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6월의 말씀

놓아 드리지 않겠나이다.

6월,

새벽 산의 초록이 참 싱그럽습니다. “그리스도님, 여기 없는 이들과 앓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소기원을 바치고 독서기도를 끝낸 후 성당을 나오면, 이미 새들의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 소리가 하늘을 두드리며 동녘 햇살을 깨우고 있습니다. 하루가 주님 안에서 열립니다. 촘촘한 그물로 맺어진 관계의 일상이 시작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틋하지만 성가시기도 하고, 마주하고 싶지만 멀어지고, 온갖 겸손으로 순종하기도 하나 다시는 보지 않을 듯 논쟁하고, 그때마다 너의 얼굴을 통하여 차츰차츰 낯선 나를 만나고, 서로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지요. 우리 사이만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이러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함께 일하셨음을 지나고 나면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벼락치듯 지금 이 순간에 엄습하시기도 합니다. 숨기신 채 우리 두려움 속으로 쳐들어오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편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창세 32,23-32). 밤의 어둠과 건너야 할 야뽁강의 거친 물결만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그 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씨름을 합니다. 그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반칙으로 야곱을 절뚝거리게 만든 것을 보면 한밤중의 낯선 이는 까닭없는 “공격자”이군요. 이길 듯한 싸움에서 지게 되자 야곱은 매달립니다. “저는 이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저를 축복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싸움을 걸어온 낯선 자는 “축복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매달리며 씨름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투 끝에 야곱은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야곱만 변화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변화시키시며 드러내십니다. 싸움을 거는 “낯선” 사람에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알리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태생 싸움꾼(창세 25,22) 야곱의 끈질긴 집념의 승부는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산, 건너야 할 강이 있고, 어처구니없이 ‘공격당할 수도 있음’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를 붙들고 씨름하듯 매달리지요. 붙잡고, 놓지 않고, 결코 거리를 두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계속 그분을 밀어붙이며 재촉하는 것이지요. 나의 책임과 의무를 그분께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몫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투쟁이니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며 그가 실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도록, 죽음의 구렁에 떨어지지 않도록 내 목숨을 걸고 투쟁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폭력과 무죄한 이들의 피로 물드는 척박한 세상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께는 어울리지 않습니다.”(창세 18,25).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바꾸십니다. 응답이 없어도 쉽게 물러서지 말고 그분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숨어 계시지만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더 간절히 그분께서 먼저 찾고 계십니다. 싸매 주시고, 살려 주시고, 일으키시어 우리가 다시 그분 얼굴 앞에서 살게 하여 주십니다. 하느님과 야곱, 두 승자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 해는 떠오릅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1925~2015) <해가 야곱 위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