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9년 9월의 말씀

어머니의 품

“오

하느님, 당신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얼굴 위에 드러난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놀라운 당신의 은총!”(아틀라스 순교자 셀레스탱의 편지). 바다로 흘러가는 맑고 깊은 강물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결코 그 강에 시멘트를 쏟아 붓지는 못할 것이며, 폐수를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꿀을 빨면서도 꽃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 벌의 모습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타자를 넘어뜨리고 속이고 소외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에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요한 3장). 사람 사는 세상에 상식과 양심이 사라지고 절망, 불신앙 어쩌면 “악의 존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더러 일어납니다. 두려움, 불안이 밀려옵니다. “불안”이란, 하느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일 앞에서 그분께서 아직 움직이시기 전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나 개인에게나 “불안의 밤”은 단지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지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떠난 니코데모가 “밤”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기도와 겸손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런 것도 모릅니까? 내가 땅의 일을 말했어도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습니까?”(요한 3장). 어쩌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깊이 바라보며 작은 것들에서 경탄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의 고통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은 어미의 가슴이 창으로 찔리며 온 몸이 찢기는 바로 어미의 죽음입니다.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고통과 침묵”을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고통 중에 있는 온 세상 피조물과 아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토닥여 주시고, 달래 주시고, 함께 우시면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밤의 니코데모들이여, 어머니 성모님께로 달려가 눈물로 어둠을 씻어냅시다. 그러면 서로에게 또 다른 “어머니의 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감사송).

빈세트 반 고흐 <피에타(Pieta)> 1889 / 고흐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