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2년 2월의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2월

의 평일 미사에서는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청맹과니 같은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민낯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서 “이웃”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제자들과 함께 우리를 다그칩니다. “너희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21).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막아버리는 완고한 마음, 깨달음을 막고 있는 그 돌심장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고 대답하는 카인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와 너를 아무런 상관없는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악한 마음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타인에게로 옮겨가지 못하는 탐욕이지요.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모여와 가르침을 받던 어느 날, 이미 시간은 늦었고 외딴곳이었습니다(마르 6,34-44). 제자들은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려 합니다. “스승님, 이젠 저들을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곧 가게들은 문을 닫습니다. 어서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독점하려 하고 군중의 필요를 외면합니다. 타인을 밀어내면 정작 우리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혼자”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군중에게는 “스스로”(마르 6,36) 하기를 요청했지만, 뱃사람이었던 그들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호수의 맞바람 속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요(마르 6,45-52). 제자에게도 군중에게도 주님은 함께 계셔야 합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주님께서는 “나와 그”의 갈라지고 흩어진 조각뿐인 까마득한 사이를, 한땀 한땀 꿰매시어 흘러넘치는 풍성함으로 채우시며 “나와 너”라는 아름다움을 직조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을 듣는 우리가 가진 것을 생색내지 않고 주저하지 않으며 내어놓기만 하면 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야단치고 설교하고 가르치시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힘 있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볼 수 있게, 눈을 뜨게 하십니다.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연중 제 6주간 수요일 복음 환호송). 당신께서 거저 치유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로 그렇게 될 수 있는 듯 간절한 열망으로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마르 8,22-26). 단지 보지 못하는 육의 눈을 치유코자 하심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이끄시는 복된 동행입니다. 그 옛날, 멸망할 죽음의 땅 소돔에서 롯과 그의 가족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온(창세 19,16) 천사들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얹으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고 물으십니다. 다시 당신 손을 얹으십니다. 한처음, 진흙을 빚으시어 감히 담을 수 없을 만큼의 당신 연민의 영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를 생명으로 나게 하셨지요. 그 창조의 시간입니다. 똑똑히,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는 인간을 아십니다. “약하고 초라한 정령들에게로 다시 돌아갈”(갈라 4,9) 수도 있기에 당부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소돔으로는 뒤돌아보지도 말고 들어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소돔은 육의 탐욕 – 방탕, 우상숭배, 시기, 분열, 이기심, 혐오, 노동 착취, 생태계 파괴, 대량 소비, 분쟁 – 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 탐욕들은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예수님과 늘 함께 걸었던 제자들조차도 어떤 것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는 말씀은 바로 “이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처지를 알고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 일이 “저 마을”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을 뜨게 된 이가 처음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이끄는 “걸어 다니는 생명 나무”입니다. 이 얼굴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놓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타인의 거룩한 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소경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 11c / 로마네스크 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