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5월의 말씀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5월

의 산과 들에 출렁거리는 초록의 생명은 “기뻐하고 춤추며 주님께 나아가세!”라며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이처럼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뛰며 춤추던 다윗”(2사무 6,1-23 참조)이 생각납니다. 어떤 이는 임금의 체통도 없이 천박하게 군다고 업신여기기도 하였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춤은 “진실한 예배자”(요한 4,23)의 몸짓이었습니다. 미드라쉬 전통에서는 “아담은 이미 어른”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아담이 우리 주님처럼 “아기”로 창조되었더라면 …… 아버지 앞에서 춤추고 기뻐하며 무조건 사랑받았던 기억이 있었더라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후, 드러난 자신들의 알몸이 비록 부끄럽고 두려웠을지라도 하느님을 피하여 숨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창세 3,1-11 참조). 달려가서, 저녁 산들바람과 함께 거니시는 아빠 하느님의 품 안에 숨으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다시 깨끗이 씻어 주소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며 늙은 엘리사벳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내적 눈이 없다면 쑥스럽고 머쓱하고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일이겠지요(루카 1,5-25 참조). 여섯째 달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창세 2,1) 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자렛 고을에서 메아리칩니다. 말을 배우는 아이가 아빠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듯 마리아는 응답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성령의 기쁨이 넘치는 마리아는 서둘러 젊은 사슴처럼 산을 넘고 언덕을 뛰어 달려가(아가 2,8-10 참조)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자, 이리 나와요. 일어나요.” 마리아의 인사말을 태 안의 아기가 먼저 듣고 기뻐 뛰놉니다. 어머니 엘리사벳도 같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축복합니다(루카 1,39-45참조). 두 어머니와 태중의 두 아이, 하느님이 하시는 큰일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 기쁨과 환희, 사랑 안에서 길러진 믿음의 충만! “돌판에 새겨진 계약의 궤” 앞에서 그렇게 춤추었던 다윗의 축제를 훨씬 넘어섭니다. 살로 된 심장에 계약 자체이신 분을 품고 있는 “계약의 궤”이신 주님의 어머니와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 거룩하며 아름다운 어울림입니다. 성모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아이처럼 흠이 없으신”(아가 4,7 참조) 당신의 영혼과 정신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스며들게 하여주소서. 일몰에 함께 노래하리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한처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잠언 8,30). “새 아담”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품 안에 계시는 영원한 아이”(요한 1,18 참조)이시며 우리의 임금이십니다. 아이이시며 임금이신 우리 주님을 알아 뵙고 경배드리는 이들은 그 옛날 다윗처럼 춤추며 기뻐합니다. 삼왕이라 불리는 동방박사들도 춤추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마태 2,9-12 참조). 아버지 하느님 곁에서 누리던 그 사랑은 온 세상 안으로, 모든 사람에게로 흘러넘치는 것이지요. 멈추지 않습니다. 천박하다고 비웃는 미칼에게 “나는 주님 앞이라면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라고 다윗은 말했습니다. 착한 목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더 낮아질 수 없는 곳, 더 비참할 수 없는 십자가 위에서도 한 마리 잃은 양을 되찾아 두 팔에 안고 기뻐하며 성부께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소서.”(루카 23,39-43 참조). 이 죄수는 자기 곁에 계신 분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둠이 짙은 한낮,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이름인 예수님”을 부르는 성모님의 기도는 아들 곁에 매달린 죄수의 선한 믿음에 가 닿았습니다. “예수님, 저를 기억하소서.” 어둠이 찢어집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이들을 만납니다. 그 만남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이 비롯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는 홑몸이 아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태중에 모시고, 성령과 함께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낙원으로 들어간 죄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이미 “새 하와”께서 서 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집”(요한 19,27 참조)으로 들어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이란다.”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곁에 있는 이에게 다가가 전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하느님의 아이입니다.”

지거 퀘더 / 너희는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