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4년 5월의 말씀
꿈은 채집 목록이 아니지요
린 아이가 그렸음직한 발상의 그림입니다. 이상주의자라는 딱지가 훈장처럼 붙어다니는 화가 칼 스피츠베그의 그림입니다. 그가 이상주의자가 된 데는 시대의 격랑이 한몫을 합니다. 그는 1808년에 태어나 1885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반(反) 나폴레옹 동맹으로 수상에 오른 메테르니히가 군주제를 강화하고 18세기 후반 이래 싹튼 자유주의를 철저히 억압하는 시기였습니다. 출판과 예술 활동은 그 동안 누렸던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혹독한 검열과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예술은 정치·사회적 현실보다 소소한 일상을 묘사하거나 전원을 예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진리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타오르기 마련이고 그 목마름을 엉뚱한 것으로 대체하고자 하지 않는 이들은 사회현실에 맞서 싸우거나 이 화가처럼 은둔의 삶을 택하거나 하는 양극으로 나뉘는 현상을 보이지요. 은둔의 삶을 택한 이들은 칙칙한 절망 속에 힘겨운 걸음을 내딛기도 하지만 그 절망이 품고 있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예술로 표현해내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자유는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결코 뿌리 뽑은 적이 없으니까요. 절망 속에 희망을 길어내는 이들, 그들은 신앙인과 참 닮았습니다. 이 화가도 그래서인지 수도승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나비 채집꾼이 신비로움 가득한 숲속으로 나비 채집을 나섰습니다. 물통에 배낭에 모자, 우산까지 제대로 갖춘 전문적인 채집꾼입니다. 그런데 숲속 풍경이 열대 밀림과 화가 자신의 나라인 사계절 갖춘 독일의 숲이 묘하게 뒤섞여 동화 속 이야기가 펼쳐지고 요정이나 난장이들이 나타나도 조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지요. 채집꾼이 안경을 썼는데 눈이 몹시 나쁜지 안경이 70년대 코미디언 배삼룡님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뱅뱅 도는 안경을 쓰고 있는 탓에 채집꾼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안경 속 눈동자는 보이지 않아도 그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아주 굉장한 것을 만났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자신이 손에 든 채집망 속에는 도저히 담기지도 못할 엄청나게 큰 나비 한 쌍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나비는 놀라 달아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저 나비는 늘 화가 주변을 날고 있었어도 화가의 눈이 닫혀 볼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일상의 삶의 터전을 떠나 어떤 곳으로 향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그런 체험이 있습니다. 채집망으로 잡을 필요도 없고, 잡아서도 안될 나비입니다. 그 나비는 우리의 꿈이니까요. 꿈을 잡아 채집망에 넣는 순간 꿈은 이미 꿈이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 되어버립니다. 꿈은 우리 앞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채집망 속에 담길 채집 목록 중 하나가 아닙니다. 내가 꾼 꿈은 나의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세계, 나를 넘어서는 세계로부터 온 선물이니까요.
어떨 때는 비현실이 더 현실일 수도 있습니다. 스피츠베그가 살았던 냉혹한 현실이 어쩌면 더 비현실인지도 모르죠. 아무리 엄혹한 권위주의 체제도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꿈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황홀한 착각이요, 멸망에 이르는 착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한 가지. 그들만이 독재자라는 우리의 착각. 우린 누구나 내 자유는 최대로, 남의 자유는 빼앗고자 하는 독재자의 기질이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 비슷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꿈이 있어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창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왔습니다. 시대의 절망이 희망을 낳는 역사의 모순 안에서 우리도 채집망 따위에는 담을 수 없는 나비 한 쌍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기를 기도드립니다.
칼 스피츠베그, 나비 채집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