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20년 3월의 말씀

언제까지
까닭없이

“주

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번민을 제 마음에 날마다 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시편 13). 시편 예언자의 고통이 육체적 질병인지 약자가 겪는 사회 구조적 불평등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친구, 가족, 배우자로부터도 이해는커녕 오해받고 질책당하고 버림받아, 친밀한 관계가 단절되는 소외감 때문이지요. 이것은 하느님의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잊힐 것 같은 절망감입니다. 질그릇 조각으로 제 몸을 긁으며 잿더미 속에 앉아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는 말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2장).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살피시던 날들”(욥 29,2)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품은 채 하느님의 말씀을 재촉하며 침묵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 제발 누가 내 말을 들어 주었으면!”(욥 31,35).

“까닭없이”(욥 9,17) 상처는 더하여지고 숨 돌릴 틈조차 없지만 욥의 부르짖음은 절망의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헐벗은 채 버려진 이, 덮을 것도 없는 가련한 이, 불의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과 연대합니다. 유죄를 인정하고 용서받으라는 친구들의 거짓된 위로와 회유, 술책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창세 6,6)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갈 의롭고 흠 없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한 여인을 알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부서진 몸을 끌어안고 시커먼 흙 속에 파묻힌 진실을 밝혀 드러낸 어머니. 그녀는 폭풍치는 눈물의 강을 거슬러 “또 다른 용균이들”의 어머니 자리에 서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무죄한 이의 고통은 결코 “까닭없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시편 13,4).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며 당신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홀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시는 성모님께 나아가 자신 안으로 어머니를 맞아들이면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희 선조들은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고 당신을 신뢰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 감추지 않으시고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리라.”(시편 22).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아내에게 조롱받는 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