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11월의 말씀

하느님의 눈물, 라자로

“어

떤 부자의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있던 가난한 라자로가 죽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품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었다. 그가 저승의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라자로가 아브라 함 품에 안겨 있었다. 부자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여기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서 건너오지도 못한다.’는 말만 들었다.”(루카 16장).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드나드는 집 문 안과 밖, 참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건만. 눈감고 지나쳐버린 무관심이 보고도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며 살았던 부자는 정작 필요한 한 가지, 하느님께서 부르실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좌정하여 있지만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한다.”(이사 57,15)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요청하십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네 자신(생명)을 내어주어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리라.”(이사 58장). 하느님은 멀리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보다 더 가까운 것도 없습니다.

갖 종류의 가까움으로 가까이 계십니다. 그분의 타자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먼 가까움을 느껴 알 수 있게 하십니다. 만질 수 있게 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난민들, 억압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 –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장).
가난, 고통, 죽음에 닿은 라자로들을 보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나의 친구 라자로야, 일어나라.” 마침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신비롭게도 “라자로” 안으로 숨으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주님을 찾습니다. 그 얼굴 그 모습을 형제들 가슴 속에. ……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 그러나 무엇을 했나요?” (가톨릭 성가 404).
가장 겸손한 하느님 여종의 자리에서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어머니 성모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불행과 비극 앞에서 무관심, 무감각했던 마음을 회심시키는 눈물을 얻을 수 있도록.

눈물로 하느님의 눈물을 씻어 줄 수 있기를 성모님과 함께 기도 안에서 간절히 청합니다. 함께 우는 눈물에서 우리는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노브고로드화파 / 러시아 / 16C초 <데에시스의 성모(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