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6월의 말씀
새로운 시야가 여는 새로운 삶
진 말에서 멋지게 나뒹군 모습이 풀어내는 서사가 호기심을 잔뜩 자극합니다. 부드러운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고, 몸통은 부드러운 갈색과 흰색 그리고 머리는 흑갈색의 조화가 절로 찬사가 터지게 만드는 멋진 말입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그 말 아래 한 사람이 볼썽사납게 떨어져 뒹굴고, 함께 가던 이는 말이 달아나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눈마저 감겨 있는 것을 보면 갑자기 장님이라도 된 모양입니다. 말을 타고 왔으니 원래 앞 못 보는 이는 아니었을 테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회심하여 사도 바오로가 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를 믿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입니다. 사방이 캄캄한데 사도 바오로 주변만을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말이 앞발 하나를 들고 있긴 하지만 그림의 정황으로 볼 때 말이 날뛰어 그가 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말이 평소의 주인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한 편의 코미디 같기도 합니다. 마치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굴러떨어지셨어요?”라고 묻고 싶은 듯 하지않나요.
성경 속 상황은 간단히 묘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를 앞장서 박해하던 사울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있었고, 그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합니다. 분노해서 펄펄 뛰는 지도자들 앞에서 한없이 고요하게 할 말 다 했던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었던 예수님을 닮아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 사도 바오로는 당국으로부터 권한을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잡아 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기하고 위험한 무리들에 대해 분기탱천한 것 같은 사울의 내면은 저 스테파노의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균열이 생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에 임한 사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현재 권력균형의 유지를 위해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말에 누군들 뜨끔하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사울 같은 감성 예민하고 뛰어난 사람이 이 말에 무감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도행전에 따르면 빛의 벼락을 맞습니다. 바오로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던 눈은 닫히고 새로운 방향으로 볼 눈이 열리기까지 그는 장님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닫힌 눈을 하나니야라는 사람이 와서 열어주었을 때 그는 사울이 아니라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회심 후 그는 자신의 이력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쓰레기처럼 여겼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방향, 에너지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온존재를 관통하며 깨닫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지요.
대체 이 순간 그는 무엇을 누구를 만났기에 그의 자랑스런 삶을 다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섰던 것일까요? 생명의 주인, 사랑의 원천인 분을 만난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그 생명이 이 땅에 이미 와있음을, 유대교에서 그 힘겨운 율법을 지키며 기다리던 분이 이미 이 땅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 내동댕이쳐진 것입니다.
참 생명, 참 빛은 이런 것입니다. 저 아름다운 말처럼 빛나는 인생조차 쓰레기처럼 뒤로 던질 수 있는 진짜 생명이니까요. 세상 가치의 아름다움은 그 앞에서는 저 말 주변의 어둠처럼 캄캄한 것이지요. 최소한 죽음의 순간에라도 이 아름다움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지요. 우리의 것이니까요. 이런 빛을 보고, 그 빛을 섬세하고 장엄하게 우리 눈앞에 가져다준 카라바조 참 대단한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은 미적으로도 아름답지만 신학적으로 더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카라바조, 바오로 사도의 회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