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1년 2월의 말씀

내 얼굴 앞에 서라.

“그

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나를 버리고 …… 크레스켄스와 티토도 ……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2티모 4,9-16 참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사도 역시 평범하고 일상적인 두려움, 불안, 정신적 고독을 느꼈군요. 굳센 믿음의 희망, 담대함, 복음 선포의 열정을 지닌 그였건만. 한낱 인간의 고독이 이러하다면 영원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님께서 겪으신 버림받음의 고독은 어떠했을까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고,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르던 베드로마저 배반했지요. 우리와 조금 더 가까운 바오로의 고독한 절망을 이해하면서 감히 예수님 고통의 신비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를 앞서, 스스로 버림받아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신 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체적인 체험의 강도는 다를지라도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 고통이 왔다면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이미 가신 길이고 바오로와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앞서 걸어간 길임을 기억해야겠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사도의 전구를 청합니다.

사도 바오로만큼이나 열정적이었던 엘리야 예언자를 만나봅니다.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미 이르렀건만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1열왕 19,9-18 참조). 카르멜 산에서 위풍당당하게 사백 오십 명이나 되는 바알의 예언자를 사로잡은 엘리야는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 그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습니다. “일어나 내 얼굴 앞에 서라.” 엘리야를 동굴에서 나오게 한 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습니다. 그저 감미로운 사랑의 속삭임일까요? 아닙니다. 스스로가 설정한 현실,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의 얼굴, 자신의 계획, 자신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이 “발에 밟히듯 뭉개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내면이 다 비워지고 오직 침묵만이 남았을 때, 밖에서 주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두려움과 불안에 우리가 홀로 맞서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밖에서 우리 문을 두드리십니다. “함께 있자.” 더 가난한 이의 얼굴로, 초라한 얼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얼굴을 맞아들이면 우리의 가난과 어둠, 초라함을 당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우리 힘만으로 일어나서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끊임없이 은총을 청하는 것이지요. “다시 일어나게 하여 주소서. 다시 보게 하여 주소서.”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시며 우리와 함께 기도하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얼굴 앞에 설 수 있도록.

Sieger Köder/불이 지나간 후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