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8월의 말씀

가장 먼, 가장 가까운

편 예언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거듭거듭 “저희를 다시 일으켜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라고 기도합니다(시편 80편). 보고 싶은 얼굴, 듣고 싶은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어색하지 않게 손잡을 수 있을 만큼 친숙하며 부드러운 얼굴, 나의 꿈과 의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부르심일까요? 그러나 정작 그분 얼굴, 그분 소리는 엄청 낯설고 당혹스럽고 모호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기도 하지요. 도망치거나 핑계를 대면서 응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성소에서 분향하던 즈카르야는 천사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천사가 말하지만 그는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루카 1,8-23). 그러나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는 천사를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기뻐하여라.”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지요(루카 1,29). 마치 아이가 퍼즐을 요리조리 꿰맞추며 놀이에 집중하듯.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하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마른 솜이 물을 흡수하듯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른”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이 터무니없고 놀랍고 황당하건만, 천사와 마리아 두 아이 사이에서는 친밀함과 신뢰가 쌓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꿈이 시작됩니다. 나자렛 고을에서 일어난 이 일을 회상하듯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nepios 어린이,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믿으셨기에, 하늘보다 더 먼 하늘의 하느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이 모십니다.

성모님께서 누리신 가까움은 어떤 것일까요? 낮은 자리, 비천한 자리로 물러나시어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 8,19-21). 예수님을 낳으셨으니 어머니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자리인 “예수님의 뒤”에서 믿음과 순종과 겸손을 배우시며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 숨을 받으시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모으시어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십니다(사도 1,14). 하늘로 오르신 그분의 먼 가까움을 이젠 내적으로 더욱 친밀하게 누리며 성령강림을 맞이하도록 준비시켜 주십니다. 가장 멀리 떠난 아들의 죽음을 품에 안으시더니 이제는 하늘로 올림 받으시어 “아버지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무십니다. 그 자리는 우리 여정의 종착지이며, 한처음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계셨던 곳이지요(요한 1,18). 우리도 멀리 계신 낯설고 당혹스러운 하느님을 가깝게 느끼며, 가까이 계신 주님을 알아 뵙고 섬길 수 있도록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저 먼 곳 하늘의 하느님께 가까이 계시기에 중요한, 소소한 우리 일상 안에도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넘어지면 일으켜주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여 주십니다. 하늘 본향의 희망과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살게 하십니다. “구세주의 존귀하신 어머니, 영원으로 트인 하늘의 문, 바다의 별이여, 넘어지는 백성 도와 일으켜 세우소서. 당신의 창조자 주님 낳으시니, 온 누리 놀라나이다. …… 죄인을 어여삐 보소서.”(시간경 끝기도 성모찬송가).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 16c / 성모 승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