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1월의 말씀

 

하느님의 어릿광대

 

“세

속주의와 불신앙이 한창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프랑스에 루오 같은 종교화가가 태어난 것은 참 경이로운 일입니다. 실존주의 허무가 깊이 침잠하고 있던 한복판에 그의 섬광과 같은 종교체험이 깃든 작품들은 사람들에게도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참된 신적 체험이 깃들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슬프고 가혹한 모습을 루오만큼 명확하게 본 화가도 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는 비관주의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습니다. 이 사실들이 또한 그의 신적체험의 진정성을 비춰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을 씻어주는 그런 종류의 눈물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또한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악에 접한 이의 참으로 마땅한 분노입니다.

쓸데없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핵심만 남기는 그의 기법 또한 독특합니다. 동양화처럼 여백을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그림에 핵심만 남김으로써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의 그림은 애초부터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인간실존의 고뇌와 고통스런 현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빼고서는 루오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광대를 주제로 한 작품이 수적으로도 눈에 뜨입니다. 얼굴만 그린 광대, 서있는 광대, 앉아있는 광대, 줄타는 광대, 말타는 광대, 공던지는 광대 등 종류도 다양하며 양으로도 수 십 점이 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을 보면 그의 의도를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루오는 볼라르라는 미술 중개상에게 자신의 그림 전체의 권한을 넘기는데, 그가 죽자 그의 상속자들과 그림에 대한 소유권 문제로 재판을 치르게 됩니다. 여차저차 한 과정 끝에 그는 미완성작품들을 회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모조리 불태웁니다. 그가 소송을 건 것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스스로 밝히기를 예술은 소중하기에 미완성작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광대 그림은 어쩌면 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자화상이라 한 “도제”라는 제목의 그림보다 광대 그림들이 더 그의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광대는 약삭빠르게 승승장구하는 세상의 승리자의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힘없는 사람, 세상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웃음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웃게 하되 자신은 슬픕니다. 이 양극이 만들어내는 깊은 슬픔, 그 슬픔을 통과한 이의 투명함이 화면 가득 넘칩니다.

그러나 루오는 세상의 양지로는 결코 나갈 수 없으며, 나가더라도 적응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간상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광대의 얼굴을 예수의 얼굴과 상당히 유사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그 눈빛이 그러합니다. 형용할 길 없는 투명함이 화면을 건너 사람의 마음에까지 와닿습니다. 밀어낼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투명함입니다. 이 투명함 앞에 서면 이들의 삶에 함께 연대할지 말지 결단을 촉구받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광대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루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이들처럼 세상의 변두리인, 작고 낮고 무시당하고 찌부러진 이들의 부류 속에 속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듯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의 눈빛을 광대의 눈빛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삶과 인간의 고뇌, 모순, 불의에 누구보다 민감했던 루오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만든 이는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광대요, 버림받은 이임을 조용히 그러나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루오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면서 세상의 한복판, 세상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며 무력한 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철저히 깨닫고 살아간 성인들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어릿광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