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10월의 말씀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께로

처음에, 꼴을 갖추지 않은 땅은 황량하고 공허하였습니다. 바닥 모를 심연은 어둠에 덮여 있고 물은 일렁거립니다.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시기 전의 혼돈입니다. “어둠이 심연의 얼굴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장엄하며 경이로운 혼돈입니다. 아름다운 명령의 말씀이 내리실 절묘한 그 순간을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견디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모두 챙겨서 먼(makron) 곳으로 떠났습니다(루카 15,11-24). 그는 방종하고 천박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 –실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을 훼손하여 다 잃었습니다. 가까워야 할 아버지에게서 멀어진 만큼 경계를 지켜야 하는 돼지들의 먹이에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무한 탐식, 무너진 창조 질서, 이제 그의 곁에는 누구도 무엇도 없습니다. 죽음같은 절망, 상실의 격랑만이 곧 집어 삼킬 듯이 어둠 속에서 출렁거립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영”이 움직입니다. 아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웁니다. “아, 나는 굶어 죽는구나.” 소리없는 각성의 틈을 비집고 빛이 스며듭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땅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욕망을 떨치고 일어납니다. 아들이 아직도 멀리(makron) 있는데 아버지께서 달려갑니다. 마치 경기장에서 상을 받는 한 사람이 달리듯이(1코린 9,24) 먼 곳까지 단숨에 달려오시어 껴안으며 속삭이십니다. “얘야, 나의 자애는 영원하단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기만 하여도 하느님과 우리의 먼 거리는 사라집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1요한 4,16) 영이십니다(요한 4,24). 하늘과 그 위의 하늘도 그분을 모실 수 없지만(1열왕 8,27)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삶 안에, 모든 실재 위에 현존하시는 주인임을 믿기만 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창조를 계속하십니다.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큰아들”(루카 15,25-32)은 그 잔치를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하늘과 땅 안의 피조물들도 자신을 마구 거칠게 다루었던 아들에게 저항합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정녕 저희 영혼은 먼지 속에 쓰러져 있으며 저희 배는 땅바닥에 붙어 있습니다.”(시편 44,26) 라고 온 피조물을 향하여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무한한 너머에 계시지만 또한 지금 여기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며 듣고 보고 계십니다. “자격 없었음”을 인정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섭리의 질서를 지키며 충실한 종으로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먹는 “생명의 빵”이 정녕 생명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시고,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애가 5,21) 항상 청하면서, 기다리시며 달려오시는 아버지께 달려갑시다(히브 12,1). 탐욕은 벗어 버리고, 온 우주를 싸안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입으면 좋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도 빠라클레토 성령이 그러하듯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외젠 뷔르낭(Eugene Burnand 1850-1921) / 자비하신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