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10월의 말씀

 

공동체와 잔치,

하나됨의 자리

 

“혼

인을 하고 나면 당연히 잔치 자리가 이어집니다. 요즘에야 다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깔끔하게 헤어지지만 예전에는 며칠에 걸쳐 치르는 온마을 잔치였습니다. 거지들도 이때만은 배부르게 한상 받고 아이들 손에도 맛있는 것이 떨어지지 않는 며칠이 이어집니다. 혼인이 당사자들을 맺어주는 예식이라면 그 다음 이어지는 잔치는 결혼으로 맺어지는 부부가 속하는 집안, 마을 전체가 함께 나누는 하나됨의 자리입니다. 그 마을에 있는 거지들도 배제되지 않는 자리, 온동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새부부의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듯 신부도 신랑에게 속하고, 모든 이가 함께 이 하나됨을 축하하며 한 마음이 되는 혼인잔치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자주 하느님나라에 비유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수도승 공동체는 이 하느님나라의 표상으로 여겨지곤 하였습니다. 현실 안에서 보자면 수도승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몸이 오그라들 만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수도승공동체가 멋지고 훌륭하게 살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의 표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공동체가 아무리 잘산다 하여도 하느님나라는 인간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며, 그 공동체의 잘사는가 못사는가 하는 사실에 따라 결정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나라는 이미 이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선물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와있는 하느님나라, 하느님의 영역, 하느님의 다스림을 얼마나 깊이 사무치게 깨닫고 있는가에 따라 한 수도승, 한 공동체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하느님나라가 이미 와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이미 온전히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이는 온전히 자신에게 속하며, 타인과도 일치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생명과 죽음, 너와 나,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그리하여 죽음 안에서도 생명을 보고, 너 안에서 나를 발견하며, 나쁜 것이 곧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기에 그런 이의 삶은 잔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과 내게 낯선 이웃과 나쁜 것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은 하느님의 빛이요 노래입니다. 이 기쁨은 삶의 무거움과 비탄, 절망을 통과한 기쁨입니다. 심지어 이것들 위에 가볍게 올라선 이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하는 것이지, 단순히 아기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늘 기뻐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기쁨은 섬세하고 상처받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기쁨이 부서질 때도 기뻐하는 역설의 기쁨입니다. 우울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울을 훨씬 넘어섭니다. 밀려오는 현실이 후쿠시마의 쓰나미를 훨씬 넘어서는 강도를 지니더라도 그 쓰나미를 꿰뚫고 오직 참된 하나를 볼 수 있는 강인함을 지닙니다. 이런 기쁨은 신적인 영역 즉 하느님나라에 속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이런 사람은 속하는 영역, 발딛고 선 땅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 일어나는 온갖 희로애락이 그의 기쁨을 결정짓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는 오직 이 땅에 이러한 하느님나라가 확장되는 것만을 참된 목표로 삼으며 갈갈이 흩어진 욕망이 이를 향해 오롯이 방향을 잡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아주 단순합니다.

이런 단순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공동체는 매일 하느님나라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네가 잘되는 것이 나의 기쁨이며, 작아지는 것이 자기실현이 되는 그런 곳, 누구나 꿈에도 그리는 곳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은 창조 때에 이미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세상입니다. 샤갈의 창조라는 그림에서 보듯 모든 것이 기쁨의 무지개를 감싸고 춤추고돌며 십자가의 위의 예수님도 스텝이라도 밟듯 경쾌하며 물고기나 곤충이나 함께 하늘을 날고 천사도 인간도 하나의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수도승뿐 아니라 인간 모두는 이 나라의 백성이요 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