 새로운 자아

대인들 사고의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그림을 보면 ‘인간의 죄’를 떠올리고, 반대로 죄를 생각할 때면 이 그림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야 없겠지만 이 유명한 그림의 가볍지 않으나 흥미진진한 내용을 한번 따라가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이라 것을 빼면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절망적 모습이 우리네 어떤 체험과 참 많이 닮았네요. 그 멀어짐은 그림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인 두 사람에게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고, 수치심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를 형성합니다. 정원을 함께 거닐던 하느님을 이제 아담과 하와는 피해서 숨습니다. “왜 숨느냐?”고 묻는 하느님께 아담은 알몸이 수치스러워 숨는다고 답합니다. 참 우습지요. 언제는 알몸이 아니었던가요? 이전에는 알몸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몸임이 수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없던 자의식이 생겼음을 뜻합니다. 자신이 수치스러워 감추고자 하고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의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새로운 자아가 형성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저자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며 죄와 수치심, 남탓과 불행이 하느님과 멀어짐에서 비롯됨을 통찰하였습니다. 금단의 열매는 하느님이 속이 좁아 인간을 잡아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의 한계를 뜻합니다. 인간은 어떤 경계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굳이 어떤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도 인간 심연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한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산다면 자연인들 동물인들 심지어 동료 인간마저도 남아나는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수치심 가득한 인간에게 따라오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기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 탓을 돌립니다. 내가 불행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 주변이 이 모양이니 그런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논리로 꽁꽁 무장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전쟁이 터집니다. 상대방 역시 수치심 가득한 인간이니, 네탓이라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다 보면 어느새 주먹질로 바뀌는 법이지요. 악마를 뜻하는 사탄이란 말의 어원이 “고발자”라는 사실도 여기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이 수치심 가득한 자아는 사춘기 청소년들을 보면 아주 선명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아주 생생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 그 바탕이 수치심입니다. 부모의 관심조차 이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들리니 반항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쉽게 화를 내는 것도 인간은 보통 수치심이 건드려지면 화를 내기 때문입니다. 부모, 교사, 이웃도 이에 대한 어떤 처리법을 찾지 못해 중2는 김정은조차 무서워한다는 말이 생겨나게 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심 가득한 사람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의 식탁에 초대받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 창녀, 마귀들린 이들, 당시 세상이 벌레보다 무서워하고 피했던 이들이니 이들의 속마음은 수치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식탁에 불러 깊은 용서 체험으로 이끕니다. 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 무엇보다 마음 가득한 사랑으로 이들을 용서합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이 수치심이라는 말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때 마음을 여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수치심의 죄인들의 형제자매요, 이를 진짜 체험한 사람은 깊은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짐과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미켈란젤로 시스틴 성당 “천지 창조” 중 “낙원에서의 추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