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8월의 말씀


우리의 삶은 타자에게 넘겨주는 선물

“그

랜마 모지스”라 불리는 이 그림을 그린 할머니의 본명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1860~1961)입니다. 이 긴 이름보다 GrandMother 즉 할머니라는 애칭인 “그랜마”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 할머니는 75세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해서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250점은 100세 이후에 그린 것이라 합니다. 놀라운 것은 나이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2살 때 이미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해야 했고, 27살이 되어 농부와 결혼하여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으며, 10명 아이 중 5명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75세가 되어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릴 적 꿈이 떠올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내거나 마을 게시판에 붙이거나 벗들에게 선물하곤 했지요. 어느 날 한 미술가가 시골 마을 한 약국에 걸린 그녀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구입하고, 개인전도 열고 뭐 그런 여정을 거치며 미국 전역에 소개되고, 언론도 관심을 가지며 미국 국민화가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92세에는 “내 삶의 역사”라는 자서전도 출간하게 되지요. 이 자서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할머니의 말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어떤 것이 있다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저는 과일과 잼으로는 상을 받았지만 그림으로는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1년을 산 그녀는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신의 유산은 농촌 기술 지원금과 가난한 이웃들, 불치병과 싸우는 환자분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랜마의 그림들과 그녀의 사진 속 투명하고 따뜻한 눈빛 그리고 생애 이 세 가지는 같은 빛으로 반짝이며, 어떤 모순의 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그림을 처음 대하면 마치 금방이라도 화면이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밝음과 경쾌함이 전달됩니다. 이 할머니 작품들은 예술이 꼭 심오하지 않아도 인간의 마음에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결국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서 비롯됨을 동시에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12살에 가정부의 삶을 살고 아이를 5명이나 잃고서도 “삶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가져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할머니의 작품들과 그분 생애 자체가 우리에게 선물입니다. 생명을 남에게 넘겨주는 사람의 말과 행동, 무엇보다 삶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에 자신의 몸마저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으로 넘겨주셨습니다. 그 빵 안에서 사랑은 어떤 것인지를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그림 속에는 자신을 남에게 넘겨준 사람의 가벼움이 읽히면서 동시에 그 가벼움은 바람에 휙 날려버리는 일 없는 무게를 지님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지요. 한없이 밝고 경쾌하지만 그림 속 하나하나를 보면 평생 노동으로 다져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노동과 삶의 현장이 생생하게 담겨있고, 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군가를 위해 먹을 것을 장만하고 있는 장면들에는 누구도 노동으로 지치거나 힘겨워하는 모습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장면이 1년에 한번 있는 단풍나무 시럽 제조 잔치날이니 그 흥겨움이 넘쳐흐르는 탓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의 아내로 가정부로서의 삶은 노동에서 노동으로 하루가 채워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에게 노동은 몸과 인생을 짓누르는 힘겨운 일이기 전에 남을 먹여살리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추위도 그녀를 짓누르지는 못했나 봅니다. 온 천지는 새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사람들은 두터운 겨울복장을 하고 있지만 벌거벗은 나무들을 덮은 눈은 세상을 새하얀 꽃으로 뒤덮은 듯하며, 눈길 위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없지요. 추위와 엄혹함이 결코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세계를 그녀는 알고 있었나 봅니다. 사랑만이 노고를 달콤함으로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랜마 모지스 Granma Moses (Anna Mary Robertson Moses) 단풍시럽제조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