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4월의 말씀

어떻게 다시 태어날까?

“어

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1코린 2,9) 두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겠지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물을 숨겨두셨다면(마태 13,44)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오직 하느님을 향해 기다리는”(시편 62,2) 우리 마음이 쉴 수 없음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숨겨두신 그분께서는 우리 일상 안으로 슬며시 때론 느닷없이 침투하시고, 우리가 찾도록 재촉하시고, 스스로 발각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지혜 6,12) 보물은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알아보게” 드러냅니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소리를 듣고 스승을 떠납니다(요한 1,35-42 참조). 앞서가시는 분이 요한이 증언하는 “빛”이심을 알았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먼저”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순간 두 제자는 놀라운 광채 때문에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마음속 깊은 열망, 존재의 심연을 찌른 “낯선 이”의 거룩함에 감전된 탓인지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며 이끌리듯 따라갑니다. 다른 제자와 “함께” 안드레아는 그분께서 머무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는 외침은 분명하게 울려 퍼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발견하였네!” 벅찬 기쁨은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 자리는 누구라도 초대받을 수 있는 희망의 자리입니다. 다시 태어난 그들은 제자의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3). 숨겨진 생명을 다시 얻기까지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갈증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늙은 사람”이 과연 어떻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 3,1-10 참조). 우리를 지어 만드신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는 이들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지식을 갖추고 존경받는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야 없지 않을까? ……” 그는 밤의 어둠속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는 십자가의 어둠을 뚫은 섬광에 꿰찔렸습니다. “밤”의 니코데모는 이미 시작된 주님 빛의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요한 19,39 참조). 그는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주하던 “어머니 배 속에서 탈출”하여 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자기가 주인인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주인인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 나라는 지위, 명성, 권력을 쌓고 모으는 양적인 판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과 연민이 담긴 “물 한 잔”(마르 9,41)은 세상의 목마름을 치유합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린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이사 25,8). 우리의 눈물 속에 당신을 숨기십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요한 20,11-18 참조). 그분께서 먼저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마치 눈먼 이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눈이 열리듯(마태 9,30), 그녀는 부활하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거듭 돌아서서 “하느님의 자녀”(루카 20,36)로 태어납니다. “마리아야, 내 형제들에게 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당신의 하느님이신 분을 “너의 아버지, 너의 하느님”이라 하시며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랑의 눈물 속에 감추어진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후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예수님 인성의 신비 속에 더 깊이 참여할 것입니다.

루오(Georges Rouault) / 부활하신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