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에서 보내는 2017년 8월의 말씀

공동체의 자유

한 몸 속의 빛과 어둠

 

“기

억의 빈자리가 생겨난 공동체, 숨구멍이 있는 공동체, 화해의 삶을 살아가려는 이가 많은 공동체, 화해가 어려워도 끝까지 그 길을 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가 많은 공동체 !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화해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해 자신에 묶여있고, 가족과 화해하지 못해 가족에 묶여있고, 이웃과 화해하지 못해 이웃에 묶여있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해 세상에 묶여있는 이를 우리는 자유인이라 부르는 일이 결코 없으니까요.

반대로 자신과 화해하여 자신에게 자유롭고 가족과 화해하여 가족과 자유롭고 이웃과 화해하여 이웃과 자유로운 이는 자신이 머무는 자리의 빈자리, 숨구멍과 같습니다. 악이 스며든다 하여 칼을 휘두르기보다 그 악마저 안을 수 있는 길, 머나먼 길을 찾기를 원하기에 악과 선으로 대립시키는 분열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은 피할 길도 없음을 자유로운 이는 통찰하고 있습니다. 이 악을 피하면 저 악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작품은 제 개인의 견해로는 샤갈의 천재성이 가장 걸출하게 드러나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파라오와 여러 차례 맞장을 뜬 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바다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몸이 구름 기둥으로 반 나뉘어 있고 몸 위쪽은 이스라엘 백성 아래 쪽은 이집트 파라오의 군사들입니다. 성서에는 파라오의 군사들이 그 병거와 함께 홍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전멸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미 예전부터 유대교 랍비들이 이 부분을 하늘에서 천사들이 파라오의 군대를 위해 울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샤갈처럼 모세의 한 몸 속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백성이 함께 있었다고 한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이집트를 이집트로 보되 한쪽만을 택하여 내 편으로 아끼고 다른 편을 틀린 것으로 단정하여 멀리하지 않고 자신 안에 함께 품는 일입니다. 이것은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수도원에서는 참으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틀림과 다름은 결코 인간이 결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큰 내려놓음이 수반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와 가깝고 유사한 사람들을 내편으로 삼을 때 인간은 안심할 수 있고, 지지받는 느낌을 지닐 수 있으며, 그 그룹으로부터 오는 도움과 혜택도 큽니다. 그러나 이쪽 저쪽 모두를 품으려 할 때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어 고독한 입장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모이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런 편 가르기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샤갈은 한 몸속에 이것과 저것, 이 사람들과 저 사람들을 품으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근원도 그는 밝혀줍니다. 한 그림 속에 다른 장면을 그렸는데,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나는 나다.”라는 야훼 하느님의 자기 드러냄 앞에 있는 모세를 동시에 그리고 있습니다. 자유의 원천은 이것입니다. 나는 나이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분, 생명의 원천, 그분에게서만 우리는 이 자유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자유를 통찰하였다 하여도 우리 스스로는 이 자유를 얻을 힘이 없는 무력함을 현실 안에서 여실히 체험합니다. 세상에서 뛰어나다는 걸출한 위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만은 자유롭지 않았음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봅니다. 그 자유를 수도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도록 수도자들은 불리움받았고, 이 자유가 있을 때만 인간은 참으로 동료 인간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